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감성 스릴러 영화, 첫 번째
얼마 전 뉴스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인맥거지. 최근 인간관계의 트렌드가 사람을 사귀는 것이 아니라 정리하는 단계로(혹은 아예 관계를 맺지 않는 것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혼자 할 수 있는 놀이문화가 많이 생겨서, 일이라는 것이 공동체 사이에서 하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몫을 하면 되는 방식으로 바뀌어서 등등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이유가 인간관계에서 오는 ‘상처’이다. 굳이 내가 그 사람과 어울렸다가 시간은 시간대로 쓰고, 돈도 돈대로 쓰고 상처받기 싫다는 것이다. 분노라는 감정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 심하게 상처를 받았을 때, 그 대상이 내 호의와 감정을 배신했을 때, 사람은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그 ‘분노’의 감정이 두려워 관계를 멀리하면 ‘사랑’ 역시 찾을 수 없다.
영화 <분노>는 꽤나 큰 인내심을 가져야만 하는 작품이다. 원작 소설 자체가 강렬한 스릴감보다는 드라마적인 관계에서 오는 스릴감을 보여주기 때문에 편집지점이 적절하게 나오기 힘들다. 즉, 인물의 감정을 통해 장면을 나누자니 이 감정을 보여줄 장면이 없고, 또 장면에 따라 나누자니 강렬함이 드러나는 장면이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감정이 올라오기 전까지 시작부가 복잡하고 지저분하다. 4개의 이야기(치바, 도쿄, 오키나와, 형사들)를 동시에 보여주려다 보니 좀 익숙해진다 싶으면 끊어지고 또 끊어진다. 하지만 중반부, 세 사람을 의심할 만한 단서들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힘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 힘에는 세 사람이 맺고 있는 ‘관계’가 큰 역할을 한다.
치바 이야기를 먼저 보자. 뱃사람 요헤이는 3개월 전 가출한 딸 아이코를 집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그 딸 아이코는 2개월 전 갑자기 나타나 요헤이네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타시로에게 관심을 보인다. 자연스럽게 연인관계가 되어가는 타시로와 아이코. 헌데 이 두 캐릭터에게는 쉽게 놓칠 수 있는 중요한 점 두 가지가 있다. 타시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그가 말을 늘어놓는 대상은 아이코 뿐이다. 아이코는 타시로에게 유일한 소통의 통로가 되어주는 여인이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 요헤이는 딸이 지능적으로 모자라다는 점 때문에 ‘불행하다’고 여긴다. 이들 관계의 아픔은 여기서 온다. 요헤이가 만든 프레임 때문에. 딸이 지능적으로 모자라기에 유흥업소에 갇혀 일을 했다는 생각, 딸이 불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녀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 그리고 그 불행 때문에 사랑 역시 정상적인 사람하고는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 말이다.
도쿄 이야기는 약간 충격적일 수도 있다. 게이 육식남들이 출연하기 때문이다. 유마는 게이 클럽파티에 참석하고 게이 친구들과 어울리는 적극적인 육식남이다. 그는 신주쿠의 한 게이 사우나에서 만난 나오토를 강간한다. 그들의 첫 정사는 너무 자극적이었으나 이후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지 않는, 말수가 적은 나오토. 하지만 유마는 그런 나오토에게 끌리고 나오토도 유마가 싫지 않다. 갈 곳 없는 나오토는 유마네 집에서 동거를 하고 두 사람의 사이는 연인처럼 가까워진다. 병이 들어 죽음의 순간에 가까워진 유마 어머니의 병간호까지 책임져주는 나오토. 마치 가족 같은 그이지만 유마는 그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첫 번째는 겉으로는 육식남인 유마이지만 사실은 자신이 이룩한 사회적 직위가 ‘게이’라는 이유로 무너질 수 있기에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기 때문이다.(그래서 유마는 어머니의 장례식에 나오토를 오지 말라고 한다.) 두 번째는 나오토에게 동질감을 느꼈던 숨겨진 과거가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의 친구들의 집이 털리면서 유마는 나오토를 의심한다. 그리고 그가 정체를 숨기는 이유가 살인사건의 범인이기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오키나와 이야기는 가장 어린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고등학생 이즈미와 타츠야. 이즈미는 오키나와로 이사를 왔고, 타츠야는 원래 이 지역 토박이다. 배를 타고 이즈미에게 무인도를 구경시켜주는 타츠야. 이즈미는 그 아름다운 무인도에서 배낭족 타나카를 만난다. 활발한 성격에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있어 무엇이든 능숙한 타나카는 이즈미와 빠르게 친해진다. 아름다운 오키나와의 섬처럼 아름다울 것만 같았던 이야기는 이즈미의 강간사건을 계기로 급속도로 우울해진다. 이즈미는 술에 취해 사라진 타츠야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던 중 미군에게 강간을 당했고 어린 타츠야는 온몸을 떨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어머니를 헤픈 여자라고 생각하기에 강간당한 자신의 모습을 알리기 싫은 이즈미. 타츠야는 고통을 간직한 이즈미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자신이 한스럽게 느껴진다. 그런 그에게 기둥처럼 다가오는 존재가 타나카다. 알고 보니 그날 현장에 있었던 타나카. 타나카는 경찰을 부르고 택시로 그들의 뒤를 쫓았었다. 하지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는 이즈미의 말에 무력한 자신이 한스럽다 말하는 타나카. ‘난 널 믿어’라는 타나카의 한 마디가 타츠야에게 힘이 되어주었고 타츠야는 타나카와 함께 이즈미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고민한다.
