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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건

영화, 그리고 세상 - 5. <무스탕: 랄리의 여름> <그녀가 떠날 때>


영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시골 섬마을을 배경으로 김복남이라는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마을은 봉건적인 부계 중심의 사회로 복남은 매일 남편에게 개 패듯이 쳐 맞지만 마을 사람들 누구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는다. 부인은 남편의 소유라 여기고 그녀가 맞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같은 여자인 남편의 어머니와 마을 할머니들은 남편의 편을 들며 복남을 더욱 괴롭게 한다. 이슬람 문화는 가부장 적이고 남성 중심적이다. 이슬람의 문제는 종교가 아닌 그들 사회가 결합한 강력한 남성성에 있으며 이를 위해 여성에게 복종과 희생을 강요하는 태도이다. <무스탕: 랄리의 여름>과 <그녀가 떠날 때>. 이 두 편의 영화는 이슬람 문화권 국가인 터키를 배경으로 여성이 가지는 억압에 대해 보여주는 작품이다.

먼저 <무스탕: 랄리의 여름>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 작품은 터키의 수도에서 벗어난 한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부모님이 죽은 다섯 자매는 할머니, 그리고 삼촌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어느 날 학교가 끝나고 남학생들과 같이 어울려 물놀이를 하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들. 헌데 할머니는 그녀들을 한 명, 한 명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심하게 혼을 낸다. 이유인즉슨 그녀들이 남자와 놀았기 때문이다. 처녀를 중시하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남자와 어울린다는 것은 처녀성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큰 문제가 된다. 이 사건 이후로 막내 랄리를 비롯한 다섯 자매는 집에 갇힌다. 하지만 자신이 너무 좋아하는 축구팀을 응원하고 싶었던 랄리는 언니들과 함께 집을 탈출하고 축구장을 향한다. 각자의 방식으로 응원을 즐기는 자매들. 헌데 그들이 응원하는 모습이 TV를 타고 이를 할머니가 보게 된다. 이후 자매들을 놓아준 거처럼 보이는 할머니. 하지만 할머니가 그녀들을 데리고 간 건 여행이 아닌 자매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 할머니는 그녀들을 결혼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슬람에서 결혼이란 ‘속박’의 의미를 지닌다. 이 작품에서의 결혼은 정상적인 연애결혼 혹은 중매결혼과는 거리가 멀다. 중매는 중매지만 선택은 신부에게 있지 않다. 가족들이 자매들을 보고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 결정한다. 그리고 남편의 OK 사인이 떨어지면 신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결혼이 진행되는 것이다. 둘째 셀마는 첫째 소냐가 사랑을 진행 중이었기에 언니를 위해 대신 중매에 나서고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잔혹하게도 그녀는 처녀검사를 받는다. 첫날밤을 보내고 밖에서는 가족들이 대기하고 있다. 그리고 성교 도중 시트를 달라고 한다. 하얀 시트에 피가 없으면 결혼이 파토 나는 것은 물론 심할 경우 가족에 의해 명예살인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다. 헌데 처녀인 셀마에게서는 피가 나오지 않고 신랑과 신부 둘 다 초조해진다. 결국 병원까지 가서 처녀막 검사를 받는 셀마. 

이런 이슬람 문화권 여성들의 결혼생활을 잘 보여주는 영화가 <그녀가 떠날 때>이다. 우마이는 남편의 폭행과 꿈도 희망도 아무것도 없이 살아가는 자신의 삶에 염증을 느낀다. 그녀는 아들 챔과 함께 이스탄불을 떠나 고향인 독일로 돌아온다. 독일이 어디인가? 유럽은 물론 전 세계에서 가장 성숙한 시민의식을 지닌 선진국이다. 이곳에서 그녀는 남편과 그 가족으로부터의 폭력에서 제도적으로 보호를 받게 된다. 허나 문제는 그녀의 가족들이다. 선진국에서 살고 있으면 뭐하나. 우마이의 가족들 역시 여느 이슬람 문화권의 가족들처럼 가부장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 아버지는 그녀와 아들을 남편에게 돌려보내려 하며 우마이의 오빠 마흐멧은 그녀가 가문의 명예를 망쳤다고 생각한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가부장적인 위계구조이다. 한 집안에서 가장 중시되는 것은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폭력을 행사할 수 있고, 자식들의 앞날을 정할 수 있으며 사랑보다는 강력한 계층구조로 자식들을 훈육한다. <그녀가 떠날 때>는 이런 폭력을 보여주는 남성들을 등장시킨다. 우마이가 도망쳐 온 남편, 그녀와 아들을 남편에게 돌려보내려는 아버지, 그녀가 가문의 명예를 망쳤다고 생각하는 오빠. 반면 <무스탕: 랄리의 여름>은 아버지 대신 할머니라는 존재를 등장시킨다. 할머니는 랄리를 포함한 다섯 자매와 같은 여성이다. 그녀도 폭력의 대상이었으며 피해자였다. 하지만 고통을 겪는 같은 여성인 다섯 자매에게 공감이나 연대를 시도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과 같은 길을 가게 만든다. 그녀는 ‘결혼’만이 이 철 없는(할머니의 입장에서) 다섯 자매가 철이 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여긴다. 사회가 쳐 놓은 그물이 그녀들을 잡지 못하자 결혼이라는 목줄을 달려는 것이다. 즉, 이 작품은 이슬람 문화권 여성들의 비극을 남성에 의한 폭력뿐만이 아닌 그들이 만든 전통과 관습에 물든 여성들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을 보여준다. 자매들이 남자애들과 어울렸다는 것을 할머니에게 말한 사람. 그 사람 역시 중년의 여성이었다. 

