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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 경찰과 기자, 그리고 아버지

일본 감성 스릴러 영화, 두 번째

나쁜 말일수도 있다. 좀 독하게 말하자면 일본에는 ‘잡탕 감독’들이 꽤나 존재한다. 이들에게는 일정한 스타일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스릴러를 만들다가도 멜로를 만들고, 유치한 만화 원작의 작품을 만들다가도 진중한 소설을 다룬 드라마를 만들기도 한다. 또 어떨 때는 에로를 만든다. 이런 감독들의 특징은 작품마다 편차가 엄청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험이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최근 소설의 경향은 한 작품에 한 가지 장르만 담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폭넓은 이야기를 하고, 복잡한 감정을 담아낸다. 특히 일본산 범죄 스릴러물이 그렇다. 일본의 범죄 스릴러 소설을 읽다보면 참 감성적인 작품들이 많다. 철저하게 계산된 트릭과 기가 막힌 동기보다는 사람 사는 이야기 속, 그들의 감정에 주목하는 작품들이 인기를 끈다. 이 작품, <64>는 요코야마 히데오의 명작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답게 스토리가 주는 완성도가 높다. 여기에 에로로 시작해 정통멜로, 잔잔한 드라마까지 감독한 제제 타카히사 감독의 내공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64>에서 가장 인상적인 존재들을 뽑으라면 단연 기자들일 것이다. 한국 드라마 <피노키오>에서 보았던, 소식 하나 따내기 위해 형사들 주변을 알짱거리며 애원하는 기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키카와를 중심으로 한 기자 클럽은 형사들을 다그치며 정보를 캐내기에 몰두한다. 그들은 홍보부의 미카미와 피해자 실명문제로 다투고 이 문제로 서장실까지 찾아간다. 청장실을 찾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당당하기 짝이 없다. 이런 ‘과격한’ 기자들의 모습은 꽤나 신선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봐왔던 과격한 기자들이라고는 연예인들에게 욕이나 해대는 연예부 기자들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기자들의 존재가 <64>란 작품이 긴장감을 가지게 만드는 가장 큰 힘이다. 미카미라는 주인공을 압박하는 사건의 힘 자체는 약한 반면 그의 직책이 가지는 역할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강한 자극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왜 실명을 원하는 걸까? 그들은 왜 경찰을 향해 소리치고 다그치며 더 자세한 정보를 내놓으라고 압박하는 걸까? 그 비밀은 승진에 있다. 우리나라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얌전한 양처럼 대통령의 말만 받아 적는 이유는 청와대 기자로 몇 년 생활하면 자연스럽게 승진하기 때문이다. 경찰서의 기자 클럽 기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지방을 벗어나 수도권으로 가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종’을 잡아야 한다. 그리고 일본에서 그 특종이란 실명이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잘 알 것이다. 그들은 가해자의 가족에게까지 책임을 물으며 피해자의 인권이나 숨겨질 권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작품은 이런 기자들을 통해 미카미의 모습을 영리하게 드러낸다. 미카미가 받았던 상처, 1989년, 유괴된 여아가 시체로 발견되고 결국 범인을 놓친 그 사건을 ‘실명’문제를 통해 풀어낸다. 미카미는 기자들 앞에서 교통사고 피해자의 실명을 말한다. 그리고 그의 생을 이야기한다. ‘뭐야, 우리는 그딴 거 흥미없다고’ 말하며 자리를 피하려는 기자들을 붙잡아둔 채 쭉 그의 생애를 읽어나가는 미카미. 그리고 말한다. 이 내용을 모두 적어달라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달라고 말이다. 89년, 천왕이 죽으면서 당시 납치 사건으로 죽은 여자아이에 대한 소식은 그저 기사 한 줄로 대체되었다. 그 아이가 어떤 아이였는지, 그 아이의 남겨진 부모가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 어머니는 병들어 죽고 아버지는 아직도 그 고통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그저 ‘64’라는 이름의 사건으로만 남겨졌을 뿐이다. 그래서 미카미는 원한다. 사람들이 알기를. 그 ‘사람’ 자체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과격한 기자 집단의 대표인 아키카와는 실명 보도를 얻어내고 만족했을까? 미카미는 다시 사건이 발생하고 경찰에서 수사를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하기로 결정하자 모든 정보를 공개하기로 한 기자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실명을 알아내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아키카와는 직접 발로 뛴다. 그는 이 지방을 떠나기를 원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흥미를 가질 자극적인 내용, 즉, ‘특종’이라 여겨지는 ‘실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범인이라는 것을 안 소녀를 보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영화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이리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남겨진다는 건, 괴로운 진실을 안은 채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까? 피해자의 남겨진 사람들 못지않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자라는 커다란 사슬에 매달려 살아가야 되는 이들의 슬픔 역시 크지 않을까? 그런 슬픔과 고통을 먹고 살아가는 것이 과연 옳은 행동일까? 실명보도라는 건 고통에 또 다른 상처를 입히는 것이 아닐까? 이 작품에서의 ‘기자’란 소재는 노골적인 일본의 보도 행태를 꼬집음과 동시에 그들이 가져야할 직업정신이 어떤 방향을 향해야 하는지 말하고 있다.

