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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잘못된 집단주의 그리고 대한민국

영화, 그리고 세상 - 7. <유레카> <악의교전> 外

  
영화 <유레카>를 보면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 모든 일의 원인으로 등장한다. 버스 납치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살해를 당한다. 살아남은 건 운전기사와 나이가 어린 두 남매 뿐. 무사히 목숨을 건진 이 사람들에게 가해진 건 세상의 비난과 멸시였다. 그리고 마을에서 발행한 살인사건의 범인으로는 당시 사건의 ‘피해자’였던 버스 기사가 지목된다. 피를 보면서 그 피에 중독된 것이 이유일 것이라는 것이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집단’을 중시하며 그 집단에서 어긋난 사람들에게는 가차 없이 돌을 던진다. 헌데 그 돌을 던지는 이유가 우리가 생각하는 이유와 다르다. 그 사람이 ‘피해자’라도 그 피해 때문에 집단에서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면 상처를 갈라내고 찢어버린다. 최근 그 대표적인예가 후쿠시마 지역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도 방사능이 유출되어 사람이 살 수 없는 그 지역에 막대한 보상금을 받았으니 다시 가서 정착해 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이다. 후쿠시마 사람들은 명백한 ‘피해자’이다. 하지만 그들이 보상금을 받았음에도 국가의 말을 듣지 않고 자꾸 ‘분란’을 만든다는 것이 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이유다. 
 


최근 개봉한 <목소리의 형태>는 일본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이지메’, 왕따에 대해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이지메의 문제를 아주 가슴 아프게 풀어냈다. 맨 처음 이지메를 당하는 쇼코라는 아이는 귀가 들리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보호를 받아야 하는 아이를 철없는 초등학생들은 귀찮다는 이유로 괴롭힌다. 그러다 쇼코의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고 학교에 도움을 요청하며 쇼코를 왕따시키는데 앞장섰던 쇼야라는 아이가 주범으로 몰린다. 헌데 여기서 웃긴 사실이 하나 등장한다. 담임선생이 ‘쇼야’의 이름을 외치면서, 그리고 직간접적으로 왕따에 가담했던 아이들의 이름을 호명하면서 그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다. 아니, 그럼 대체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담임은 여태까지 무엇을 했던 것인가? 담임의 침묵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영화가 있다. 트렌디한 감독 미이케 다카시의 기괴한 영화 <악의교전>이다. 이 작품에서 선생은 자기 반 아이들을 모두 ‘학살’한다. 헌데 이 학살의 이유가 특이하다. 선생은 계속 말한다. 자기 반에는 왕따가 없다고. 헌데 이지메의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이에 선생은 분노한다.
 


이 분노는 우리가 학창시절에 흔히 겪었던 왕따 피해자의 아픔에 분노해 휘두르는 폭력이 아니다. ‘집단의 균형’에 균열이 갔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다. <목소리의 형태>는 장편 애니메이션을 한 편의 극장판으로 만들었기에 자세한 그들의 속마음을 알 순 없다. 하지만 대략적인 추측은 가능하다. 쇼코가 오기 전까지 그들 반은 아주 화목했다. 쇼야는 그 중심이었고 그를 중심으로 한 반 아이들은 (비록 완벽한 하나는 아니지만 겉보기라도)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헌데 쇼코가 들어오면서 그 균형이 깨졌다. 하지만 쇼코 하나를 왕따시킴으로 그 균형은 암묵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다들 입을 다물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쇼야는 실수를 해버린다.(실수라는 표현이 가혹할 정도의 일을 말이다) 쇼야가 이지메의 주범으로 몰리자 쇼야는 친구들을 하나 둘 끌어들인다. 그 순간 집단에는 균열이 생긴다. 그리고 집단은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아주 빠르게 뭉친다. 그리고 새로운 타깃을 정한다. ‘내부고발자’인 쇼야를 말살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예전에 일본 이지메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충격을 받았던 건 일본의 왕따 형태가 한국과 완전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학창시절을 겪으면서 본 왕따는 어딘가 모자라거나 못생기거나 약하거나 하는 외적인 이유가 강했다. 헌데 일본은 전혀 아니었다. 외적인 이유로 강력한 이지메가 시행되지 않는다. 그 책에 있었던 사연 중 하나가 한 농구부 에이스 이야기였다. 이 아이는 중요한 시합에서 쉬운 골을 넣지 못했고 그 이유로 왕따를 당하기 시작했다. ‘본인의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 책에 담긴 사연은 대부분이 그랬다. 집단에서 벗어난 행동 혹은 집단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해내지 못한 잘못. 그것이 이지메라는 지나치게 강한 처벌로 이어진 것이다. 
 