타시로, 나오토, 타나카. 이 세 사람은 관객들에 의해 의심을 받는다. 과연 세 사람 중 진짜 ‘범인’은 누구일까?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의미는 범인 찾기가 아니다. 그들이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세 사람 중 범인이 있다면 이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아이코, 유마, 타츠야는 큰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마음 속 상처를 가진 세 사람에게 범인으로 의심받는 세 사람은 기둥처럼 다가왔고 빠르게 삶의 한 구석에 자리 잡았다. 만약 이 기둥이 뽑힌다면 그들은 무너질 것이다. 다시 일어서기 힘들 정도로. 하지만 영화는 ‘무너진 관계로 일어서기 힘들다고 관계를 맺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마지막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기에 절규하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았기에 절규하는 두 장면. 이 장면의 대비는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가 관계를 맺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준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범인의 심리와도 관련되어 있다. 마지막 정체를 드러내는 범인은 어쩌면 지나치게 허무할 정도로 최후를 맞이한다. 하지만 이 최후에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바로 범인이 ‘그 사람’을 굉장히 믿었다는 점이다. 아니, 잔혹하게 사람을 죽인 범인이 사람을 믿다니. 형사들은 범인과 함께 일했다는 남자를 만나 그에 대해 듣는다. 범인은 잔인한 성격. 사람이 약함을 보이면 그 약함을 이용해서 자신의 발아래에 두려는 극악무도한 녀석. 하지만 범인이 그날 사람을 죽이기 전 당했던 일, 그리고 그가 살아온 길을 보자면 왜 그런 최후를 맞이하였는지,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도 큰 논란이 되었던 파견직은 일본에서도 문제가 되는 부분이다. 이 파견근무에 의해 공사판으로 일을 나갔던 범인은 ‘거긴 지난주 작업장이었는데?’라는 담당자의 전화에 ‘분노’한다. 당연히 담당자가 사과를 하거나 다른 일터로 보내는 일은 없다. 무더운 여름, 하루 종일 일터를 향해 걸었던 범인은 분노한다. 얼굴도 알 수 없는 그 대상의 목소리에 분노한 것이다. 하지만 이 분노를 풀 수 없다. 자신의 위에 군주처럼 군림한 파견 회사에게 직접 풀어낼 수 없는 응어리를, 그는 친절하게 차를 건넨 자신이 앉아서 쉬고 있던 집의 주인에게 풀어버린다. 인간에게는 나쁜 습성이 있다. 더 약한 사람에게 분노를 푸는 것. 자신의 마음에 품은 분노를 더 약한 사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하는 습성이. 헌데 범인은 마지막 순간 그러지 않는다. 내면에 쌓인 분노를 자신을 믿어준 ‘누군가’에게 풀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사랑이다. 범인은 그 대상이 준 사랑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의 정체가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더라도, 자신이 한 행동에 그 사람을 아프게 하더라도, 자신에게 믿음을 준 그 사람을 사랑하기에 ‘살인’을 저질렀던 그때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이 부분은 영화와 책이 가진 차이점이다. 이상일 감독은 책이 가진 모호한 지점(개인적으로 원작의 경우 사랑과 분노가 가지는 지점이 좀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을 해소하기 위해 이런 마무리를 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인간(人間)은 사람을 뜻하는 인(人)자에 사이라는 간(間)자를 쓰고 있다. 단어 자체에 ‘사람과 사람 사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이 인간이란 존재가 살아가야 하는 길이다. 관계는 분노를 가져온다. 나에게 해를 끼치고, 욕을 하며, 큰 실망감과 상실감을 가져온다. 하지만 사랑도 관계에서부터 온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싶다면, 또 주고 싶다면 다가가야만 한다. 분노가 있기에 사랑이라는 감정도 존재한다. 분노가 없다면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 또 아름다운지 알 수 없다. 상처받는 게 두려워, 누군가에게 분노의 감정을 품을 것이 두려워 관계를 피한다면 사랑 역시 멀어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