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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을 통해 본 빈곤의 문제

배수아의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속 캐릭터를 통한 빈곤의 종류에 관하여


옴니버스 형식의 작품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첫 번째는 인물들이 엮이고 엮여 사건을 만드는 이야기로 이런 형식의 경우 인물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 엄청난 쾌감을 준다. 일본 작품들이 이런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이 많은데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점점 하나로 모여드는 과정을 통해 촘촘하고 정교한 스토리를 보여주고 하나로 연결될 때 매끄러운 느낌을 준다. 두 번째는 주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인물들을 소모하는 방식인데 첫 번째 형태가 인물들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면 두 번째는 이야기를 위해 인물들을 사용한다. 그래서 딱히 정교한 맛도 없고 기대한 대로 스토리가 흘러가지도 않으며 너무 많은 인물들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하고 그들 사이의 정교한 관계가 형성된 것이 아니기에 지루함을 느끼기 쉽다. 아쉽게도 이 작품은 후자에 가깝다.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은 먹고 사는 문제, 즉 빈곤에 대해 지독하게 파고드는 작품이다. 헌데 이 빈곤이라는 것을 작가 배수아는 그저 사회의 보편적인 문제 또는 한국사회가 가진 성장의 역사에 가려진 이면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어느 특정한 시점으로 ‘빈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빈곤이라는 큰 주제 안에 다양한 형태의 ‘빈곤한 인간 군상’을 나열함으로 이 고통스러운 사회 문제에 대해 더 넓고 깊게 생각해보라 말한다.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 마이다. 그는 대학교수다. 사는 집에서 자랐고 적당한 여자와 결혼했다. 어느 날 그는 집에 와 미친 듯이 밥을 먹고 그것도 모자라 아내가 사온 소양 치즈가 들어간 만두까지 먹어치웠다. 그리고 탈이 났다. 마치 너무 많은 부를 무리해 품으려다가 터져버린 듯이. 이후 마는 교통사고가 났고 그는 아내 박혜전과 헤어져 돈경숙이라는 가난한 여자와 결혼한다. 사회의 엘리트층으로 소위 ‘꽃길’만 걸을 줄 알았던 마가 사고 2번에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건 물론 식당 일을 하는 가난한 여자와 결혼하고 그 집에 빈대처럼 살게 된 것이다.


마의 친구 백두연과 음명애 역시 이런 사회 상류층이지만 빈곤을 겪는 존재로 등장한다. 세 사람 다 어느 정도 사는 집안의 자식들이었으며 사회적인 이름을 가진 인물들이다. 마가 사고로 망가졌다면 백두연은 과도한 사업욕심으로 돈을 모두 날려버렸다. 뒤에 가서 그는 전당포를 하는 삼촌에게 돈을 얻어내기 위해 애를 쓰기도 한다. 음명애는 이들과는 좀 다르다. 돈에 대한 빈곤은 없다. 다만 사람에 대한 빈곤이 존재할 뿐이다. 그는 자신을 채울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아니, 애초에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사람이 아닌 훨씬 못한 사람을 만난다. 그녀는 그런 남자들을 만나고 버려오고를 반복한다. 마치 자신이 가진 부(그렇다고 아주 잘 사는 건 아니지만 남자들에게 자신이 경제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를 그들에게 나눠주고 그들의 가난이 결국 그들의 보잘 것 없는 모습과 연결되는 것을 확인한 것에 만족하는 듯 그들을 버린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가진 부와 반대로 마음을 비워두는 것에 홀가분한 느낌을 느끼는 스타일 같다는 느낌을 준다.


