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리고 세상 - 11. <디시에르토>, <쿼바디스> 外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집 <나무>의 단편 <황혼의 반란>은 CDPD라는 노인관리센터와 그들에 저항하는 노인들이 뭉친 ‘흰여우들’의 갈등을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 CDPD 대원들에게 체포당한 프레드는 말한다. ‘너도 언젠가는 늙은이가 될 게다’라고 말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라는 기막힌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가는 생산력이 떨어지고 소비만을 하는 노인들을 사회의 적으로 보고 그들을 통제하는 시스템을 이 작품의 배경으로 설정하였다. 마치 2차 대전 당시 나치가 한 선전처럼 ‘우성한 유전자’ 즉, 젊은 노동력을 가진 인구만이 삶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생각과는 다른 방식으로 현대의 젊은층과 노년층은 갈등을 겪고 있다. 바로 ‘정치’다.
어제 <썰전>에서 문재인 전 대표는 지금 탄핵의 문제가 정상과 비정상의 싸움이라고 말했다. 즉,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지금 박 대통령이 행한 모든 행동에 분노를 표출하고 탄핵을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만이 이를 감추고 무마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잣대로만 보기에는 대한민국에 ‘비정상’들이 너무 많다. 촛불집회와 태극기 집회를 비교해 보라. 모인 사람들의 수가 아닌 얼굴 하나하나들을 보자면 연령대의 차이가 뚜렷하다. 태극기를 든 어른들에게는 문재인은 빨갱이며, 더불어 민주당은 빨갱이 당이고, 박근혜 대통령은 그들의 설계에 당한 거뿐이다. 삼인성호라고 주변 사람 셋만 거짓말을 해도 사람은 속기 마련이다. 주변 사람들이 다 이렇게 말하는데 어떤 어르신이 혹하지 않을까? ‘진짜 문재인이 집권하면 북한에 나라를 빼앗기는 거 아냐?’ 그들의 이런 불안 심리는 ‘이러다 탄핵이 기각되는 거 아냐’하고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노인이 분노한다. 분노한 노인들은 거리를 향하고 고함을 내지르며 폭력을 행사한다. 그들은 두려운 것이다. 자신이 살아온 세월이 무너지는 것이 말이다. 영화 <디시에르토>는 그 완성도적인 측면에서는 아쉽지만 트럼프 시대가 개막된 현재의 미국에 딱 알맞은 영화라 생각한다. 트럼프가 누구인가?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에 거대한 장벽을 만들어 불법 이민자를 받지 않겠다고 공약한 이이다. 그는 국민들의 분노를 이용해 권력을 쥐었다. 하지만 이 ‘분노’라는 것이 그의 당선으로 지금의 미국을 대표하는 코드가 되어버렸다. 이 작품의 샘이라는 노인은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근처에서 불법 이민자들을 쏴 죽인다. 이건 조직적인 일도, 큰 뜻을 품은 일도 아니다. 그저 너무 화가 나기 때문이다. 그를 분노시킨 건 불법 이민자들이 점령한 미국의 경제시장이다. 그들의 유입으로 수많은 일자리가 날아갔고 실업자들이 생겨났다. 불법으로 들어온 그들 때문에 말이다. 배우 제프리 딘 모건은 딱히 세부묘사가 없는 캐릭터의 감정을 표정과 몇 개의 대사를 통해 능숙하게 표현해낸다. ‘너희가 내가 살아온 미국이라는 나라를 망쳤어’라는 말이 얼굴에서 전해진다.
그가 단 한 명의 불법 이민자도 허락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을 미국의 ‘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저들이 미국을 망치고 있다. 내가 살아왔던 나라를 망치고 있다 하고 말이다. 이는 우리나라도 다를 바가 없다. 최근 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이들의 흉악 범죄에 국민들은 불안에 떨며 그들에 대한 추방을 강하게 외치는 이들도 등장하고 있다. 트럼프는 ‘미국 것이 아닌 것’을 적으로 삼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추종자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대한민국 밖’이 아닌 ‘대한민국’ 안에서 적을 만들고 그들을 쪼개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선 것이 바로 노인들이다. 경상도와 전라도, 남자와 여자, 금수저와 흙수저도 지겨운데 이제는 젊은이들과 노인들 사이마저 갈라진 것이다. 젊은이와 노인이 갈라진 이유는 양측의 분노에 있다. 젊은이들은 박근혜의 행태에 분노했고 촛불을 들었다. 하지만 노인들의 분노는 그 촛불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오랜 시간 행해졌던 교육, 우상에 대한 신격화와 종북척결이 그들의 마음속에 깊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 <쿼바디스>는 ‘예수의 집이 대한민국에 있는가?’라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한국의 큰 교회 중에 진짜 주님을 섬기고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있느냐는 말이다. 이 땅에 돌아온 예수는 길을 배회한다. 사방에 교회는 넘치는데 들어갈 수 없다. 그곳은 주님을 섬기지 않기 때문이다. 목사가 법인 교회, 목사가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내비치며 신도들에게 특정 후보를 찍으라고 강요하는 교회. 이런 교회의 모습은 지난 독재의 역사와 다를 바가 없다. 알게 모르게 가장 신성한 영역에 가장 더러운 이들이 들어와 그 본질을 바꿔놓은 것이다. 이 영화에서 한 목사는 말한다. ‘MB가 대한민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사람입니까?’ 그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마치 종교와 같았다. ‘MB가 다 알아서 해줄 거야’라는 말이 들렸고 도덕적으로 큰 결함이 있는 후보라는 말에도 불구 무난하게 당선되었다.