외국인들이 일본을 바라볼 때 좋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명예다. 이는 그들의 문화 중 하나인 사무라이에 영향을 받은 점이 크다. 그래서 일본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보면 명예, 자존심, 의지 같은 좀 오글(?)거리는 단어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 기자들과 대립되는 위치에 서는 경찰들은 자신들의 ‘명예’를 위해 사건을 다시 수사하기로 결정한다. 청장이 이 지방의 경찰서를 방문할 예정이 잡혔고, 서장은 뭔가를 보여주고 도쿄로 가기 위해 사건의 재수사를 결정한 것이다. 헌데 서장은 자신의 명예를 걸고 64 사건의 범인을 잡겠다는 태도가 아닌 명예를 높이기 위해 이 사건을 이용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작품 속 경찰조직은 마치 한국 드라마 속 경찰과 너무나 흡사하다. 차이라면 돈이 아닌 명예, 그것도 개인의 신념이 아닌 조직을 위한 명예를 위해 일을 한다는 것이다.

1989년, 피해자의 집에서 범인의 전화를 기다리던 팀은 기계가 고장 나면서 범인의 목소리를 녹음하지 못한다. 범인의 목소리를 들은 건 피해자의 아버지 뿐. 만약 그때 범인의 ‘진짜’ 목소리가 녹음이 되었다면 범인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헌데 경찰서는 이 사실을 숨긴다. 경찰의 ‘명예’를 위해 사건을 은폐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실수를 빌미로 언론의 먹잇감이 되지 않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이때 녹음을 하지 못했던 수사관은 죄책감에 시달린 채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히키코모리와 같은 신세가 되었고 또 다른 수사관은 경찰을 그만둔 채 마트에서 교통관리 일을 한다. 경찰은 비열하게도 이 마트에서 일하는 전직 경찰이 입을 열까봐 그를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 개인의 희생이 이뤄져야만 명예를 지킬 수 있는 조직이라면 그 조직은 잘못된 조직이다. 경찰이라는 조직이 ‘절대’ 썩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들의 업무가 국민들의 안전과 직접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경찰이 비열해지면 국민이 고통 받고, 경찰이 국민이 아닌 집단을 위해 일을 하면 가치는 오직 자신들만을 향한다. 서장은 한 아이의 죽음을 파헤치기 위함이 아닌 자신의 승진을 위해 조직을 이용했고, 조직은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양심을 지키려고 했던 두 경찰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그 행위들을 ‘명예’라는 이름으로 포장했다. 이런 경찰의 행위는 오직 개인의 신념으로 움직이는 미카미와 대조된다. 누군가에게는 마음의 짐으로 평생 남은 고통을 누군가는 너무 편하게 조직의 명예를 위해서라며 부정한다. 

