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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와 오즈의 마법사로 풀어본 <블루 벨벳>

컬트의 거장 데이빗 린치의 <블루 벨벳> 리뷰

학창 시절 놀이공원으로 소풍을 갔다. 집에 돌아와 너무 힘들어서 잠에 들기 위해 tv를 켜고 쇼파에 누웠는데 잠이 확 깨서 끝까지 본 영화가 있다. 바로 이 영화 <블루 벨벳>이다. 이 작품이 내가 본 첫 번째 컬트 영화이고 데이빗 린치를 알게 된 첫 작품이다. 말 그대로 꿈을 꾼 거 같은 공포와 황홀함에 젖었던 영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꿈에서 이 영화를 봤다는 착각에 빠졌었다. 즉, 영화가 아닌 꿈의 이미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의 가장 매력적인 점은 주인공 제프리가 '위험'에 빠지는 순간이다. 도시에서 지내던 그는 아버지가 다쳐 시골의 마을로 내려오고 산책을 하던 중 바닥에 떨어진 귀를 발견한다. 이 귀에 대해 경찰에게 신고하면서 그는 사건에 빠져들게 된다. 과거 동네 친구였던, 그리고 마을에 와서 가까워진 형사의 딸 샌디와 사건과 관련된 인물로 지목받은 클럽에서 노래하는 가수 도로시는 제프리에게 각각 현실과 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자아와 원초아를 의미한다. 데이빗 린치의 전작 <트윈 픽스>를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제프리는 형사가 아니다. 그리고 이 사건과 아무런 연관도 없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형사, 위험에 빠진 여가수 때문에 그는 사건을 파고 들어간다. 헌데 이 사건을 헤집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마치 꿈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일, 너무나 자극적이고 본능적인 인물들, 그리고 평화로운 시골마을에서 일어났다고 보기 힘든 끔찍함. 제프리가 도로시에게 빠질수록 그는 점점 무의식, 꿈이라는 위험한 본능의 세계로 빨려 들어간다. 이와 반대된 인물이 샌디다. 샌디는 현실이다. 그는 도로시처럼 연상이 아니며 또래에 이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여학생이다. 그는 좋아하는 제프리가 이 이상한 일에 연류되지 않기를 바란다. 현실은 생각보다 안락하다. 현실은 진실을 추구하지 않으며 수면 아래 가려진 공포와 추악함을 굳이 헤집고 들어가지 않는다. 그저 제프리는 샌디와 지내다 도시로 돌아가면 그의 현실은 안락하게 유지가 된다. 그 두려움이 자신에게 직접 와닿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프리는 도로시를 택한다. 그는 도로시의 아들과 남편을 구하기 위해 프랭크와 대적한다. 이런 제프리의 심리는 무엇일까? 정의감? 의리? 사랑? 아니면 선(善)이라는 본성? 난 이것이 이 작품 전체에 깔려있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그리고 원초아를 따르려는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이 영화를 가장 돋보이게 만드는 존재, 데니스 호퍼가 선보인 역대급 악역 프랭크가 도로시의 남편과 아들을 감금하고 그녀에게 한 짓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매달리는 것이다. 그의 성교는 엄마를 부르짖으며 도로시에게 달려든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를 두려워하며 성교 중 도망간다. 그리고 이는 제프리 역시 마찬가지다. 제프리가 도로시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에 빠진 것도 아니다. 장롱 속에서 프랭크와 도로시의 성교를 지켜본 제프리는 그 순간 독특한 감정에 빠지게 된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그는 도로시라는 엄마에게 욕정을 느꼈고 그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인 프랭크를 없애야만 한다. 이 순간 그에게 도로시는 엄마, 프랭크는 아빠로 치환된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이런 정의가 가능한 것일까? 그건 작품 초반 힌트가 숨겨져 있다. 제프리가 마음대로 날 뛸 수 있고, 그가 프랭크를 없애야만 하는 이유. 바로 그의 아버지가 작품 초반에 다쳤기 때문에 그는 억압에서 해방되었고 또 다들 억압에 반기를 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성에서 벗어나 본성을 향한다. 분명 자아의 조절에 의해 현실(샌디)에 주안점을 두고 자신의 감정을 조절해야 하지만 그는 원초아(id)에 빠져들며 쾌락원리에 집중한다. 그에게 쾌락이란 안락이 아닌 모험이고, 아버지의 세계에 굴복하는 것이 아닌 어머니를 구해내는 것이다.

