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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의 생태주의 그리고 봉준호

영화, 그리고 세상 - 6. <옥자>

가끔 이런 친구가 있다. 남들은 다 좋은 놈이다, 정말 재밌다, 착하다, 너무 좋다고 칭찬하는데 나한테는 별로인 녀석이. 봉준호 감독은 나에게 그런 느낌으로 다가온 감독이었다. 남들은 다 대한민국 최고의 감독이라고 칭찬하지만 나에게는 <살인의 추억>을 제외하고는 그리 재미있는 작품이 없었던 감독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볼 때마다 이 생각만은 확실하게 들었다. 헐리웃에서 통할 수 있는 한국의 감독 세 사람을 뽑자면 박찬욱, 김지운 그리고 봉준호라고.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봉테일'이라고 불릴 만큼 섬세하다. 캐릭터 하나하나에 있어, 장면 하나하나에 있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그가 가진 독창성은 세계적인 거장들과 비교해도 꿀릴 것이 없다. 하지만 이 독창성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장면마다 포인트가 강하고 익숙한 느낌이 없다 보니 이질적인 색이 강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이 작품, <옥자>도 상당히 걱정스러웠다.

<옥자>의 줄거리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네티즌들은 이구동성 이런 말을 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일지 감도 안 잡힌다' 이 작품이 가진 내용은 참으로 독특하다. 그래, 정말 독특하다. 미국의 글로벌 기업 미란도 코퍼레이션이 슈퍼돼지를 만들고 이 돼지를 전세계에 보낸다. 10년 후, 이들은 다 큰 슈퍼돼지를 다시 미국으로 데려와 슈퍼돼지 콘테스트를 개최한다. 10년간 슈퍼돼지 옥자와 형제자매처럼 지낸 시골소녀 미자는 갑자기 옥자가 미국으로 가게 되자 당황스러워 하고, 옥자를 찾아오기 위해 도시로 내려온다. 이 과정에서 비밀 동물 보호 단체인 ALF와 엮이는 미자. ALF는 옥자를 미국으로 보내 미란도 코퍼레이션이 진행 중인 극비 프로젝트의 비밀을 폭로할 계획을 세운다. 정말, 정말 독특한 스토리다. 많은 영화들이 독특함을 보여주지만 <옥자>는 그 색이 다르다. 왜냐하면 이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 자체가 익숙하면서도 거리가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생태주의. 그것도 아주 동양적인 생태주의를 이 작품은 말하고 있다.

생태주의는 환경주의와 그 결을 달리한다. 환경주의가 인간의 입장에서 환경을 보호해야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생태주의는 인간도 환경의 하나의 구성원이며 생태의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인간중심의 세계관에서 완전히 탈피해 인간과 다른 생명체들을 동등한 입장으로 보는 것이 생태주의이다. 하지만 이 생태주의 사상은 표현에 있어 쉽지 않다. 여자가 남자를 이해하지 못하듯 인간이 생태계를 동등한 입장으로 이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인 생태주의 문학을 찾자면 박지원의 <호질>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호질>은 인간이 아닌 호랑이의 시점에서 호랑이가 인간을 꾸짖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인간이 중심이 되어 자연을 파괴한 자신들의 행동을 자성하는 게 아니라 호랑이라는 동물을 통해 교만함과 잔혹함을 호되게 혼내는 것이다. 이는 자연은 그대로 있고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성도 인간이 해야 한다는 시점을 벗어난다. 생명은 다 같기에 다른 생명의 시점에서 인간을 이야기하는 것, 자연의 모든 것은 함께 살아가기에 서로 소통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생태주의다.

<옥자>의 사건은 옥자라는 유전자 조작 돼지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직접적인 사건의 시작은 산에서 살던 옥자를 미란도 코퍼레이션 직원들이 데려가는 부분에서 시작된다. <호질>에는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인간들은 우리 자연을 침범했으면서 우리가 자기들 영역을 침범하자 악한 동물로 규정하고 대한다는 부분이. 옥자와 미자는 그들의 영역이 있었고 이 영역을 침범한 건 미란도 코퍼레이션이다. 하지만 미자가 옥자를 찾기 위해 그들의 영역을 침범하자 그녀는 적으로 규정된다. 영역은 침범한 건 인간이지만 그 인간에 피해를 끼치면 인간은 보복한다. 이는 자연과 인간이 오랜 시간 가져온 불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불화의 원인은 인간이라는 종이 가지는 돌연성 때문이다. 인간은 다른 종들에 비해 너무 약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몸을 보호할 어떠한 무기도 몸에 가지고 있지 않다. 헌데 뛰어나게 좋은 두뇌와 자신들끼리 뭉칠 줄 아는 사회성은 그들을 가장 강한 집단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들은 약하기 때문에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과한 폭력을 휘두른다. 그들이 살 공간을 넓히기 위해 자연의 공간을 파괴하고, 그들을 야생동물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죽이고 가둔다. 그리고 넘치게 먹기 위해 땅을 혹사시키고 유전자를 조작한다. 작품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유전자 조작.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런 선택을 하게 되고, 이는 생태계의 구조상 가장 약한 인간이 가장 강한 존재가 되었기에 생기는 비극이다.

