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기획자 찰스는 가정과 직장에 충실한 남자다. 그는 몸이 아픈 딸을 위해 착실하게 돈을 모으며 밝은 미래를 그리고 있다. 어느 날, 기차를 놓친 그는 루신다라는 여자의 도움으로 기차에 타게 된다. 비서로 일하고 있다는 아름다운 그녀에게 끌리는 찰스. 성실한 가장이었던 그는 딱 한 번, ‘탈선’을 하게 된다. 루신다와 함께 모텔을 향한 찰스. 그 순간, 문이 열려있었는지 갑자기 강도가 들이닥친다. 강도는 돈을 빼앗고, 찰스를 폭행하며, 루신다는 강간을 당한다. 최악의 상황을 겪게 된 두 사람. 하지만 찰스도 루신다도 자신들의 ‘관계’가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꺼려 신고하지 않는다.
‘잘 지냈나? 나 기억하지?’ 찰스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 그 전화의 주인공은 모텔에서 그를 습격했던 프랑스인 도둑, 라로체다. 돈을 내놓지 않으면 가족에게 그와 루신다의 관계를 폭로하겠다 협박하는 라로체. 이에 찰스는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내놓는다. 그렇게 끝날 줄만 알았던 라로체의 협박. 헌데 이 녀석, 찰스네 집에 찾아온다. 찰스의 동료라면서 말이다. 그리고 거액을 요구하는 라로체. 찰스는 루신다에게 신고하자고 하나 루신다는 자신의 입장이 난처하다며 꺼려한다. 결국 불량스러운 친구의 제안에 그를 통해 라로체를 협박하기로 한 찰스. 헌데 라로체는 그 동료를 죽여 버리고 이 문제로 찰스를 더 협박한다. 이제 찰스는 꼼짝할 수 없는 늪에 갇힌 것이다.
<디레일드>는 한 번의 탈선으로 인생 끝자락에 몰린 남자가 폭주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의 반전은 어찌 생각하면 너무 뻔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전을 이끄는 이야기의 몰입감이 상당하다. 특히 제목에 어울리는 탈선에, 탈선에 탈선을 반복하는 주인공의 행동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몰입감 있는 스릴러를 원하는 분들이라면 만족할 영화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실수는 작품 초반의 자막이다. 대놓고 ‘반전이 있다’고 광고하는 영화들의 경우 관객이 그 반전에 신경을 쓰느라고 작품에 몰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자연스럽게 몰입이 되어 있는 관객의 뒤통수를 한 대 때리는 것이 반전의 매력인데 대놓고 광고를 하니 그 매력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프로포즈는 기습으로 해야지 전날부터 광고하고 하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장르가 멜로영화인데 말이다.
뚱뚱하고 못생긴 스즈키. 그가 남들보다 잘난 거라고는 일찍 장래를 결정했다는(어찌 보면 가장 큰 자랑거리다) 점이다. 예쁜 여자친구라고는 생기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 하지만 4대4 미팅에 펑크가 났고 친구들은 스즈키를 부른다. 어지간히 부를 사람이 없었나 보다 생각하고 미팅에 참석한 스즈키. 그는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마유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하지만! 저런 미인이 나에게 관심을 보일 리가 없지 라고 생각하는 스즈키. 헌데 관심을 보인다.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사이가 된 두 사람.
그리고 마유의 사랑 때문인지 살이 쏙 빠져 훈남이 된 스즈키.(스즈키는 긁지 않은 복권이었던 건가.........) 그는 도쿄로 발령이 나고 마유에게 매주 널 만나기 위해 오겠다고 말한다. 하, 상상을 초월하게 발전된 도시 도쿄. 그는 이곳에서 귀여운 마유와는 다른 세련된 커리어 우먼 미야코를 만난다. 스즈키에게 관심을 보이는 미야코. 스즈키는 미야코와 가까워질수록 마유의 존재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미야코는 스즈키에게 말한다. 지금 네 사랑은 ‘이니시에이션 러브’라고. 첫사랑, 처음 겪는 사랑은 마치 성년의식처럼 그 사람이 성숙해졌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성년의식이 하나의 단계인 거처럼 이니시에이션 러브 역시 하나의 단계일 뿐이다. 이 사랑은 사랑을 알려준 것일 뿐. 미야코는 스즈키를 또 다른 사랑의 세계로 유혹한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발칙함’일 것이다. 이는 반전이 주는 매력과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반전은 플러스 요인이다. 이 반전으로 큰 재미를 얻었긴 했지만 그렇다고 초중반부의 로맨스가 재미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헌데 반전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초중반이 주는 매력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반전이란 이야기에 샤르르 녹아내려야 그 맛이 있는 법이다. 최근 한국 스릴러 영화들에 대해 ‘반전강박증’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그들이 선보이는 반전이 이야기에 따른 자연스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즉, ‘반전을 위한 반전’이 아닌 ‘이야기를 위한 반전’이 진정한 반전이라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그을린 사랑>의 반전이 가지는 의미는 특별하다. 영화가 가지는 주제의식을 살리기 위해 반전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잔느와 시몬 남매는 어머니의 유언을 받는다. 그 내용은 죽은 줄만 알았던 자신들의 생부와 존재조차 몰랐던 형제에게 그녀가 남긴 편지를 전달해주라는 것이다. 유언의 내용을 따르기 전에는 장례조차 치르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어머니. 유언의 내용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시몬과 달리 잔느는 진실을 찾기 위해 어머니가 캐나다에 오기 전 살았던 중동을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한다.
