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감성 스릴러 영화, 네 번째
개인적으로 문화, 예술 사업에 염증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예술은 춥고 배고파야 된다’ 면서 노동을 착취하고 쥐어짜는 행동이다. 특히 한국 방송의 경우 갑질로 대표되는 사회의 모순을 다루면서 자신들이 그런 행동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그리고 일본.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문화와 예술을 단순히 ‘즐기는’ 데에서 끝을 맺고 있다. 이를 통해 세상을 좀 더 아름다운 방향으로 바라보거나 나아갈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 <예고범>은 이런 일본 사회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라고 말하는 예고범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아쉽게도 현실의 일본 사회는 변하지 않는다. <예고범>의 이야기는 일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 영화를 보다 보면 대한민국에서도 있었던 문제와 비슷한 일들이 정말 많이 등장한다. <예고범>은 어떤 문제를 제기했으며 그 문제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일까?
2004년,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 놓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쓰레기 만두’ 파동이다. 당시 사건의 경우 재료로 사용하면 안 되는 자투리 단무지를 사용한 것이 원인이 된 사건으로 이후 무죄로 결론이 나기는 했지만 ‘좋지 못한 재료’를 쓴 것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이후 동서식품에서 대장균 시리얼 논란이 있었고 식당가에서 재료를 재활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외에도 ‘식품’과 관련된 논란은 많았으나 이들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음식을 가지고 ‘장난’을 친 이들이 또 장난을 치고, 또 장난을 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음식은 몸에 직접 들어가는 만큼 굉장히 중요하다. 한 번 망가진 몸은 회복되기 힘들다. 헌데 이런 식품과 관련된 규정은 약해도 너무 약하고 빠져나올 구멍으로 가득하다. <예고범>에서도 한 식품 가공 회사의 음식을 먹은 이들이 단체로 식중독에 걸린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이에 방화로 보복을 가한다. 인간의 ‘몸’과 관련된 법은 엄격해야만 한다. 건강이란 건 한 번 망가지면 회복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가습기 살균제 사건으로 몸에 직접 닿는 제품이나 식품에 대해 허술하게 혹은 실험적으로 관리했다가는 어떤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경험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들이 저지르는 보복인 방화는 피해자들이 당한 고통에 비할 때 결코 과한 처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공장은 차라리 없어지는 편이 나으니까.
‘누가 졸졸 따라가래?’ 이 작품에서 한 남자가 성폭행을 당한 여자에 대해 쓴 글이다. 주인공‘들’은 이 남자에게 똑같이 보복을 해준다. 그리고 대학생인 남자는 성폭행 당한 영상이 인터넷에 떠돌아 얼굴은 다 팔리고 취업하기로 한 회사에서도 계약무효 통보를 받는다. 자신의 괴로운 처지를 말하는 남자에게 형사 반장 요시노는 말한다. ‘그러니까 누가 졸졸 따라가래?’ 일본은 여성 인권이 바닥인 나라다. 이 나라의 JK(여고생을 뜻하는 말) 카페는 UN에서 인권 문제로 이야기될 정도로 심각한 문제이다. 일본이 성적으로 자유로운 나라라는 것은 다들 알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성적인 자유는 성적으로 우위에 설 수 있는 남성의 우월함을 강조하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AV사업을 생각해 보라. 스카우트에게 속아서 AV로 팔려가는 여성의 수는 상당하며 이들의 인권은 제대로 보호되지 못하고 있다. 예전 바키사 사건 같은 경우는 일본 AV계가 가진 추악함과 여성 인권 유린에 대한 제대로 된 보호가 일본 사회에서 이뤄지지 않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영화 <한공주>가 배경으로 한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만 보더라도 성폭행의 ‘피해자’인 여성을 오히려 죄인으로 몰아간다. 심지어 클럽에 갔다 강간을 당한 여성의 기사에 ‘클럽 간 거 자체가 목적이 그쪽인데 왜 강간당했다고 뭐라고 해? 좋아해야 되는 거 아님?’ 식의 댓글이 달리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최근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의 절정이 리벤지 포르노가 아닌가 싶다. 여성에게 관계 중 촬영을 강요하고 헤어지면 영상을 공개해 사회적으로 말살시켜 버리는 것이다. 문제는 남성들이 이 리벤지 포르노에 대해 철저하게 배척해야 되는데 이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도 강간범과 피해자를 결혼시키는 판결이나 신인 여자 연예인을 납치해 강제로 결혼하고도 뻔뻔하게 그걸 방송에서 자랑하던 인간들에게 비난의 목소리가 커지는 거 보면 우리나라의 여성 인권은 느리지만 천천히 개선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동영상 출처 : 유튜브 - 쓰레기 면접관들
영화 <내 깡패 같은 애인>에서 세진은 취업 면접을 본다. 면접관들은 그녀에게 춤과 노래를 시키고 세진은 어쩔 수 없이 춤과 노래를 한다. 그 모습을 보고 비웃는 면접관들. 오늘 뉴스에서는 취업 공고에 응모를 해도 탈락 문자조차 오지 않아 다른 곳에 지원을 할 수 없다는 기사가 떴다. 난 이런 기업의 인간들에 대해 무식한 인간들이라 말하고 싶다. 다른 사람들이라고 남에게 배려하면서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니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니까 영리하게 남에게 배려를 하는 것이다. 저놈들은 무식하기에 그런 배려심이 없이 남을 비웃고 업신여기며 자신의 시간만큼 다른 사람의 시간이 소중한지 알지 못한다.