여기에 또 한 가지 덧붙일 점이 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색채(여기서 내가 의미하고 싶은 색체는 촬영부터 조명까지 모든 미술적인 부분이다). 이 화려한 색체는 대체 뭘까. 그저 미국의 작은 도시를 보여줬다기에는 이 작품이 가진 미학적인 느낌은 너무 뛰어나다. 마치 환상의 나라처럼 말이다. 시점을 바꿔서 작품의 주인공이 도로시라고 생각해 보자. 그녀는 이 작고 아름다운 마을에서 조용히 살고 있었다. 헌데 어느 날 엄청난 태풍 같은 사내가 그녀를 덮쳤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앗아갔다. 그리고 자신의 말대로 따르지 않으면 가족에게 돌려 보내주지 않겠다고 말한다. 어디서 많이 본 적이 있는 이야기지 않은가? 주인공 도로시의 이름이 의미하는 <오즈의 마법사>가 이 작품을 보는 내내 떠올랐다. <오즈의 마법사>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동화지만 그 이면에는 도로시가 느끼는 공포가 숨어 있다. 어린 소녀는 가족과 떨어졌고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 기이한 존재들(허수아비, 양철나무꾼, 사자)과 모험을 떠나야만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교활한 마법사 오즈가 있다. <블루 벨벳>이 보여주는 화려한 색채는 마치 동화 같지만 그 이면에는 잔혹함이 숨어 있다. 마치 <오즈의 마법사>처럼 말이다. 제프리는 마치 강아지 토토처럼 도로시에게 종속되어 있다. 무의식의 세계에 있던 도로시가 의식의 세계에 나타났을 때, 그는 샌디를 옆에 두고 도로시를 택한다. 이는 적어도 '꿈'이 진행되는 동안 그가 철저하게 도로시에 묶여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마치 주인 도로시와 애완견 토토의 관계처럼) 그리고 이 토토(제프리)는 <오즈의 마법사>에서 거대한 장막 뒤에 숨어있던 키 작은 마법사 오즈를 밝혀냈던 거처럼 장롱에 숨어 프랭크의 존재를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의식과 무의식이다. 의식은 수면 위로 나타나지만 무의식은 깊은 이성의 끈에 묶여 꿈이나 환상으로 나타난다. 제프리에게 도로시와 프랭크는 마치 무의식의 세계처럼 다가오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의식, 바로 현실이 이 무의식의 것들을 가리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또 하나 주목할 인물이 있다. 바로 샌디의 아버지 형사 윌리엄이다. 윌리엄은 이 사건에 대해 대략적인 실체를 파악하고 있지만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정의를 지켜야할 그가 한 발 물러서 사건을 지켜만 보는 건 현실에 대한 자신의 의식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트윈 픽스2>의 결말을 생각해 보자. 결국 악령은 주인공에게로 들어간다. 이유가 뭘까? 그건 그가 현실이라는 안정과 평안을 깨고 불안과 공포라는 꿈을 현실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무너진 균형은 인간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생각해 보라. 사람들은 알고 있다. 댓글 알바가 있다는 것을, 세월호 사건의 피해자 유가족들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을,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자유한국당 전원이 한통속으로 나라를 어지럽혔다는 것을. 하지만 이 사실을 의식적으로 강하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두려운 것이다. 사실이 드러나면 그것을 현실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나 이것이 드러나기 전까지 사람들은 그 진실의 공포와 불안 때문에 표면으로 들춰내는 걸 꺼려한다. 이 작품에서도 도로시가 처한 악몽은 마을 사람들에게 꿈이며 무의식이다. 받아들이기 싫은 부분이다. 그래서 제프리는 무의식에 빠져갈수록 점점 다치고 고통 받으며 망가져 간다. 그래서 모든 사건이 끝났을 때 마치 꿈과 같은 기분이 든다. 다시는 꾸지 않았으면 하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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