<그을린 사랑>의 매력은 ‘반전(反轉)’에 있지 않다. 오히려 ‘반전(反戰)’에 있다. 이 영화는 일부러 배경이 되는 ‘중동’을 특정한 나라로 규정짓지 않았다. 이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더 확장시키기 위해서다. 역사적 사실의 ‘규명’이 아닌 모든 인류가 같이 소통해야할 문제, 바로 ‘휴머니즘’이다. 잔느와 시몬의 어머니인 나왈에게 닥친 비극은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이 계속 편을 나누고 싸우게 만드는 그 모든 악의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영화는 반전을 통해, 아니, 그 반전보다 위대한 어머니, 나왈의 마음을 통해 우리의 마음 속 반전(反戰)을 이야기하고 있다. 소개하는 작품 중 가장 템포는 느리지만 그 어떤 작품보다 깊게 빠지고 깊게 마음에 남을 영화다.
중국영화의 가장 큰 단점이라면 허술한 각본과 지나치게 템포가 빠르다 보니 작품의 템포도 잊게 만드는 편집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왕정 같이 저퀄리티의 영화를 일 년에 4~5편씩 만들어내는 다작 감독을 보면 ‘과연 저들이 상업영화를 만듦에 있어 완성도를 생각할까?’라는 의문이 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작품, <대 최면술사>는 최근 중국의 상업영화의 모습과 결을 달리한다. 정말 끈질지게 두뇌 싸움을 시키기 때문이다.
최면술을 바탕으로 한 영화들이 가지는 복잡함을 <대 최면술사>는 흥미롭게 풀어낸다. 최고의 최면술사 쑤. 그는 최면을 통해 그 사람의 트라우마를 치료한다. 그런 그에게 렌이라는 환자가 찾아온다. 처음부터 수상하게 보였던 렌. 알고 보니 렌은 함정을 파고 쑤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꿈을 파헤치는 최면술사인 쑤는 또 다른 최면술사인 렌의 최면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그녀의 꿈을 파헤치기 위한 ‘대결’을 펼친다.
이 대결은 단순히 흥미를 위주로 하는 대결이 아니다. 굉장히 촘촘하고 강하게 연결된 각본에 의해 짜여진 대결이다. 그러다 보니 중간 중간 보여주는 꿈과 환상의 내용에 신경을 써야만 한다. 저 내용이 무슨 의미일까? 대체 무엇이기에 저런 꿈을 꾸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머리를 많이 굴리는 작품은 피곤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높은 몰입감으로 알아서 머리를 굴리게 만들어준다. 이는 기존 중국영화가 가졌던 허술한 각본, 흐름 끊기는 편집, 건성이 돋보이는 미술과 음악을 모두 뛰어넘는 완성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여기에 스릴러와 공포, 드라마와 멜로를 넘나드는 감정의 흐름은 반전이 예측 가능하더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매력을 만들어준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이라는 말이 딱히 틀린 말이 아님은 조르주를 통해 알 수 있다. 당시 히치콕과 서스펜스 장르의 최강자를 두고 겨뤘던 이 감독을 기억하는 이들은 정말 소수이니 말이다. 히치콕과 달리 우울한 느와르 분위기의 작품을 만들었던 조르주는 당시 프랑스 주류 영화계 밖에 있었던 인물이다. 그의 영화 <디아볼릭>은 히치콕이 판권을 사기를 원했던 원작소설을 한 발 먼저 사들여 영화화한 작품이다.
미셸은 아내 크리스티나의 돈으로 기숙학교를 차려 교장노릇을 하는 남자다. 그는 아내 돈으로 교장이 되었음에도 아내에게 폭력과 폭언을 일삼고 심지어 대놓고 니콜이라는 학교 선생과 바람을 핀다. 수녀였던 크리스티나는 허약한 몸과 소심한 마음 때문에 미셸에게 대놓고 반항하지 못하고 마음의 병만 키우고 있다. 오히려 크리스티나가 죽기를 바라는 미셸. 그런 그녀에게 니콜이 찾아온다. 미셸을 죽이고 자신들이 재산을 나눠가지자고 제안하는 그녀. 크리스티나는 이러니저러니 자신이 죽으면 좋아할 미셸이 생각나 그를 죽이고 재산을 되찾기로 결정한다.
