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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의 형태> - 아픔도 사랑도 목소리에 담기는 걸

  
‘목소리’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목에서 나오는 소리를 의미한다. 우리가 내뱉는 말이라는 것은 이 목에서 나오는 소리인 목소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헌데 말이라는 것은 꼭 목소리를 통해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에서는 세 가지 형태의 목소리가 나온다. 첫 번째는 필담, 두 번째는 수화, 그리고 세 번째는 대화다. 하지만 난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 싶다. 흔히 연인들이 나눈다는 대화. 서로 눈만 마주쳐도, 손만 마주잡아도 알 수 있다는 목소리인 ‘마음’이다.

 


쇼야는 여느 초등학생이 그렇듯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아가고 싶은 까불까불한 남자아이다. 어느 날 학교에 전학생이 온다. 쇼코라는 여자 아이. 쇼코는 귀가 들리지 않는 아이였고 그 때문에 말이 더듬더듬 알아듣기 힘들다. 활기차고 즐거웠던 반 아이들의 일상은 쇼코로 인해 균열이 생긴다. 쇼코가 그 아이들 틈으로 들어가려고 할수록 아이들은 쇼코를 밀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 애와 필담을 나누기 싫고, 그 애한테 우리들이 알고 있는 걸 전해주기 싫다. 듣지 못하는 애를 위해 시간을 내 수화를 배우기 싫으며 그 애 하나 때문에 우리 모두가 귀찮아지는 건 싫다. 그리고 쇼야는 쇼코의 보청기로 장난을 친다. 보청기를 던져 망가뜨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쇼야에게 다가서는 쇼코. 수화로 대화를 거는 쇼코를 알아듣지 못한 쇼야는 차갑게 떨어뜨린다. 그리고 쇼코는 쇼야를 중심으로 한 아이들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고 다른 아이들은 이를 묵인한다.
  


어느 날, 쇼코가 학교에 나오질 않는다. 한 달 새에 5번이나 고장 난 보청기. 쇼코의 어머니는 쇼코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며 학교에 신고를 한다. 교장 선생은 쇼코를 괴롭힌 학생에게 자수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칠판을 치며 말하는 담임선생. 그는 쇼야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가담했던 그리고 묵인했던 친구들은 모두 쇼야의 잘못이라고만 말한다. 그리고 그들을 고자질했던 쇼야를 왕따시킨다. 반에서 가장 활발한 아이에서 가장 어두운 아이가 되어버린 쇼야. 그는 자신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상처를 입은 어머니 때문에 괴롭고 쇼코가 원망스럽다. 그리고 쇼야는 끝내 쇼코가 하려고 했던 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헤어짐을 맞이한다.
 


6년 뒤 쇼야는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망가졌다. 그는 학교에서 자발적 왕따다. 이제는 그를 괴롭히는 사람은 없지만 그는 사람의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꿈도 희망도 잃어버린 쇼야는 과거 그가 괴롭혔던 쇼코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때의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그 애에 대한 동정심 때문일까? 아니면 동질감일까? 쇼코를 찾아가는 쇼야. 하지만 쇼야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쇼코의 동생 유즈루는 쇼야가 쇼코를 만나지 못하게 막는다. 그리고 어느 날 쇼야는 나가츠카라는 작고 뚱뚱한 아이가 자전거를 빼앗기려는 위기에 처한 것을 보게 된다. 언제나 그랬던 거처럼 눈을 내리깔고 도망가려는 쇼야. 하지만 나가츠카가 그에게 도움을 청하고 쇼야는 자신의 자전거를 줘버린다. 그리고 쇼야의 자전거를 찾아서 온 나가츠카.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X표를 치고 살았던 쇼야. 그 순간 나가츠카의 얼굴에서 X표가 지워진다. 나가츠카의 도움으로 다시 만난 쇼야와 쇼코. 그리고 두 사람은 과거의, 그리고 새로운 친구들과 만난다. 하나씩 사람들의 얼굴에서 X표를 지워가는 쇼야. 하지만 과거 왕따를 주도했던 여학생이 이들 사이에 들어가면서 관계는 틀어지게 된다.
 


<목소리의 형태>는 근래 보았던 극장판 애니메이션 중 가장 ‘집중력 있게’ 이야기를 전개한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작품의 감성은 정말 특별하다. 시작부터 끝까지 감성의 끈을 놓치질 않는다. 이 작품의 감성이 진한 이유는 쇼야가 받은 상처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철없던 시절의 철없는 장난 하나로 쇼야는 너무나 큰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했다. 그에게 이 죄책감이 괴로운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어른들이 책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쇼야의 초등학교 담임선생은 쇼코가 왕따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주동자들이 누군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철없는 아이들에게 경고도, 처벌도 내리지 않았다. 그저 방관하고 있다가 일이 커지니 모든 책임을 아이들에게 돌려버렸다. 자신들이 하는 행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도 잘 모를 나이에 너무나 큰 형벌을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무책임한 어른은 이후 쇼야를 돌봐주지 않았다. 아마 알았을 것이다. 쇼코의 왕따도 알았으니 쇼야의 왕따도 알았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선생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활발했던 쇼야가 자살을 생각하는 아이가 되도록 내버려두었다.
 


