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29초>
잔인한 이야기일 수 있다. 누구나 인생에서 죽이고 싶은 또는 사라지게 만들고 싶은 사람이 한 명쯤은 있을 것이다. 사회는 질서와 통제를 요구하고 안정을 빌미로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한다. 문제는 이 희생의 대상이 매번 약자를 향한다는 점이다. <29초>는 약자가 강자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을 때 과연 어떤 일이 펼쳐질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대학에서 계약직 강사로 일하는 세라는 승진 심사를 앞두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녀는 전임 강사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강한 인사권을 지닌 러브록 교수의 성추행과 성희롱을 피하고 싶어 한다. 러브록 교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자신을 보호하고 싶어 하는 세라는 2년의 기간 동안 그의 간접적인 잠자리 요구를 거절해 왔으나 이제는 더 이상 힘들 지경에 놓이게 된다.
그런 세라 앞에 예상치 못한 기회가 온다. 우연히 한 남자아이를 구해준 그녀에게 아이의 아버지가 특별한 선물을 주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의 선물은 ‘이름’이다. 이름 하나만 주면 이 세상에서 영원히 감쪽같이 사라지게 해주겠다는 남자의 제안에 세라는 망설인다. 그녀에게는 말하고 싶은 이름이 있다. 하지만 그 이름을 말하는 순간 어떤 일이 닥칠지 알 수 없기에 두려움을 느낀다.
남자는 생각할 시간으로 72시간을 준다. 그리고 그 사이, 러브록 교수는 또 다시 세라에게 접근하고 성적인 수치심과 모욕감을 준다. 끝까지 저항하는 세라에게 그는 여태껏 승진을 위해 쌓아둔 그녀의 노력과 시간을 한 번에 무너뜨린다.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다 여긴 그녀는 악마의 거래를 받아들인다. 그 선택을 그녀를 바닥보다 더 낮은 지옥으로 안내한다.
<29초>는 누구나 쉽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상황을 설정한다. 누구나 한 번쯤 갑의 횡포에 당해봤을 것이고 입으로 꺼내지는 못하지만 살인의 욕구를 느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단 29초의 통화만으로 현재의 상황을 바꿔준다면 그 유혹을 견뎌내기 힘들 것이다. 이 작품의 대리살인이 강한 흡인력을 지니는 건 이런 감정이입의 설정에 있다.
여기에 이름을 말한 뒤 통쾌함을 줄 것이라 여겼던 스토리가 점점 세라를 옥죄어오면서 예상치 못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세라에게 감정이 이입된 독자들은 빨리 세라가 이 위기에서 탈출하길 원하며 왜 그녀에게 이런 상황이 닥쳤는지에 대해 세라와 똑같은 절망과 고통을 느낀다. 이런 감정은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더욱 끌어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