앞서 이야기했듯 1989년 유괴사건은 천황의 죽음으로 묻혀버렸다. 당시 범인은 백화점에서 가장 큰 여행 가방을 사서 돈을 담아오라고 했고 장소를 빙빙 돌린 후 가방을 강에 던지라고 말했다. 그리고 가방만 남긴 채 사라져 버린 돈 그리고 폐차장의 차 트렁크에서 시체로 발견된 여자 아이. 14년의 시간이 지나도록 이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당시 범인의 진짜 ‘목소리’를 녹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런 증거도 증인도 없는 사건은 자연스럽게 수사종결이 되었다. 공소시효를 1년 남기고 청장은 재수사를 지시했지만 그 이전에, 아버지는 이미 ‘재수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매일 공중전화부스의 전화번호부에서 한 명, 한 명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그 사람의 목소리가 ‘범인’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홀로 그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미카미의 집에도 전화를 하게 된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미카미의 목소리는 애타게 한 사람을 찾고 있다. 바로 그녀의 딸이다. 미카미의 딸은 히키코모리다. 그는 자신의 승진에 있어 딸의 존재가 걸림돌이 될 거라 판단, 딸을 친척집으로 보내버리려고 한다. 그에게 소중한 건 자신의 미래, 그리고 명예였다. 마치 그가 속한 경찰 조직처럼. 하지만 그는 자신의 찬란한 미래가 가족의 행복이 될 거라 여겼다. 착각이었다. 아빠에게 실망한 딸은 집을 나가버린다. 미카미는 적극적으로 딸을 찾아다니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에서 이 문제가 크게 번지지 않기를 바라며 딸이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겠지 생각한다. 하지만 그도 아버지는 아버지다. 사실은 딸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무 대답 없는 수화기에 대고 소리친다. 내가 다 잘못했다고. 그러니 돌아와 달라고.

그 말을 들은 피해자의 아버지의 머릿속에는 얼마나 많은 생각이 들었을까? 미카미가 그에게 청장을 만나달라고 애원했을 때,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미카미와 했던 그 대화를. 그 역시 딸을 ‘잃은’ 아버지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아픔은 누구에게나 같다. 잃는다는 건 전쟁의 숫자놀음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 사람과 만든 추억이 있고 기쁨이 있으며 사랑이 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며 최선을 다하는 과정이다. 피해자의 아버지는 범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딸을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슬픔인지.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그 고통이 얼마나 뼈저리게 다가오는지 말이다. 그날, 두 사람, 그러니까 세 사람(범인과 피해자의 아버지, 피해자의 아버지와 미카미)이 수화기 너머 나눴던 대화는 소중한 사람을 잃은 슬픔이 담긴 대화들이었다. 누군가는 오열로, 누군가는 설득으로, 또 누군가는 침묵으로 그 대화를 써나갔던 것이다.

<64>는 원작이 가진 높은 완성도 덕분에 이야기적인 측면에서는 큰 재미를 준다. 하지만 방대한 원작의 너무 많은 부분들을 담아내려고 했던 시도 때문에 지나친 감정의 분출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포인트를 순간순간 자주 주다보니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너무 긴장되어 있고, 이는 인물들 하나하나가 어깨에 힘을 확 주게 만들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쉴 틈을 주지 않는다. 한 마디로 지치게 만든다. 또 많은 인물들을 하나하나 다 챙기려다 보니 어떤 인물은 이 인물이 가진 모습만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끝을 맺는다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1, 2부로 나눌 정도로 정성을 들여 최대한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다 담아냈다는 점, 감정에 있어 과잉은 있지만 부족하지 않게 이끌어 갔다는 점, 무엇보다 기자와 경찰, 그리고 아버지라는 세 가지 시점을 모두 균형 있게 담아냈다는 점에서 칭찬해주고 싶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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