두 번째는 너무나 사이좋았던 친구들이다. 쇼코가 나타나기 전까지 그들 반의 친구들은 너무나 사이가 좋았다. 헌데 쇼코의 등장으로, 이들이 쇼코를 괴롭히면서 우정에는 금이 가게 된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건 그 무엇보다 고통이 크다. 쇼야는 가장 친했던 친구한테 왕따를 당하게 된다. 일본 특유의 잘못된 문화. ‘넌 우리 집단에서 의무를 해내지 못했어’ 라는 이유로의 왕따. 아이들은 쇼코가 눈치 없이 끼어든다는 이유로 왕따를 시켰고 자신들을 고발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쇼야를 왕따시켰다. 쇼야가 사람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게 된 건 이들이 보여준 싸늘함 때문이다. 가장 친했던 친구들의 변화. 이것이 쇼야에게는 상처로 다가왔다. ‘언제 또 누가 날 저렇게 바라볼지 몰라’ 라는 다시 상처받기 싫다는 생각이 그를 끊임없이 움츠리게 만들었다.
 


이런 거대한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으로 감독은 꽤나 좋은 방법을 택하였다. ‘화해’ 하지만 이 화해에서는 꼭 선행되어야할 것이 있다. 화해의 기본은 사과다. 헌데 이 사과를 하는 대상은 꼭 가해자여야만 한다. 가해자의 진정한 ‘사과’만이 진정한 화해를 만들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 수 있다. 쇼야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들지만 이들 사이에서도 완벽한 관계를 구축해내지 못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쇼야는 아직 완벽하게 과거의 짐을 덜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절 그랬던 거처럼 나쁜 말로 친구들에게 상처를 주고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애쓴다. 결국 작품의 핵심이 되는 ‘화해’는 쇼야의 입과 생각에서 나왔어야 했고 작품은 이를 보여주었다. 어설픈 화합은 단절만을 가져온다. 쇼야가 처음 다시 마음을 열었을 때 그 관계가 단단하지 못했던 이유는 쇼야 본인이 마음의 짐을 덜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찾아와 반협박으로 사과를 받으라고 말하거나 자신은 이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우리 다시 시작하자. 솔직히 너도 잘못한 거 조금은 있잖아’ 라고 말하는 건 진정한 화합이 아니다.
 


만약 작품이 쇼야의 변화에서만 그쳤다면 실망했을 것이다. 왜냐고? 이 작품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거, 감정의 변화를 일으키는 건 쇼야지만 결국 사건을 일으키는 중심인물은 쇼코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핵심은 쇼코의 언어의 변화다. 작품의 초반, 쇼코는 필담을 시도한다. 글자란 것은 언제나 오해를 가져오기 쉽다. 말에 생명력이 없기 때문이다. ‘좋아요’ 라는 한 글자에 형식적인 것인지, 진짜 기쁜 것인지, 짜증나는데 그리 말하는 것인지 알 방법이 없다. 이는 쇼코의 진심을 알 수 없는, 그리고 쇼코에 대해 단순하게 귀찮게 생각하는 오해를 가져온다. 쇼코에 대해 알 생각이 없는 아이들에게 쇼코가 진심을 전할 수 없어서다. 이후 쇼야는 수화를 배워 쇼코와 대화를 나눈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더 가까워진다. 하지만 수화에도 한계가 있다. 목소리에는 감정이 실린다. 수화는 대화를 더 편리하게 나눌 수 있다는 점 뿐 감정을 담아낼 수는 없다. 수화의 역할은 과거 쇼코에게 가졌던 쇼야의 오해를 푸는 데에만 국한된다.
 


결말부에 이르러 쇼코는 목소리를 낸다옹알이처럼 들리던 말을 정확하게또박또박 말해낸다우리는 모두 오해하고 있었다쇼코가 가만히 있을 뿐이라고삶에 대한 의욕도 없이 살아간다고 말이다하지만 죽은 동물의 사진을 붙여 쇼코가 삶의 의욕을 내기를 바랐던 유즈루의 마음처럼 쇼코 역시 자신의 진심이 쇼야에게 전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그 노력은 진짜 감정이 담긴 말이다목에서 나오는 목소리 말이다하지만 난 이들의 관계를 더 확장하고 싶다쇼야가 다시 친구들을 만드는 과정모두의 얼굴에서 X표를 지워가는 그 과정은 결국 목소리가 아닌 마음을 듣는데서 이뤄졌다고 생각한다쇼코의 진심을 들었던 거처럼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친구들의 마음이 그에게 와닿았던 것이다.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내가 일본 극장판 애니메이션 감독들에게 아쉬워했던 부분을 말끔히 해소했다감정의 연속성이는 정말 힘든 과정이다어느 이야기나 감정이 끊어지거나 변질될 수밖에 없다헌데 이 감독은 정말 힘 있게그러면서 잔잔하게 깔리게 감정을 이끌어갔다이는 내가 원작을 안 봐서 더 이렇게 느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한 편만으로도 부족함 없이 충분한 감정을 느꼈다는 점에서 좋았다개인적으로 앞으로 정말 기대해 볼만한 감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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