표현정-부혜린-세원의 관계는 인간이 가진 관계가 그 사람의 빈곤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여준다. 부혜린은 아주 예쁘다. 미모라는 것은 사회에서 가장 큰 장점 중 하나이며 많은 돈을 챙길 수 있는 무기다. 헌데 표현정은 부혜린을 일부러 살찌운다. 남자들이 예쁜 자신의 딸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는 동화 속 이야기 같은 심리인가? 비슷하다. 표현정은 과거 잘 나가는 패션 쪽 일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별 볼일 없는 세탁소 남자와 결혼한 후 재봉틀로 옷이나 수선하는 사회적인 추락을 맛본다. 이후 표현정은 지독하게 돈을 모으고 아버지가 남겨둔 막대한 빚 때문에 죽겠다고 부혜린에게 뻥을 친다. 그녀는 부혜린을 자신에게서 붙잡아둘 생각을 한다. 남자는 못 배운 존재하는 거, 그리고 자신을 이리 만든 그 남자의 피가 부혜린에게 흐르고 있다는 거. 그래서 빈곤을 이유로 부혜린을 살찌운다. 부혜린은 어머니의 빈곤에 자신도 관련이 있다 여기며 일을 하고 싶어도 막는 어머니 때문에 일을 못한다. 아니, 어머니는 해봤자 식당 일밖에 하지 못하게 부혜린을 만든다. 표현정은 정신적인 빈곤을 부혜린에게 선사한 것이다. 어머니의 압박, 아버지의 빚, 그리고 뚱뚱한 자신이라는 정신적인 빈곤을. 세원은 돈경숙의 아들로 아버지를 따라 새엄마와 지내지만 지독한 폭력에 시달리며 돈경숙에게 돈을 뜯어내 부혜린과 데이트를 하는 존재다. 얼굴은 아빠를 닮아 잘생겼지만 그 ‘잘생김’이 빈곤 속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청년. 그는 부혜린을 좋아하나 그녀를 위해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부혜린이 식당 일이라도 해서 독립했으면 하는 생각을 품고 있다. 한 마디로 생각이 어리다. 몸을 쓰는 일만을 좋아하며 자신의 청춘과 수중의 약간의 돈을 미래를 위해 쓸 생각을 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부혜린이 너무 강력한 어머니의 압박으로 정신적인 빈곤을 겪는다면 세원은 그와 반대로 너무나 자유로운 해방으로 정신적인 빈곤을 겪는다. 어떠한 사회적인 목적도 설정되지 않고 책임져야 될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니 오직 수중의 몇 푼의 돈에만 집착하는 삶을 추앙하게 된 것이다.


전반부에는 꽤나 매력적인 인물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극의 후반부로 향할수록 작가는 주제의식을 강조하다 보니 이 매력적인 인물들과 장소를 버리고 새로운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그리고 캐릭터에 대한 힘은 뒤에 가서 뚝 떨어진다. 성도와 진주는 충분히 매력이 있는 캐릭터이지만 그들의 조합은 상당히 아쉽다. 성도와 진주는 둘 다 빈곤을 짊어지고 태어난 캐릭터들이다. 차이라면 진주는 이제 그런 빈곤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고 성도는 여전히 빈곤의 탈출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이다. 진주는 앞서 인물들이 머물던 아파트가 자신들이 신혼을 보낼 장소로 택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이에 진주의 대학시절 친구인 김요환은 왜 진주가 성도와 결혼을 택하려 하는지 의문을 품는다. 김요환은 대학시절 완벽녀였던 아내 배유은에게 사실상 경제권을 붙잡혀 살고 있다. 그에게는 굳이 빈곤한 남자를 택한 진주가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품의 설명으로 추측해볼 수 있는 건 진주 나름의 빈곤을 탈출하는 방법이다. 어린 시절 빈곤을 경험한 이들이 이를 탈출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이를 경멸하는 거, 두 번째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다. 전자는 다들 많이 봐왔을 것이다. 자신은 가난을 이겨냈다 생각하며 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게으르다, 못났다 매도하는 거 말이다. 후자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우는 아니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없애는 방법인데 예를 들어 과거 뚱뚱했던 사람이 날씬해진 후 뚱뚱한 사람들을 게으르다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뚱뚱할 수도 있지, 뭐’ 하면서 뚱뚱한 사람들과 더 친하게 지내며 자신의 과거 콤플렉스를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스스로가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진주와 배유은에게는 은근한 공통점이 있는데 둘 다 경제적으로 부족한 남자들과 함께 산다는 것이다.