봉준호 감독은 이 비극을 세 가지 시점에서 응시한다. 첫 번째는 시골소녀 미자, 두 번째는 글로벌 기업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루시 미란도와 동물 애호가 죠니 박사, 세 번째는 비밀 동물 보호 단체 ALF의 제이다. ALF 멤버들과 제이는 <호질>로 비유하자면 호랑이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들은 인간의 잘못된 행동을 꾸짖으며 동물들을 자연으로 돌려 보내려는 존재들이다.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루시와 죠니는 열녀와 북곽 선생에 가까운 인물들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열녀, 청렴한 선비인 척 하면서 방 안에서 서로의 몸을 탐하는 두 인물처럼 환경보호(루시), 동물애호(죠니)를 내세우나 뒤로는 유전자 조작 식품을 통해 많은 돈을 헤쳐먹으려는 인물들이다. 미자는 작품이 말하는 핵심인 생태주의를 상징한다고 보여지는 인물이다. 작품 초반, 옥자의 도움으로 절벽에서 떨어지려는 미자를 구하는 장면은 인간과 동물이 서로의 '역할'이나 '계급'을 나누지 않고 '함께' 살아간다는 점에서 그들의 관계가 가지는 의의를 잘 보여준다.

ALF는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동물원에서 동물들을 풀어주고 인간이 동물들을 혹사하는 것을 폭로, 막으려는 조직이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이기에 가지는 한계점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옥자를 이용한다. 옥자가 고통받는 것을 찍고, 그것을 통해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만행을 알릴 수밖에 없다는 점은 결국 목적을 위해 생태계의 고통을 감수해야만 하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준다. 미란도 코퍼레이션은 환경주의의 입장에서 인간을 바라본다. 그들은 '환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근거는 인간 삶의 윤택함이다. 그들이 유전자 조작 돼지를 만드는 이유는 더 많은 인간이 식량문제를 해결하고 좋은 질감의 고기를 맛보게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 '인간을 위한다'는 이유로 이들은 자신들을 방해하는 같은 인간을 공격한다. 이는 <호질>에서 말한 동물도 하지 않는 짓, 호랑이의 말을 빌린다면 '우리도 같은 종족인 표범은 공격하지 않는데 인간은 같은 종족인 인간끼리 서로 싸우고 잡아먹는다' 라고 말하는 야만적인 성격과 다를 바가 없다.

감독은 결말에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음을 보여준다. 미자와 옥자는 행복을 얻었지만 그걸로 끝이다. 유전자 조작 돼지는 계속 나오고, 미란도 코퍼레이션은 새로운 CEO 아래에서 이 프로젝트를 이어갈 것이며, ALF는 그들이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들이 그 정신을 계승할 것이다. 결국 호랑이가 꾸짖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호질>처럼 이 작품 역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아니, 제대로 된 꾸지람 하나 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봉준호의 <옥자>는 박지원의 생태주의의 완벽한 재림일까? 아니, 만약 그랬다면 난 실망했을 것이다. 봉준호는 감각이 있는 감독이다. 그가 <호질>에서 보여주었던 생태주의에 머무르는 것은 결국 과거의 재현을 위해 현재의 시점을 포기하는 수준에 머무르게 된다. 그는 과거와 현재의 달라진 점을 '이름'을 통해 보여준다. 미자가 슈퍼돼지에게 준 이름 '옥자'

'개고기'에 대한 인식을 바꾼 건 사람이 애완견에게 이름을 부여하면서 부터이다. 이름이 없으면 그 존재는 가치가 없다. 우리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은 전쟁은 외우지만, 한 사람이라도 이름을 아는 사람이 죽은 사건에는 큰 감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미자가 수많은 옥자들 사이에서 정신이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 인간이 수많은 복제인간들 속에서 정체성에 의문을 품고 정신이 무너진 것과 달리 버틸 수 있었던 건 '옥자'라는 이름 때문이다. 생태주의의 핵심도 인간관계와 같다고 생각한다. '나와 그것'이 아닌 '나와 너'. 생태계를 지켜야 할, 그리고 보호해야 할 '그것'이 아닌 함께 나아가야 할 '너'로 인식할 때, 진정한 생태주의는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봉준호 감독은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영웅적인 결론이나 긍정적인 해피엔딩은 인간으로 하여금 안도감을 가지게 만든다. 문제에 대한 일방적인 시선을 강요하고 승자에 의해 쓰여진 역사만을 기억하게 만든다. 대신 명확하지 않은 것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나, 너, 그리고 우리 각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함께 나아갈 방향이 무엇인지 모색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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