젊은층과 노년층의 분화는 교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교회들은 죽는 소리를 한다. 젊은 애들이 교회에 안 오다 보니 유지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목사를 숭배하고 받드는 교회를 좋아하지 않는다. 편을 가르고 국민의 분노를 유발하는 목사를 환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그런 시대를 살아왔고 교육을 받아온 이들에게 교회는 익숙한 공간이다. 박정희와 전두환 시대가 대한민국에 남긴 가장 큰 암(暗)은 잘못된 교육과 선전을 통해 잘못된 생각을 가진 이들을 앞세웠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게 정의고 그게 답이다. 군부독재가 시작된 63년부터 88년까지, 그리고 그 잔재가 남은 93년까지. 노인들은 그런 교육을 받고 그런 세상만을 봐왔다. 아니, 48년, 이승만 대통령 취임부터 역사가 쭉 그래왔다. 그런 사람들에게 갑자기 ‘당신들은 잘못된 시대를 살아왔어’라고 말하니 그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다. 그 시대에 그들이 한 희생과 겪었던 고통, 그들이 만들어 온 ‘대한민국’ 그 자체를 부정당하는 시대를 그들은 맞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런 노인들의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이 잘못된 정치인들과 종교인들이다. <데어 윌 비 블러드>를 보라. 권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종교와의 연결이다. 무조건적인 믿음. 마치 신을 섬기는 듯한 한 줌의 의심마저 죄악으로 여기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런 잘못된 결탁은 노인들에게 계속 분노를 심어주는 일을 한다. 더 화를 내라. 당신들의 존재를 부정당하지 마라. 여기에는 앞서 말한 <황혼의 반란> 속 노인들이 겪은 상황이 가지는 심리, 불안이 크게 작용한다. 사회에서 쓸모없는 사람이 되기 싫다, 나도 내 존재를 인정받고 싶다. <국제시장> 속 가족들이 화목하게 노는 거실을 피해 방에서 혼자 과거를 회상하며 눈물을 흘리는 덕수의 모습이 이들의 모습이다.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그저 자신들이 살아온 고통스러운 과거를 잘했다고, 열심히 살아왔다고 인정받고 싶을 뿐이다.
문제는 이런 이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해 먹는 이들이다. 트럼프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911 테러부터 시작된 미국인들의 불안을 이용했다. 외부의 적을 이용할 뿐만이 아니라 이미 ‘미국인’인 이들 역시 인종을 이유로 선을 그었다. 마이클 무어의 <다음 침공은 어디?>는 이런 트럼프의 정신을 대놓고 비판하고 있는 영화라 생각한다. 이 작품이 각 국가의 장점들을 하나씩 뽑는 동안 그와 반대되는 미국의 모습을 보여준다. 헌데 이런 좋은 장점들이 어디서 나왔나 하니 그 뿌리는 이미 미국의 헌법, 그리고 그들의 정신에 담겨 있는 것이었다. 즉, 미국은 어느새 그들이 가진 뿌리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트럼프는 이런 미국의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대통령이나 그는 사람들의 분노를 이용해 그 자리에 올랐다.
지금 대한민국은 경계에 서 있다. 쪼개지고 쪼개져 서로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다. 그중 노인들의 분노는 젊은층 못지않게 타오르고 있다. 흔히 일본을 보고 생각한다. ‘우리는 저놈들이 침략하고 식민 지배를 당해서 그렇다 치자. 그런데 저놈들은 왜 저렇게 우리를 싫어하는 거야?’하고 말이다. 일본은 계속 교육을 해왔고 사회적인 분위기를 조성해왔다. 그리고 그 효과는 놀랍게도 젊은 층에게도 나타났다. 노인은 분노한다. 헌데 이 노인이란 단순히 외형적인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바로 생각과 정신이다. 흔한 경상도 아저씨와 일베를 하는 고등학생이 내뱉는 같은 생각 같은 정신. 이게 과연 우연일까? 아니, 다 교육의 효과다. 교활한 정치인들이 한 행동에 의해 잘못된 교육이 이뤄졌고 일베로 거꾸로 된 역사를 배운 젊은 ‘노인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노인은 분노한다. 헌데 이 분노의 정체를 파고들어가 보면 그 이면에는 정치가 있다. 그들이 살아왔던 시대의 아픈 정치. 저 멀리 루마니아에서 ‘그래도 차우셰스쿠 때는 경제라도 좋았지’하는 사람과 ‘그래도 전두환 때는 물가라도 잡아서 살만했지’라는 사람은 같은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그 속에서 살아온 정신이 시대에 박힌 ‘노인들’이다. 그래, 이 글에서 내가 말하고 싶은 노인이란 결국 시대의 아픔에 잠식당한 정신이며 이 정신은 변하고자 가는 기류에 저항하며 분노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노인 조르바는 화자에게 말한다. ‘나이든 세대가 자신들의 관습과 전통으로 젊은 세대를 묶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인류의 삶을 진보시켰듯 정신 역시 진보해야만 한다. 결국 살아가는 건 로봇이 아닌 인간이다. 언제까지 과거에 사로잡혀 살아가며 과거에 미래의 역사를 양보할 순 없다. 분노로 이뤄낸 역사는 또 분노를 낳는다. 몇몇 가증스러운 정치인들은 촛불집회를 말하기 전에 먼저 잘못된 교육과 시대를 살아온 이들에게 휘발유를 부은 자신들의 언행을 반성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