경제력을 잃어버린 남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부정적이기 마련이다. 남성성의 상실을 주로 이야기하는데 이 작품은 그렇지가 않다. 왜냐? 빈곤이라는 것을 보편적인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남성이라고 가난하지 말라는 법이 있나? 부부 중 여성이 더 부유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결국 빈곤이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직위가 더 높고, 많이 배우고, 남성이고 더 오래 살았다는 이유로 빈곤을 피해갈 순 없다. 또 집안이 부자라고, 역사적으로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간다고, 많이 배웠다고 빈곤을 피해갈 수 있는 건 아니다. 마지막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대학교수 백두연과 그의 삼촌 전당포 주인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다. 백두연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고 좋은 교육을 받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으며 대학교수가 되었다. 하지만 무리하게 사업을 벌이다 이혼을 당하고 수중에 땡전 한 푼 남기지 못했다. 삼촌은 전혀 반대의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 호적에도 못 올라간 삼촌은 아버지가 전쟁에 참전했다 사망한 후 외삼촌의 전당포에서 일했고 외삼촌이 죽은 후 그 전당포를 이어받아 미친 듯이 돈을 벌었다. 그는 자신이 꿈꿔왔던 성직자의 삶, 그리고 공부를 할 수 없었다. 기묘하게도 이 둘의 인연은 묘하다. 한쪽은 높은 수준의 교육과 사회적인 이름을 가졌으나 주머니가 빈곤하고 다른 한 쪽은 미래를 전혀 걱정하지 않을 만큼 주머니를 꽉 채웠으나 교육에 대한 열망의 빈곤을 경험했다. 그저 길거리에서 굶어죽을 처지를 벗어난 것만으로, 그나마 돈을 벌어먹고 때리지 않는 외삼촌을 만난 것만으로 전당포 남자는 만족하고 살아야만 할까? 그 모든 빈곤을 무시한 채?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가장 매력적이었던 캐릭터는 노용이다. 난 이 캐릭터가 참 잘 만든 캐릭터라는 생각이 든다. 노용은 일을 하지 않는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음식점에 남는 음식이 있으면 달라고 하고 집 앞에 상자를 두고 음식물 쓰레기가 아닌 차게 굳어버린 밥이나 유통기한이 조금 지난 우유 같은 걸 넣어달라고 한다. 그는 그런 남는 음식을 달라는 자신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의문을 품는다. ‘난 누굴 해하려는 것이 아닌데 왜 나를 적대시하는 거지? 그저 남는 음식 좀 달라는 거뿐인데’ 노용은 자신을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온 성도가 왜 일을 하지 않느냐고 묻자 원하는 게 없다고 말한다. 그는 그저 하루하루 먹고 살고 싶을 뿐인데 왜 일을 해야만 하나. 세상에 버려지는 음식은 너무 많고 그 중 일부만 나를 줘도 내 배를 채우는데. 그거면 족한데 왜 일을 하느냐는 것이 이유다. 그렇다고 그가 빈곤을 심하게 느껴왔느냐? 그건 아니다. 성도는 고등교육을 받았고 한때 음악공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한때 여동생과 같이 친척집을 전전하는 신세였다. 그리고 그때 알게 되었다. 그들은 두 사람을 위해 비싼 음식과 좋은 옷은 해주지만 절대 돈은 주지 않는다는 것을. 돈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누릴 수 있는 무기다. 친척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게 두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수중에서 딱 먹고 사는 정도만, 그러면서 자신들이 욕을 먹지 않고 지낼 정도만을 누리길 원했다.


이 과정에서 노용은 느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다포세대의 심정을. 지금 대한민국 청년들 대부분이 공무원을 준비한다. 그들은 정말 장래희망이, 꼭 하고 싶은 일이 공무원이라서 공무원을 하려는 걸까? 아니, 절대 아닐 것이다. 늘어날 수 있는 일자리에는 한계가 있고 정부차원의 일자리 증진 밖에는 지금 대책이 없다. 결국 원하는 일자리가 아닌 먹고 살기 위한 일자리를 찾기 위한 것인데 이는 빈곤을 벗어나기 위한 대책 밖에 되지는 않는다. 이는 노용이 택한 삶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되면 그만! 이라는 노용과 일자리를 얻고 돈만 벌면 그만! 이라는 다포세대의 차이가 무엇인가? 성도는 그런 미래가 없는 노용에게 분노를 가지지만 난 이 노용이라는 캐릭터가 현대사회의 빈곤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변해왔는가를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준 캐릭터가 아닌가 싶다.


참고로 말하지만 이 작품은 정말 재미는 없다. 앞서 말했지만 이야기가 가지는 재미는 크지 않다. 하지만 빈곤이라는 단어 하나를 가지고 그 의미를 계속해서 확장시키는 작품의 방식은 꽤나 흥미롭다. 넓은 범위를 다루었고 다양한 생각을 담았다. 한 사람이 가진 일방적인 생각이 아닌 다양한 선택지를 던져주며 ‘답은 없어. 네가 생각하는 답에 모두 체크해 봐’ 라고 말하는 기분이다. 빈곤이란 건 어느 특정한 시점과 계층에만 존재하는 문제가 아니다. 더 깊게, 근본적으로 들여다봐야 하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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