일본에는 도게자라는 문화가 있다. 일본 드라마나 만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이 자세는 일본의 예법 중 하나로 여러 가지 의미가 있으나 깊은 사과의 의미를 담고 있다. 드라마나 만화에서는 이 도게자가 깊은 사과의 의미로 등장하는데 우리가 보기에 별 거 아닌 일임에도 지나치게 고개를 숙이고 울먹이며 말을 한다. 이 별 거 아닌 이유가 그들에게는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집단을 헤쳐서는 안 된다’ ‘집단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내가 일본 영화 <스윙걸즈>에 거부감이 들었던 건 이런 집단의식이 너무 강하게(딱 일본 사회처럼)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집단주의가 무서운 건 집단의 이익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태도에 있다. 집단이 우선이 되면 개인은 중요하지 않다. 이 집단주의가 국가 전체를 향한다면 국가에 조금이라도 흠결이 가는 행동이 시행된다면 이를 집단이라는 이름으로 막을 권한을 주게 된다. 최근 일본에서 중의원을 통과한 공모죄 법안은 집단을 지키기 위해 최적화된 법안이다. ‘행동’으로 옮기지 않더라도 계획을 한 ‘정황’만 있다면 체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현대판이라 볼 수 있다. 일은 벌어지지 않았는데 미래에 네가 범죄를 저지를 게 분명하니 체포하겠다는 것이 이 법안의 쟁점이다.
  
문제는 이런 집단주의의 경향이 한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세월호 사건이다. 세월호 사건은 명백한 국가의 책임이다. 국가는 제대로 된 매뉴얼을 전혀 작동하지 못했고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할 책임이 있음에도 방관했다. 헌데 이런 국가의 잘못을 책망하는 세월호 유가족에게 다가온 명함은 ‘빨갱이’였다. 세월호 가족이 막대한 배상금을 노리고 국가를 공격하며 이들의 행동이 대한민국을 어지럽혀 북한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만드는 행동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리고 집단은 굉장히 빠르게 뭉쳤다. 놀랍게도 ‘국가’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국가의 이름을 빌려 개개인을 억압하고 무시하는 행동이 일어난 것이다. 심지어 세월호 단식농성 옆에서 폭식투쟁을 벌인 일베의 행동은 집단주의의 가장 잘못된 모습을 보여준 행동이었다. 아무런 가치가 없는 폭력을 행한 것이다.
  
심지어 2016년 3월 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테러방지법’의 경우 일본의 ‘공모죄’와 다를 바가 없는 법안이다. 나는 ‘대통합’이라는 이야기를 싫어하는데 통합의 결과는 집단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개개인이 무시된 집단의 가치를 우선시두는 행동은 결국 일본이 보여주는 집단주의의 문제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통합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개인에게 많은 것을 포기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리고 개인이 어떠한 피해를 입고 망가지든 신경 쓰지 않는다. 그건 집단을 따라가지 못한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해버리면 그만이니까. 
 


이런 집단주의를 막기 위해서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해야만 한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삼성 반도체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이 영화에서 주인공 가족을 가장 힘들게 하는 건 삼성도, 국가도 아닌 그들의 이웃이었다. 이웃 사람들이 딸을 잃은 그들 가족을 ‘막대한 보험금을 타먹기 위해 저러는 것이다’ 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국가를 일으킨 대기업을 망치려는 나쁜 사람들’로 취급해 버리기 때문이다. 사람이 힘을 낼 수 있는 동력은 사랑에서 온다. 아무리 힘들고 괴롭더라도 날 사랑해주는 주변 사람들이 있으면 힘을 낼 수 있다. 반대로 사랑을 줬던 사람들이, 사랑을 줄 것이라 여겼던 사람들이 자신을 책망하고 욕하면 힘을 잃게 된다. 
 


한국의 무서운 집단주의의 절정을 보여주는 사건은 황우석 박사 사건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영화 <제보자>가 다룬 이 사건은 ‘국가의 명예’를 위해서는 어떠한 거짓도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 사건이었다. 당시 PD수첩 멤버들이 고통을 겪었던 건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을 적으로 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왜 대한민국의 자랑을 우리 스스로 헤치려고 드느냐’ 라는 이유로 PD수첩은 함구를 종용받았다. 이는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가 사기로 밝혀진 이후에도 이어졌다. 차라리 황우석 박사에게 시간을 주었다면 유능한 인물이기에 줄기세포를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물음이 몇몇 사람들의 머리에서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잘못된 믿음, 집단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잘못도 허용될 수 있다는 믿음이 만들어낸 괴물이 있다. 바로 MB다.
  