<예고범>의 경우는 더 잔인하다. 한 남자가 있다. 30대 초반의 남자는 과거 아픈 일이 있어서 경력이 단절되었고 그래도 다시 세상에 나아가기 위해 취업면접에 지원한다. 그런데 그런 그를 면접관은 인터넷 방송으로 조롱한다. 몰래 방송을 켜고 일부러 그를 혼내고 질책해 겁에 질리고 당황하며 울먹이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공개한 것이다. 그 모습에 비웃는 댓글을 다는 사람들. 이에 ‘예고범’들은 분노한다. 힘겹게 세상을 향해 나아가려는 사람을 괴롭힌 것은 물론 그의 모습을 비웃은 이들에게 경고를 한 것이다. 면접은 지원자에 대한 검증이 되어야지 가진 자들의 횡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면접에서 사상 검증을 시도하고, 외모에 대해 지적하고, 지원자를 혼내는 면접관은 무식하고 멍청한 놈들이다. 거기다가 지원자를 개망신주고 이에 만족감과 쾌락을 느끼는 놈들은 사악하기까지 하다고 말할 수 있다.
예고범들은 이제 정치인을 죽이겠다고 나선다. 이에 완전 경계태세에 들어간 경찰들. 헌데 알고 보니 이들은 정치인의 ‘목숨’을 빼앗은 것이 아닌 ‘사회적인 죽음’을 행한 것이다. 이 정치인, 놀랍게도 자기 법안을 성공적으로 통과시키기 위해 자회사를 통해 여론조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 이 장면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는가? 맞다.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국정원과 일베들에 의해 시행되었던 악질적인 짓거리다. 이명박 정권은 이후 정권 유지를 위해 아주 사악한 짓을 시행하였는데 그것이 언론 장악과 국정원을 통한 여론 조작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언론이 나서서 당시 야당을 공격하는 기사를 내고 정부가 한 행동에 대해 옹호하는 기사를 낸다. 그리고 이에 맞춰 여론을 조작한다. 야당은 줄기차게 공격하고 정부에 대해서는 옹호하는 것이다. ‘아니, 그래도 사람이 머리가 있는데 저런다고 넘어갈까?’ 우리 속담에 삼인성호라는 말이 있다. 세 사람이 뭉치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낸다. 그런데 인터넷을 잔뜩 도배한 댓글을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속이 쓰린 점은 이 작품의 내용이 우리나라도 일본도 당연히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그게 아니라는 점이다. 일본은 아키에 스캔들에도 불구 아베의 지지율은 전혀 문제가 없다. 심지어 야당 의원들이 이 문제로 국회에서 청문회를 열자고 해도 여당 의원들의 별 이유 없이 ‘싫다’라고 말하는 것이 먹히는 나라가 일본이라는 점이다. 이는 정치의 세속화의 심각성과 질서와 유지를 중시하는 국민성의 합작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아베의 잘못된 역사 교육으로 우경화 된 것이 지금 일본의 20대 청년들이다. 하지만 아베라고 무조건 아키에 스캔들을 우격다짐으로 덮은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교묘한 계략이 있다. 바로 한반도 위기설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자유한국당(구 새누리당)이 자주 써먹던 방법으로 북한에 대한 위협을 키우면서 이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건 우리 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아베 역시 이런 방법으로 위기를 강조, 지금 일본을 지킬 것은 자신 밖에 없으며 일본의 우경화와 자위대의 부흥만이 일본을 전쟁 위기에서 지킬 수 있는 방법임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소위 말하는 ‘보수들’ 역시 이런 방법으로 세력을 유지하며 나라를 아무리 개판으로 만들어도 ‘안보는~ 경제는~’ 이라는 구호를 들고 나와 다시 당선되는 이들이다. 지난 박근혜 정부 때도 몇 번이나 박근혜 정부의 추악함이 밝혀질 순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 이런 여론전에 의해 밝혀지지 않았다. 심지어 마지막 순간까지 뜬금없는 ‘개헌’ 카드를 들고 나와 정세를 바꿔보려고 했던 것이 이들이다. 그래도 우리나라는 어떻게든 바뀌었는데 일본은.........