독이 든 와인을 마시게 한 뒤 욕조에 미셸을 익사시킨 두 여자. 그녀들은 한밤중에 학교 수영장에 그를 던지고 다음 날 시체가 떠오르기를 기다린다. 헌데 다음 날 떠오르지 않는 시체. 미셸의 옷이 세탁소에서 배달된 것은 물론 그가 살아있다는 흔적들이 발견되자 크리스티나는 불안에 휩싸인다. 그러던 중 한 탐정이 크리스티나를 찾아오는데..........
<디아볼릭>은 히치콕 못지않게 클루조 역시 서스펜스 장르에서 관객들의 긴장감을 쥐고 흔들 수 있는 능력을 잘 보여주는 영화다. 무려 60년 전의 흑백영화라는 점에서 거부감이 들 수도 있지만 히치콕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클루조 영화 역시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크리스티나라는 한 병약한 여자를 서서히 조여 오는 심리적인 압박이 꽤나 일품이다.
최고의 이야기꾼은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평범한 이야기를 매력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면 평범하거나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기도 이런 사람이 말하면 매력적이고 흥미롭게 들린다. 두 번째는 정말 독특하고 예측 불가능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다. 허무맹랑하거나 자기만의 법칙에 갇힌 복잡한 이야기가 아닌 잘 짜여진 이야기를 말이다.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경우에는 후자에 속한다는 생각이 든다.
<베스트 오퍼>는 평생 예술품을 감정한 감정사 올드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아니, 미술 감정사의 이야기로 할 게 뭐가 있어? 있다. 영화 상영사와 영화감독의 이야기로 세계에서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든 토르나토레 감독의 힘을 믿어보라. 이 올드만이 믿는 건 오직 자기 자신의 눈뿐이다. 왜냐고? 진품과 모조품을 평생 구분해 왔으니까. 그런 그에게 한 여자가 자신의 집의 미술품들의 감정을 부탁한다. 은둔형 외톨이인 그녀는 벽에 숨어 올드만을 바라본다. 그녀의 존재에 관심을 느끼는 올드만. 그리고 그는 한 평생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진정한 사랑’을 그녀에게서 느낀다. 그렇다. 그녀는 그가 피할 수 없었던 최고의 제안이자, 그가 ‘베스트 오퍼’를 넣을 수밖에 없었던 존재다.
독특한 이야기의 구조만큼 반전이 주는 충격은 상당하다. 이 반전 하나로 작품이 주는 감성이 아예 변하기 때문이다. 토르나토레 감독은 은근 충격적인 결말을 택하지만 그 충격이 소위 말하는 일본의 ‘멘붕물’과는 결을 달리한다. 일본의 멘붕물이 노골적으로 정신을 나락으로 빠뜨리는 자극을 택하는 반면에 토르나토레 영화의 충격은 그 충격에 대해 곱씹고 왜 인물들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거장의 작품들이 ‘빛나는’ 가장 큰 이유, 이 영화가 명작인 이유는 ‘반전’이 아닌 이런 인간이라는 존재의 선택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히로스에 료코는 한때 일본은 물론 아시아의 아이콘이었다. 빠른 결혼과 스캔들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아마 더 오래 왕좌를 지켰을지도 모른다. 료코의 열풍이 짧았기에 그녀가 출연했던 작품들이 오늘날까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비밀>은 개봉 당시 독특한 소재와 히로스에 료코 때문에 국내에도 잘 알려졌던 작품이다.
헤이스케는 아내 나오코, 딸 모나미와 행복한 가정을 꾸려 살고 있다. 어느 날, 여행을 떠났던 나오코와 모나미가 사고를 당해 응급실에 입원하고 나오코가 죽고 만다. 이때 나오코의 영혼이 모나미를 향하고 일어난 모나미는 나오코가 되어버린다. 한 마디로 몸은 딸인데 영혼은 엄마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 큰 혼란을 느끼는 헤이스케. 사랑하는 아내가 다시 살아났다는 점에서 기쁘지만 하필 그 몸이 딸이라는 점에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혼란을 겪게 된 것이다.
아마 도덕적인 관점에서 영화의 분위기와는 달리 그리 유쾌한 영화는 아닐 것이다. 헤이스케의 시점도, 나오코의 시점도 모두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영화가 주고자 하는 감성-반전을 포함한 그 감성-은 호불호가 굉장히 극명하게 갈린다. 누군가에게는 감성적으로 다가오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나치게 비도덕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작품이다.