BBK 사건이 터진 이후에도 국민들은 MB를 지지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MB란 인물이 대한민국 경제를 살리고 성공을 이끌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론의 계속된 공격에 노무현 정부는 ‘실패한 정부’로 낙인이 찍혔고 이는 서울시장 당시 성공적으로 임기를 보낸 MB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국민들은 엄청난 도덕적 결함이 있는 MB를 ‘집단의 이익’을 위해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는 이명박근혜 9년으로 넘어가는 실패의 정권이었고 이 9년 동안 대한민국의 집단주의는 더욱 공고해졌다. 분열은 나쁜 것이 아니다. 다양한 생각은 다양한 사회를 만들고 세상을 더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간다. 헌데 이런 생각의 다양성을 파괴시킨 것이 지난 9년이며 그 결과는 각 집단이 자신들의 생각을 더 공고히 하며 남의 입장은 듣지 않는, 그리고 내부에서 다른 목소리에는 가차 없이 망치질을 가하는 ‘과한 집단주의’를 형성하게 만들었다.
 


이 글은 젊은 층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소셜포비아>는 이런 젊은 층의 문제점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영화다. 잘못된 인터넷 문화. 나 우리 집단을 공격하면 그에 대한 어떠한 보복도 허용되는 문화. 이 영화에서 반전이 밝혀지는 장면은 개인적으로 충격 그 자체였다. 그 겁에 질린 표정. ‘공포증’이 아닌 ‘진짜 공포’를 맞이하게 된 그 순간은 단순히 ‘인터넷’으로 똘똘 뭉친 집단이 얼마나 큰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단순히 인터넷에 상주하는 벌레들이라 여겼던 일베가 세상에 나와 폭식투쟁을 벌였던 그때를 생각해 보라. 그 순간 일베는 단순한 ‘포비아’를 넘어 ‘피어(fear)’로 다가왔다.
  
독재자들의 독재법은 다르지 않다. 그들은 공통의 가치를 추구하며 공통의 목표를 정한다. 그리고 그 공통이 공동이 되기를 원한다. 하나의 원을 만들고 그 원 밖에 불을 지른다. 나가면 타 죽게. 그리고 원 안에서 감시를 한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때려죽이기 편하게. 내가 우리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운 이유는 적어도 이 나라는 잘못된 방향을 향하면 선장을 몰아내고 키를 빼앗을 줄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반대다. 배가 잘못 가고 있으면 잘못 탔네 하고 한탄만 할 뿐이다. 한탄은 체념으로 체념은 묵인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묵인의 마지막은 동조를 향한다. 일본은 한국의 탄핵 정국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도하였다. 그들은 겁쟁이다. 자신들의 기득권 역시 한국처럼 무너질 것을 겁내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의 20대들은 이런 현실에 맞서 싸워 ‘우리도 원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말하지 못한다. 겁쟁이 정부를 따라 국민들도 겁쟁이로 변화된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역시 안심할 수 없다. 집단을 막는 건 개인 하나하나의 동력이다. 그리고 그 동력은 우리가 뽑은 사람을 ‘믿을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보일 때’ 일어난다. ‘문재인 대통령이 되었으니 다 끝났네’ 가 아니다. 적폐청산을 내걸었다면 이 적폐청산에 내가 찬성한다면 그 힘을 더해줘야만 한다. ‘왜 못하느냐’라고 하는 게 아니라 할 수 있게 해줘야만 한다. 학교 교육에 가장 잘못된 점은 대의 민주주의를 설명하며 ‘우리가 뽑아놓은 대표이니 믿고 맡겨야 한다’고 가르친다는 점이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고 정책은 국민을 향해야만 한다. 대표를 뽑아놨으니 다 믿고 맡겨야 한다는 건 마사지사가 잘못 마사지를 해 몸이 죽겠는데 맡겼으니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한때 일본 정치와 같은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국민들의 힘으로 이를 바꿔놓았다. 
  
내가 우리 국민에게 희망을 느끼는 건 문화산업에서도 반응이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보다 문화가 몇 배는 발달한 일본은 백날 이런 일본의 잘못된 점을 꼬집는 작품이 나와도 바뀌질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베테랑>에 분노하고 <변호인>에 바뀔 줄 아는 민족이다. 그리고 이 변화는 정치권까지 연결된다. 일본은 이지메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 국가와 국민이 집단주의를 버려야만 한다. 이미 사회적 분위기가 그리 형성되어 있는데 어린 학생들이 무얼 보고 배우겠는가. 집단이 아닌 개인을 바라봐야 일본 사회가 바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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