앞에서 살펴보았듯 얼굴에 신문지를 뒤집어 쓴 예고범들은 사회의 잘못된, 하지만 시민들의 힘으로는 처단할 수 없는 이들에게 펀치를 날린다. 이 통쾌한 무리들의 대장 게이츠.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던 그가 예고범이 된 이유는 파견직 근로자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파견법은 참으로 악명 높은 법안이다. 위의 <썰전>에서의 설명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파견직이란 말 그대로 파견된 것을 의미한다. 게이츠는 한 회사에 파견직으로 근무를 받았고 그곳에서 사장에게 ‘정말 열심히 일하면 정규직 시켜줄게’ 라는 제안을 받는다. 헌데 이 정규직 제안으로 시킨 일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게이츠는 밤을 세워가며 일을 하지만 실패, 결국 정규직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게이츠를 단톡방에서 비웃는 정규직들. 이에 게이츠는 신체적인 무리와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피를 토하고 쓰러진다.
참으로 억울한 일이다. 그는 java 기술을 갖추었음에도 불구 정규직이 아니라 파견직이라는 이유로 고용 불안은 물론 버는 돈의 일부는 파견회사에 줘야만 한다.(한마디로 파견직은 최악이다.) 문제는 이런 파견직들에게 정규직이라는 달콤한 유혹을 하면서 무리한 일을 시키는 사장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뒤에 게이츠를 도와주는 pc방 직원도 마찬가지다. 그는 의류업체에서 정규직을 시켜준다는 말에 피나게 일했지만 돌아온 건 건강악화로 인한 경력단절 뿐이었다. 후에 게이츠는 다시 일을 얻으려고 하나 몸이 아파 쉰 기간이 ‘경력단절’이 되어 직장을 구할 수 없다는 파견업체의 말만 들을 뿐이다. 이 파견직이 뼈아프게 다가오는 건 가난하게 살아왔던 게이츠가 아무리 기술을 익혀도 결국 사회에 나가 성공할 수 없는 구조가 일본 사회에 만들어져 있다는 점이다. 결국 경력이 단절된 게이츠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기술이 필요 없는 막노동이다.
그가 간 막노동 장에서는 다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후에 예고범들이 되는 이들이 겪는 문제는 게이츠와 같다. 파견직, 그리고 경력단절. 그리고 쓰레기 처리를 하는 이곳 주인은 일을 하기 위해 온 직원들을 개처럼 부려먹는다. 그리고 코피노가 죽자 말하자. 이런 일은 허다하다고. 어차피 업체를 통해 한 명 더 충원하면 그만이라고. 파견법은 참 편리한 법안이다. 고용주들에게는 말이다. 일할 사람을 업체가 다 관리하고 경력에 맞는 사람을 보내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고용자들에게는 지옥과 같다. 그들은 숫자 1로 취급받는다.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인 존재. 어차피 기간이 만료되면 떠날 존재. 그리고 그들이 사라져도 다시 건강한 녀석을 한 명 고용하면 그만인 대체품과 같은 존재.
우리나라를 생각해 보자. 왜 많은 대학생들이 졸업유예를 하는 것일까? 여기서 말하는 경력단절이 우리나라에서도 이뤄지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취업하지 못하면 이후 기업에서 받아줄 확률이 줄어들다 보니 졸업을 못하는 대학생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또 인턴, 비정규직, 하청업체 등등 정규직에 비해 제대로 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고용불안과 복지의 사각지대로 몰리는 일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또 사진 속 저분은 파견법까지 주장하며 ‘나라 경제 살리기’를 외쳤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무언가를 보고 깨달음을 얻거나 느끼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저분은 그 많은 드라마를 보셨으면서 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걸까..........
