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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란 예술의 평가기준

데이빗 린치의 <인랜드 엠파이어>를 통한 영화평가에 대한 생각 


데이빗 린치 감독은 화가, 음악가, 작가, 프로듀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미술을 전공으로 공부했는데 그림을 그리는 솜씨가 뛰어나 작품전을 열었을 정도다. 이런 화가의 경력은 그의 영화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초창기 린치의 영화는 스토리와 영상미의 조화가 훌륭했다. <엘리펀트 맨>, <이레이저 헤드>, <블루 벨벳> 등의 작품들은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를 하면서 동시에 시각적인 충격과 재미를 주었다. 가끔 <광란의 사랑>, <블루 벨벳> 등에서 이해하기 힘든 장면들을 보여주었는데 이런 그의 장면들은 일종의 '욕심'처럼 다가왔다. 영상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 스토리의 이해를 잠시 뒤로 미룬 것이다. 이는 <로스트 하이웨이>, <멀홀랜드 드라이브> 같은 작품들에서 잘 드러난다. 색체적으로 뛰어나고 영상미에 있어서 신선한 느낌을 주지만 내용 그 자체의 이해는 상당히 힘들다. 그리고 <인랜드 엠파이어>는 그 절정을 보여준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 이은 헐리웃 이야기. 전작에서 화려한 금발 미인 나오미 왓츠를 주연으로 내세웠던 거처럼 이 작품에서도 헐리웃 여배우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금발의 미인 여배우 로라 던이 주인공 니키로 등장한다. 니키는 <슬픈 내일의 환희>라는 작품에 간절히 출연하길 원하고 있다. 이웃에 폴란드 여자가 이사를 오고 그녀는 니키가 그 영화에 주인공이 될 거라는 거처럼 예언을 한다. 그리고 캐스팅이 된 니키. 그런데 감독이 직접 각본을 쓴 이야기인줄 알았던 작품이 사실은 리메이크작이었다. 폴란드 영화 <47>을 리메이크 했다는 감독. 그런데 그 작품은 개봉하지 못했다고 한다. 촬영 중 두 주연배우가 살해를 당한 것. 니키와 남자 주인공 데본은 대사를 주고 받으며 서로 배역에 몰입하고, 그들이 점점 작품에 몰입될 수록 과거 폴란드에서 겪었던 악몽이 그들에게도 반복된다.


하지만 이 기초줄거리를 제외하고는 영화의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기는 상당히 힘들다. 상징적인 의미만 해도 해석하기 힘든데 영상과 편집이 불친절함을 뛰어넘어 자신들의 '미학'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먼저 영상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데이빗 린치 감독은 색체와 영상에서의 포인트를 상당히 잘 잡아내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의 장면 하나하나는 인상적이며 색체가 주는 강렬함이 상당하다. 21세기, 디지털 영상의 시대가 다가오면서 린치 감독은 변화를 시도한다. SONY DSR-PD150을 사용하여 3년 동안 촬영을 했다. 그래서 영상이 주는 느낌이 기존의 그의 작품들과 차이를 준다. 그는 이 기법을 통해 좀 더 사실적인 공포를 시도한다. 적어도 3시간의 상영시간을 관객들이 견뎌야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알기에 즐길 수 있는 요소를 준다. 그것이 미스터리 스릴러의 요소를 십분 활용한 공포다. 그는 이 분위기를 연출해내기 위해 이런 촬영법을 택하였고 이는 꽤나 유효했다. 적어도 분위기 연출에는 성공했으니 말이다. 즉, 그는 스토리가 아닌 영상을 통해 분위기 구축에 성공한다. 영상적인 미학을 제대로 살린 것이다.

다음은 편집이다. 군더더기가 없다. 딱 할 이야기만 하고 빠진다. 편집의 가장 큰 미학은 관객의 '이해'가 아니다. 불필요한 장면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이 이에 실패한다. 관객을 위한 배려 때문이다. 더 많은 장면을 보여줘야만 관객은 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겉으로 이해하기에는 가장 잘 된 편집이란 이야기를 매끄럽게 이끌어가는 편집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편집 그 자체의 미학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장면이 깔끔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즉, 만화책처럼 장면장면마다 꼭 필요한 정보만을 담아 풀어내는 것이 가장 좋은 편집일 것이다. 그렇다면 린치 감독이 이 작품에서 포인트를 둔 부분은 무엇일까? 난 그것이 '영상미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작품에서 또 헐리웃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것도 결이 비슷한 이야기를. 하지만 작품은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연장선이라는 느낌이 전혀 없다. 영화 자체가 주는 세련된 느낌은 없지만 공포와 본질에 다가서는 느낌은 더하다. 또 장면에 있어 영화가 아닌 예술의 시도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든다.


