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냥꾼의 밤>
영화 <사냥꾼의 밤>은 정통 세익스피어 연기로 영국황실로부터 '경 Sir'의 칭호를 받았던 배우 찰스 로튼에게 악몽을 안겨준 작품이다. 기이한 영화의 스타일은 당시 평단과 관객에게 외면을 받았고 이 작품으로 연출 데뷔를 했던 찰스 로튼에게는 마지막 연출작이 되었다. 하지만 이후 이 작품은 그로테스크한 느낌과 몽환적인 분위기가 일품인 명작 컬트영화로 손꼽히고 있다.
이 작품은 한 손에는 'HATE(증오)'를 다른 한 손에는 'LOVE(사랑)'를 쓴 연쇄살인범 해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는 형무소에서 만난 벤이라는 남자로부터 그가 은행을 턴 돈을 집에 맡겨놨음을 알게 된다. 출소한 해리는 벤이 살던 마을에 잠입해 목사 행세를 하며 벤의 아내 윌라와 결혼한다. 그는 벤의 두 자식 존과 펄을 꼬드겨 돈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한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한 여성이 아이들에게 성경말씀을 들려주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밤하늘에 여성의 상반신과 아이들의 머리가 등장하는 이 기묘한 장면은 동화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작품의 두 주인공 해리와 존에 대해 직접 설명한다. 존은 '양의 탈을 쓴 늑대'다. 그는 성직자라는 탈을 쓰고 있지만 그 내면은 살인범이라는 늑대이다. 벤의 아들 존에 대해서는 '나무에 열리는 열매'를 예로 든다. 좋은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맺히지 않듯 나쁜 나무에서는 좋은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 존은 살인을 저지른 은행 강도 벤의 아들이다.
작품은 해리와 존이라는 두 캐릭터를 대조시킨다. 겉으로 드러나는 해리는 성인 남성이고 성직자이다. 마을 사람들은 두 손을 포개며 '인간의 삶에는 사랑과 증오가 있다'고 말하는 해리라는 이방인을 좋은 사람이라 생각한다. 존은 강도의 자식이며 어린 아이이다. 그는 질 나쁜 아버지와 행실이 헤픈 어머니의 피를 물려받았다. 두 사람이 갈등을 빚게 되는 돈에 대한 태도는, 해리는 개인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것며 존은 아버지와의 약속 때문이다.
해리의 개인적인 욕망은 삐뚤어진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느님과 대화를 한다. 찬송을 부를 줄 알며 성경말씀을 할 줄 안다는 점에서 그는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신에 그가 배운 성경은 카인의 증오와 예수의 사랑이 동일 선상에 있다. 두 손을 맞잡은 그는 증오와 사랑의 끝없는 사투를 인간의 삶이라 규정한다. 그리고 증오 역시 하느님이 내린 감정-그 근거로 구약에 담긴 카인의 이야기를 들먹이며-이라며 살인을 정당화한다.
존이 돈을 필사적으로 해리에게서 지켜내려는 이유는 아버지와의 약속도 있지만 그 배경에는 어머니에 대한 불신이 담겨 있다. 그는 배를 관리하는 노인과의 대화에서 여동생 펄의 장래를 걱정하는 말을 한다. 어린 오빠는 어른인 어머니를 신뢰하지 못하며 아버지의 죽음 후 스스로 가장이 되고자 한다. 그리고 그런 욕망은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소년의 순수함과 거리가 먼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는 이 두 캐릭터를 통해 기괴한 느낌을 가중시킨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같은 독일 표현주의 작품처럼 기이한 동작과 빛과 어둠이 극명히 대비되는 조명으로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살리는 화면도 인상적이지만 이 두 인물이 지닌 간극은 영화를 괴이하게 만든다. 해리는 윌라를 죽이는 장면을 통해 잔인한 살인마의 면모를 보이지만 존과 펄을 추격하는 장면에서는 코믹한 모습을 선보인다. 이런 모습은 윌라에게 그녀 내면의 성적인 욕망을 꾸짖던 엄격한 성직자의 모습과는 또 거리가 있다.
존은 동생을 걱정하는 듬직한 오빠이면서 소년 같은 순수함을 간직한 인물이지만 도둑질한 돈을 가지고 도망치는 아이다. 존은 도둑의 아이이며 아버지가 도둑질한 돈을 몰래 숨겨둔다. 가족의 원죄를 품고 지키려 애쓴다. 이런 인물들의 간극은 종교의 간극과 연결된다. 종교에서는 모든 인간을 죄인이라 말하나 동시에 모든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해리의 양손에 새겨진 HATE(증오)와 LOVE(사랑)의 의미는 이런 간극을 상징한다.
해리와 존을 통해 증오를 이야기한 영화는 레이첼을 통해 사랑을 말한다. 그녀는 증오를 일으키는 돈을 밝히지 않는다. 가족이 없는 아이들을 받아들이고 삶의 터전과 먹을거리를 나눠준다. 레이첼 역시 해리처럼 성경을 읽지만 증오가 아닌 사랑만을 강조한다. 이런 레이첼과의 만남은 존을 변화시킨다. 해리가 경찰에 체포되는 순간 존은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돈을 내던지고 해리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오열한다.
돈은 1950년대 자본주의 사회를 다룬 작품들에서 비판적으로 비춰진 소재이자 이 작품에서는 강도짓을 한 아버지가 남긴 원죄에 해당된다. 이런 돈을 버리는 존의 행동은 증오를 버리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를 죽인 원수인 해리를 사랑으로 받아들인다. 이 순간 존은 증오에 가려진 인간의 가치를 발견한다.
<사냥꾼의 밤>은 기괴하고 몽환적인 느낌과 일관성 없는 캐릭터의 행동을 통해 종교가 주는 간극을 담아낸 작품이라고 본다. 다만 1960년대 저항문화의 영향에서 시작된 컬트영화의 기류를 받기 이전에 등장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관객들의 외면을 받은 아쉬운 영화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