때론 여자친구에게 길게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짧게 한 마디 던지는 게 더 큰 감동을 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카톡으로 20줄 가까이 내가 널 사랑하는 이유를 적는 것보다 ‘너와 함께한 모든 시간들이 눈부셨다’ 한 마디가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쌍둥이들>은 단편이 가진 매력을 잘 살린 작품이다. 무엇보다 마지막 반전이 참으로 깊은 슬픔과 사랑의 의미, 여주인공의 심정을 동시에 담아내는 놀라움을 보여준다.
봉남은 여자친구 나영에게 이별통보를 받고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나영의 집을 향한다. 하지만 그녀의 집에서 만난 건 나영의 쌍둥이 언니. 봉남은 쌍둥이 언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의 지난 사랑을 다시 되짚어 본다. 이 과정에서 나영이라는 캐릭터는 단연 돋보인다. 잘 드러나지 않는 그녀의 감정의 흐름이 영화에 깊게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 마지막 반전 덕분이다. 이 반전 한방으로 우리는 영화의 흐름을 다시 보게 된다. 왜 이런 흐름을 가져왔는지, 왜 그런 말과 행동을 하였는지, 영화가 던진 반전의 의미는 무엇인지.
안젤리크는 미술학도다. 그녀는 루이라는 의사와 불륜관계다. 어느 날, 루이는 안젤리크에게 함께 떠나자 하고 안젤리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루이를 따라가기로 한다. 그런데 안젤리크를 배신하고 나타나지 않은 루이. 그 사이에 안젤리크는 자신의 꿈도, 직장도, 그리고 그를 사랑한다는 데이빗도 모두 잃고 만다. 천하의 쌍놈 루이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아름다운 안젤리크. 그녀는 쓸쓸하게 밤거리를 걸어간다.
이 영화의 재미는 여기서 온다. 앞서 보여주었던 안젤리크의 시점을 루이의 시점으로 바꾸면서 영화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된다. <하얀 면사포>, <살인 혐의>처럼 진한 사랑의 감성을 보여줄 것으로 예상되었던 영화는 완벽하게 관객을 배신한다! 그것도 유쾌하게, 상큼하게, 그리고 잔혹하게. 말 그대로 발칙해도 너무 발칙하다. <러브 미 이프 유 데어>의 결말은 이 영화와 비교할 것도 아니다. 이처럼 무서우면서 관객들을 충격과 공포로 안내하는 영화가 또 있을까?
<히 러브스 미>는 한 방의 반전을 통해 전세를 역전시키거나 작품의 어긋난 부분, 또는 주제의식을 강조하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 자체가 하나의 ‘반전’이 되어 남자주인공 루이를 신랄하게 괴롭히는 영화다. 너무 상큼하고 귀여워서 사랑스러운 오드리 토투의 반전매력과 루이 역의 사무엘 르 비앙의 멘붕에 빠진 표정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10.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무거운 성찰 <죽음과 매장>
개인적으로 공포, 호러 장르는 액션처럼 시대의 흐름을 많이 타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당시에는 충격적이고 무서웠던 것이 조잡하고 싱겁게 보인다. 거기에 한 소재가 히트를 치면 아류작이 무수하게 등장하기 때문에 ‘원조’가 가진 맛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헌데 <죽음과 매장>은 이 공식에서 약간은 벗어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봐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한 사진작가가 해변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그의 눈앞에 나타난 한 매력적인 여인. 여인은 관능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유혹하더니 천천히 속살을 드러낸다. 그 모습에 침을 꼴깍 삼키며 사진을 촬영하던 사진작가에게 몰려드는 사람들. 그들은 잔혹하게 사진작가를 폭행하더니 이내 화형식을 진행한다. 도시에서 떨어진 시골마을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살인들. 이런 소재는 싱겁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은 분위기에서부터 압도적이다. 마치 세기말처럼 의문의 마을사람들에 의해 폭행을 당하고 죽고 마는 관광객들.
더 무서운 건 마을의 분위기다. 흑마술을 가르치는 여교사, 완전 박살난 시체를 원상복구 하는 장의사까지. 대체 이 마을의 비밀은 무엇이며 살인을 반복하는 이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으로 등장하는 반전은 충격 그 자체다. 왜냐하면 이 반전이라는 것이 정체성이라는 굉장히 철학적인 질문과 이어지기 때문이다. 호러영화에서 정체성이라니. 그것도 풍자가 아닌 공포를 다룬 정통호러에서 이토록 깊은 질문을, 그것도 반전을 통해서 던지다니. 개인적으로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브루드>,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저승에서 온 딸>과 함께 재평가를 받을 작품이 이 영화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