이후 <트윈 픽스3>를 생각했을 때, 린치 감독에게 중요한 건 '스토리'라기보다는 영화 그 자체의 본질에 가까운 '영상예술'이라는 것이 이 작품이 가진 의의라고 생각한다. 초창기 영화의 경우 대사를 할 수 없었기에 셔레이드가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다. 이후 무성영화 시대를 벗어나면서 영화는 '스토리'라는 것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영화를 판단하는 가치는 스토리에 쏠리기 시작했고 내용이 내포한 의미, 내용이 주는 의미가 영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어버렸다. 린치 감독은 이에 고민하듯 영화가 가진 본질적인 의미인 '영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용은 영화가 진행되기 위한 과정일 뿐, 중요한 건 영상을 보고 관객이 그 분위기와 화면에 취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시도(이후 <트윈 픽스3>까지 이어지는)에는 개인적으로 아쉬운 느낌이 따른다. '이해할 수 없는 예술이 과연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가' 이 질문은 모든 예술이라는 완성품에 붙은 질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미술의 경우 대중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작품에 사람들은 등을 돌리고 그들만의 문화가 되어버렸다. CGV에 영화를 보러 갈 때면 나오는 광고가 있다. 전시관에서 여자친구는 그림들을 보며 자신의 예술적인 감상을 나열하고 남자는 이해하기 힘든 그림과 그걸 보고 감탄하는 여자친구에게 지루함을 느낀다. 그리고 나타난 '못' 여자는 못을 보고 감탄하며 말한다. '그래, 이게 내가 여기 온 이유야! 결국 이 화가는 고통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야!' 하지만 그 못에 그림이 걸리고 여자는 뻘쭘한 표정을 짓는다. 이해할 수 없는 예술은 오독을 낳고 궤변에 싫증을 느끼게 만든다. 이해하지 못하는 예술작품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이해를 하지 못한다면 그건 그 사람의 수준 문제인가? 어려운 작품만이 인정을 받는다면 결국 가장 잘 만든 작품은 철학적인 의미를 내포한 작품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예전에 한 영화감독에게 영화수업을 받을 때 <퐁네프의 연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 작품은 단 두 작품으로 거장으로 떠오른 레오 까락스 작품의 기대작이었고 엄청난 투자를 받았다. 심지어 촬영 장면이 TV에서 생중계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과는 대실패였다. 그 감독은 이런 말을 했다. '아무리 잘 만들면 뭐해요? 영화라는 게 대중들이 이해하고 즐길 수 있어야 하는 건데' 영화를 평가하는 건 결국 대중이다. 이 감독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무리 잘 만들어도, 평론가들이 극찬을 해도 관객들이 내 영화를 보고 '이게 뭐여?' 한다면 그건 실패한 것이다. 그래서 난 이 영화에 대한 남다은 평론가의 평이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이 작품에 0점을 주었다. '한번 보고 별점 매길 수 있는 자는 천재이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그의 이 평은 평론가들을 저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평론가는 영화를 '분석'하는 사람이다. 헌데 이런 사람들이 '이해'를 하지 못하면서 '오, 이 영화 느낌 있어!' 라면서 높은 점수를 주는 건 일반 관객들이 느낌으로 평을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는 앞서 말한 현대미술과도 같은 문제다. 그저 감독, 그리고 작가를 들먹이면서 '이 사람은 이런 걸 의도한 거야!'라고 말하며 높은 점수를 주는 것. 이해는 전혀 하지 못하고 그 이해로 관객을 설득하지 못하면서 평론가라는 직함에 숨어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것. 과연 여러번 봐도 이 영화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해하기 힘든 이 영화는 졸작인가? 영화는 영상이다. 뤼미에르 형제의 최초의 영화는 그저 장면을 찍는 거에 불과했다. 셔레이드로 이루어진 영화의 경우는 스토리보다는 영상에서 보이는 미장센, 그리고 배우의 표정과 몸짓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내 영화평의 경우 몇몇 분들은 싫어한다. 그 이유는 영화를 너무 스토리 그 자체만으로 평가하고 분석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텍스트'만으로 이루어진 작품이 아니다. 이 속에는 영상이 있고, 음악이 있으며, 또 배우가 있다. 그런데 그 모든 요소들을 무시한 채 스토리만으로 영화의 가치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은 최초의 영화에 대한 배신이며 오늘도 컷 하나하나에 미장센을 고민하는 감독들에 대한 모욕이다. 난 이 문제가 함부로 평가를 내릴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해두고 싶다. 뭐가 되었건 확실한 이해가 되지 않은 감상을 평론가가 함부로 이야기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감상의 사전적 의미에는 '이해'가 포함된다. 이해가 되지 않은 감상을 과연 제대로 된 '감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본 게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빈 여백은 여백으로 남겨두는 것도 하나의 미학이다. 굳이 구차하게 공감이 가지 않는 궤변을 늘어놓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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