게이츠를 비롯한 동료들이 ‘예고범’이 된 이유는 한 코피노의 죽음 때문이다. 그들과 같이 쓰레기 정리 일을 하며 하숙을 하던 동료인 이 코피노는 아빠를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왔다.(일본도 따로 부르는 말이 있을 텐데 몰라서 코피노라는 말을 사용했다.) 코피노가 무엇인가? 코피노는 한국인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지칭하는 용어다. <어둠의 아이들>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문제가 되었던 장기밀매가 일본에서도 문제이듯 코피노 역시 일본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동남아시아로 여행을 가서 성매매로 여성을 임신시킨 후 그대로 본국으로 돌아와 애 없는 자식을 만드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이 문제가 심각한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었고 배우 김민교는 <당신만이 내 사랑>이라는 드라마에서 한국에 온 코피노로 출연하기도 하였다. <예고범>에서 코피노는 일본으로 오기 위해 자신의 신장을 팔았고 과한 노동에 몸이 상해 결국 죽게 된다. 하지만 타지에서 죽은 그를 기억해줄 이는 아무도 없다. 그의 동료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동료들은 그의 죽음에 분노한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써 한 번도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그의 모습에서 자신들을 발견한 것이다.
게이츠가 이런 고통을 겪어 사회에 경고를 알리는 예고범이 되었다면 그와 대척점에 있는 형사반장 요시노는 순탄한 삶을 살았을까? 요시노는 도망치는 게이츠를 쫓아가지만 높은 하수도에 숨은 그를 쫓아가지 못한다. 돌아서는 요시노에게 게이츠는 말한다. ‘넌 우리를 이해할 수 없어!’ 라고 말이다. 요시노는 그 말에 반박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 역시 힘들게 살아왔다는 것을 게이츠는 모르니 말이다. 작품에서 보여주는 요시노의 성격은 시크하다. 자기 방어가 강하다. 여기에 소심한 면모도 보여준다. 사실 요시노는 왕따였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이지메를 당했다. 초등학생인 그녀는 친구들의 괴롭힘을 이기지 못해 다리 아래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하려고 했다. 일본의 이지메는 우리나라의 왕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사회적 문제다.
일본의 이지메가 심각한 이유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다. 일본은 집단을 중시한다. 내부에서 아무리 썩어 문드러져도 외부에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그래서 그 균형을 망가뜨리는 사람에게 이지메를 가한다. 일본에서 이지메를 당하는 건 외모나 체형, 행동보다는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했느냐’이다. 이게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하게 만든다고 착각을 한다. 여기에 일본사회 특유의 침묵 문화가 교실에도 있다 보니 선생들은 문제를 함구한다. 앞서 해결할 의지가 없이 ‘우리 반은 모두가 단합이 잘 되는 왕따 하나 없는 반’이라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애쓰다 보니 안은 썩고 곪아 썩은 내가 날 지경이다.
세상에 당한 고통을 직접 해결하기 위해 예고범이 된 게이츠. 자신이 당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찰이 된 요시노. 그렇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이 두 사람의 관점은 다른 걸까? 아니다. 이 두 사람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라고 말이다. 마지막 순간 게이츠는 동료들에게 ‘새로운 삶’을 주고 떠나간다. 그가 세상을 썩은 곳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최후의 거대한 한 방을 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게이츠는 일본 사회를 향한 ‘경고’만을 남긴 채 뒤의 삶을 동료들에게 양보한다. 게이츠는 왜 이들에게 새 삶을 주었을까? 그건 사회가 아무리 망가지고 더러워도 인간이 가진 양심과 따뜻한 마음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본다. 망각하고 있을 뿐, 보이지 않을 뿐 잘못된 부분을 깨우쳐 주면 변할 수 있다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시 사회로 돌아갈 순 없다. 어찌되었건 그들은 ‘범죄자’이고 사회의 ‘고위층’들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이츠는 희생한다. 자기 하나의 죽음으로 나머지 ‘예고범들’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시노는 오열을 터뜨린다. 그녀는 게이츠에게서 동질감을 느낀다. 그녀도 가난했고, 외로웠고, 사회의 문제가 되는 구조 때문에 힘들었다. 그녀는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보라, 난 그래도 다 이기고 경찰 반장이 되었잖아. 너도 노력하면 이렇게 될 수 있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서 사회에게 분노를 표출하지 마. 라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다. 그저 말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세상은 참 개 같고 더럽고 지독하지만 그래도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살다보면 결국 좋은 일도 있고 인정도 받게 되고 아주 작지만 행복이라는 것도 존재한다고. 그녀는 그 모든 것을 게이츠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에, 어쩌면 그때 강물로 뛰어들었다면 사라졌을 자신의 모습을 그에게서 보았기에 그토록 ‘범인’에게 슬프게 감정을 이입했을지 모른다.
p.s. 영화를 본 지 꽤 되어서 설명이 부족하거나 오류가 있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