사회를 얽매는 건 전통과 관습이다. 흔히 기득권, 아버지 세대라 불리는 이들은 이 전통과 관습이 무너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그런 환경에서 살아왔고 그 고통과 역경을 이겨냈다. 헌데 그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잘못된 것이라 부정하고 바꾸려고 한다면 이는 그들을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생각되어지기 마련이다. <그녀가 떠날 때>에서 아버지는 고민한다. 그에게 ‘가족’이란 그가 만든 역사이자 자랑이다. 헌데 딸은 남편을 버리고 아들을 데려온 이슬람 문화권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을 하였다. 즉, 그의 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 하지만 동시에 우마이는 그가 사랑하는 딸이다. 그는 간절한 딸의 사랑을 차마 외면할 수 없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민한다. 자신이 평생 믿고 따라온 자신의 역사와 딸이 쓴, 그리고 앞으로 써나갈 역사 사이에서. 새 직장을 찾고, 새 남자친구를 만나면서 아들과 행복한 딸의 모습에 그의 마음은 더 흔들린다. 그래서 아버지는 옛 집을 찾아간다. 이곳에서 자신의 아버지와 아버지가 만나는 장면은 전통과 관습, 그리고 미래와 사랑 사이의 갈등을 잘 드러낸다.

<무스탕: 랄리의 여름>의 주인공 랄리는 이런 전통과 관습에서 벗어나 미래와 사랑을 그리는 다섯 자매 중에 가장 주체적인 인물이다. 첫째와 둘째가 결혼한 후, 할머니는 셋째 에체의 혼사를 준비한다. 하지만 그 운명을 받아들이기 싫었던 에체는 자살을 택한다. 남들에게는 그저 ‘결혼’이라는 하나의 명제처럼 보이지만 이슬람 문화권의 여성들에게 결혼이란 자신의 모든 주체적인 권리를 내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에체는 모르는 남자에게 삶을 맡기는 것도, 누나들처럼 동생들을 떠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인 자신의 목숨을 내던진다. 이런 사건에도 불구 중매는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넷째 누르의 혼사가 잡히게 된다. 그 사이, 랄리는 자신들을 축구경기장을 향하는 응원차를 잡아준 남성에게 운전을 배운다. 제목 ‘무스탕’이 의미하는 미국 평원의 조그마한 말처럼 어린 소녀 랄리는 ‘집’을 벗어나 ‘평원’으로 달려갈 생각을 한다. 누르의 결혼식 날, 랄리는 문을 잠근다. 밖에서는 가족들이 문을 열라 말하고 누르는 당황한다. 그런 누르에게 랄리는 말한다. 같이 이스탄불로 떠나자고.

두 작품이 가지는 이스탄불의 의미는 묘하게 다르다. 랄리에게 이스탄불은 그녀를 이해해주는 선생님이 살고 있는, 그녀가 집이라는 전통과 관습에 얽매인 공간에서 벗어나 미래를 그릴 수 있는 공간인 반면 우마이에게 이스탄불은 자신의 삶과 미래를 포기한, 그래서 탈출하고 싶은 공간이다. 이 공간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두 여성 감독의 시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터키 출신의 데니즈 겜즈 에르구벤 감독은 터키 내부에서의 변화를 촉구했다고 본다. 그녀는 이스탄불이라는 상징적인 도시를 ‘평원’으로 설정함으로써 터키 내부에서 이미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그래서 공간의 배경을 작은 마을로 설정했다고 본다.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 섬마을을 배경으로 해서 과한 폭력이 이해될 수 있게 만든 거처럼 말이다.) 반면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남편이 터키인인 페오 알라다그 감독은 완전한 문화권의 탈출만이 우마이를 구원해 줄 수 있다고 여긴 게 아닌가 싶다. 

이 두 작품을 감상하면서 떠오른 작품이 있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다. 이 소설에서 조르바는 한 과부를 위해 칼을 든다. 그는 과부를 죽이려는 마을 사람들과 싸운다. 마을의 장로를 비롯한 어른들은 과부를 사랑하던 소년이 자살하자 이것이 과부의 탓이라며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한다. 이 결정에 안절부절 못하는 주인공에게 조르바는 말한다. 노인들의 전통과 관습으로 젊은이들의 운명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내가 생각하는 이슬람 문화권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만든 전통과 관습이다. 흔히 기득권층, 아버지 세대라 불리는 이들은 그들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쓴다. 그들이 겪어온 고통과 역경이 그들에게는 자랑스러운 훈장이며 이것이 잘못되었고 부정된 것이라 인정하는 것은 자신들을 부정하는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녀가 떠날 때>의 아버지, <무스탕: 랄리의 여름>에서의 할머니는 그들의 역사를 부정당하고 싶지 않았기에 젊은이들의 운명을 결정한다. 모든 역사의 비극은 기득권의 이기심에서 비롯되며 이는 미래가 아닌 과거를 지키려는 그들의 의지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슬람 문화권의 문제는 종교가 아니다. 남성중심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려는 그리고 이에 따르는 기득권층 때문이다. 이 두 작품은 이슬람 문화권에서 여성의 삶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젊은이들의 미래를 자신들의 손으로 결정지으려는 전통과 문화에 기댄 기득권층이 있다. 젊은이들을 위해 그들의 미래를 위해 싸운 노인 조르바처럼 사랑과 미래를 위한 사회를 만들어갈 때 세상의 아픔은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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