영화 <아무도 지켜주지 않아>
중학생 때 집에 케이블 채널을 설치하지 않았다. 그때 집 텔레비전에 나오던 채널은 지상파 방송과 영화 채널 몇 개뿐이었다. 그리고 독특하게 일본 채널이 하나 있었다. 일본어를 알아들을 수 없으니 화면만 보곤 했다. 어느 날 뉴스에서 살인사건이 방송됐다.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살인(殺人)이라는 한자와 한 여학생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취재진이 한 여자를 둘러싸고 있는 장면으로 넘어갔다. 여자는 울면서 오열하고 있었다.
그 여자가 피해자의 어머니가 아님은 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는 건 눈치 챌 수 있었다. 당시 취재진의 행동이 마치 죄인을 대하는 듯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언론 그리고 국민들은 사회적인 연좌제를 적용시키곤 한다. 대표적인 사건이 국내에서도 유명했던 콘크리트 여고생 살인 사건이다. 여고생을 납치 감금한 뒤 잔혹하게 괴롭힌 후 그 시체를 콘크리트에 매장시킨 이 사건의 가해자들은 출소 후에도 지속적인 괴롭힘에 시달렸다. 이 괴롭힘은 가족에게까지 이어졌다. 가해자들의 가족은 이름을 바꾸거나 이사를 다니며 죽은 듯 살아야 했다.
이런 현상을 우울하고 섬세하게 담아낸 영화가 있다. 살인을 저지른 오빠 때문에 가족의 해체와 사회의 눈초리를 받게 된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아무도 지켜주지 않아>(2009)는 가해자의 가족이 겪는 아픔에 대해 이야기한다. 형사 타쿠미는 살인을 저지른 소년의 가족을 보호하게 된다.
일본의 매스컴은 살인사건이 일어난 후 가해자인 소년의 집을 찾아가고 가족들은 언론에 포위된다. 아들을 잘못 키웠다는 죄책감과 사회적인 수치심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아버지는 자살을 택하고 타쿠미는 딸 사오리가 받을 충격을 염려해 그녀를 가족들과 떨어뜨려 놓는다. 경찰이 가해자 가족의 신변에 만전을 기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가해질 위해를 막기 위해서다. 인터넷에는 가해자 가족에 대한 신상정보를 캐는 글들이 올라오고 그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견이 빗발친다.
매스컴과 네티즌들은 범인과 그 가족들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서 기를 쓰고 경찰들은 가해자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애를 쓴다. 이 영화에는 연좌제를 가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세 명 등장한다. 첫 번째는 신문기자이다. 그는 이지메로 학교를 그만 둔 아들 생각에 '가해자는 용서할 수 없다'는 사명을 지니고 살아간다. 피해를 본 건 아들인데 아들은 도망쳐야 되며 가해 학생들은 떳떳하게 학교에 다니는 상황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피해자 가족의 아픔을 보듬어주기 보다는 가해자 가족의 신변부터 챙기는 경찰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진다. 두 번째는 '대마신'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네티즌이다. 그는 네티즌들을 자극해 가해자의 가족을 찾아내는데 몰두한다. 그는 특별한 사명감이나 정의감으로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다. 마치 미스터리 게임처럼 정체를 밝혀내고 흐름을 주도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데 열중한다.
세 번째는 사오리의 남자친구이다. 그는 사오리를 유인해 위해를 가하는 모습을 생방송으로 방송하려는 남자들에게 보내버린다. 질책하는 타쿠미에게 살인자의 동생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며 오히려 큰 소리를 친다. 사오리는 오빠의 잘못으로 가족을 잃었다. 무엇보다 괴로운 건 본인의 잘못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게 된 것이다.
영화는 이런 사오리의 곁으로 타쿠미를 보낸다. 타쿠미는 과거 뒤쫓던 범인을 체포하지 못해 눈앞에서 어린아이가 죽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아픈 기억이 있다. 피해자를 지켜주지 못했던 그는 가해자의 가족을 지키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매스컴의 추적을 피해 도망치던 타쿠미는 아무도 찾지 못할 장소로 예상치 못한 곳을 택한다. 그의 눈앞에서 죽은 아이의 부모가 운영하는 해변가의 펜션이다.
그날 이후 타쿠미는 꾸준히 부부의 집을 찾아와 조문했다. 하지만 그들은 가해자의 가족과 함께 나타난 타쿠미의 모습에서 지워내지 못한 아이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아이를 잃은 아버지는 말한다. 우리 아이는 지켜주지 못했으면서 왜 가해자의 가족은 지켜주느냐고.
이창동 감독의 <밀양>에서 신애는 자신의 아들을 납치해 죽인 박도섭의 딸이 불량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도와주지 않는다. 그녀는 아버지의 죄가 자식에게까지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지만 하느님께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 말하는 박도섭도 그 딸도 용서할 수 없다.
피해자의 가족이 지닌 깊은 상처는 치유되기 힘들다. 그런 그들에게 가해자는 물론 그 가족까지 보호하는 경찰의 모습은 아픔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타쿠미는 사오리를 포기할 수 없다. 자신마저 사오리를 포기하면 아무도 지켜주지 않기 때문이다.
남자친구에 의해 호텔 방에 들어간 사오리는 남자들에게 위해를 당하기 전 타쿠미의 등장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타쿠미는 남자들의 발길질을 온몸으로 막아서고 사오리의 작은 손은 타쿠미의 옷깃을 부여잡는다.
<아무도 지켜주지 않아>는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소녀와 그런 소녀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경찰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의 분노가 낳는 아픔과 고통 그리고 연민의 감정을 말한다.
사회가 지닌 연민은 분노보다 더 큰 힘을 지닌다. 가해자를 향한 분노보다 피해자를 향한 연민이 그들이 지닌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 다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가해자 가족을 향한 시선에는 반감이 느껴질 것이다. 그들 역시 소중한 가족을 잃은 피해자라고 주장하기에는 받아들이기 힘든 점이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보여준 가해자의 가족을 바라보는 시각과 타쿠미와 사오리의 관계에서 느껴지는 진심은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