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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풍금이 있던 자리>

한 여자가 남자에게 편지를 쓴다. 그녀는 고향에 내려와 있고 선택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 자신과 함께 떠나자는 남자. 그는 유부남이다. 그녀는 그 남자와 불륜 관계다. 고향에 내려온 여자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태어난 송아지를 보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어린 시절, 위로 오빠 둘에 아래에 막둥이까지 있던 그 집에 새하얀 얼굴을 가진 고운 여자가 온다. 전형적인 시골 여자였던 어머니의 모습만을 봐왔던 그녀는 여자에게 끌리고 그녀를 따라다닌다. 그리고 그날 큰오빠는 화를 낸다. 그 여자랑 어울리지 말라고. 그 여자가 사라져야 엄마가 돌아온다며 동생들을 교육시킨다.


그녀는 그 여자가 좋았다. 대충 수건을 깔아둔 아기 이불을 예쁜 병아리 색깔의 노란 이불로 바꿔놓고 김치와 볶은 콩이 전부였던 오빠들의 도시락을 볶음밥과 계란 후라이로 바꿔놓은 그녀를 좋아했다. 여자는 그녀를 알아봐 주었다. 형제들 사이에서 유일한 여자였던,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그녀를 발견해 준 것이 그 여자였다. 그녀는 어렸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혼을 생각할 만큼, 그 여자가 어머니에게 얼마나 몹쓸 짓을 했는지 생각할 만큼 성숙하지 않았다. 그냥 자신을 알아봐 주는 그 여자가 좋았다.


세월이 흘러 그녀는 그 여자와 같은 위치에 서게 되었다. 비오는 날 우연히 만난 한 남자, 그리고 맺게 된 불륜의 관계. 남자는 그녀에게 떠나자고 제안한다. 그녀는 생각한다. 이웃의 점촌 댁을. 다리를 다쳐 살이 찐 사이, 남편이 바람을 피자 아픈 다리로 줄넘기를 해대던 그녀를. 그리고 생각한다. 에어로빅 학원의 수강생을.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고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던 그녀를. 그리고 떠올린다. 담담했던 엄마를. 울고 불며 난리를 피우는 것이 아닌 아버지를 만나고 조용히 집을 떠나던 뒷모습을.


그 여자는 툭하면 이를 닦았다. 치약을 가득 짜서 이를 닦던 그 모습을 그녀는 따라했다. 그녀의 자세를 고쳐주기 위해 온 그 여자의 눈에서 그녀는 눈물을 보았다. 여자는 견뎌왔던 것이다. 자식들이 주는 모욕을,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모멸감을. 그저 아버지를 향한 ‘사랑’으로 견뎌왔던 것이다. 아버지는 정말 그 여자를 좋아했다. 너무나도. 그래서 여자는 입에 칫솔을 물고 울음을 참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를 본 순간, 여자는 느꼈을 것이다. 그가 가한 ‘폭력’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말이다.


그녀는 여자와의 마지막을 떠올린다. ‘나처럼 되진 마’라고 말하며 떠나간 여자. 아침 일찍 나갔다 칫솔을 가져다주기 위해 따라온 그녀를 보고 눈물을 흘리던 그 모습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세상이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폭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는 이’가 먼저 주먹을 거두어야만 한다. 폭력을 행사하고는 ‘네가 맞은 건 이유가 있어서야’라는 이유로 쌍방을 주장한다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사회가 어지럽고 더러워지는 이유는 ‘손뼉도 손바닥이 맞아야 소리가 난다’는 이유로 양쪽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행태 때문이다. 그러니 폭력을 행사하는 쪽은 명분을 얻고 양심을 잃는다.


그래서 이 작품의 결말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 만약 그녀가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이 결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옛 추억이 담긴 공간이기에, 여성에 대한 억압과 남성우월성이 강조되었던 옛 시골이었기에, 그 여자가 나에게 당부한 말이 있었기에 그녀는 자신이 행할 잘못된 행위를 멈추었다. 그녀가 남자의 집에 전화를 걸었을 때, 남자의 가정이 평화롭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생각했을 것이다. 한 개인이 가진 이기심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자신이 가진 욕심 하나만을 버린다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워질 수 있는지. 돌아온 고향에서 만난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어미 소에게서 태어난 아기 소에서 그녀는 보았던 것이다. 


이 작품이 가지는 가장 큰 의의는 가해자의 시선에서 가해자 스스로가 자신이 행한 잘못된 행위를 멈춘다는 점이다. 타인의 아픔을 알 수 있다는 점, 자신이 그 입장이 아님에도 자신의 행동을 통해 고통 받는 사람이 나올 수 있다는 걸 인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세상이 더 나아지기 위해서는, 갈등과 아픔을 이겨내고 통합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이 먼저 멈추어야만 한다. 


+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약간 억지가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되는 나만의 해석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송아지 부분에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걸까 많은 생각을 하였다. 포유류가 새끼를 낳는 과정은 힘든 고통의 과정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포유류의 생명의 ‘탄생’은 흔히 축복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이 새끼를 통한 가족의 완성은 오랜 포유류의 역사가 만들어 온 법칙처럼 굳어졌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라고 본다.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대를 잇는 것이며 이는 생명의 탄생이라는 엄숙하고 성스러운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래서 가족의 의미는 사랑보다 앞선다고 본다. 사랑이 감정이라면 가족은 인류, 그 인류를 넘어서 포유류가 새겨온 역사에 항거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가 남자의 집에 전화를 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이 부분에서 그녀는 남자의 집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안다. 감정은 순간이다. 순간이 지나면 현실이 보이고 이 현실은 인류가 만들어온, 옳은 방향이라 여기고 만든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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