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회복하는 인간>
‘당신에게는 몇 개의 상흔(傷痕)이 있습니까? 만약 하나도 없다면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인가요?’
누군가 당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말을 할 수 없다. 상처란 거, 고통이란 거, 남들도 다 가지고 있지만 막상 내 아픔을 꺼내놓기는 싫다. 놀림감이 될 까봐, 조롱을 당할 까봐, 동정에 찬 눈빛을 받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상처, 상처라는 이름 그 자체가 너무 아프기 때문이다. 나 혼자 품고 있기도 아픈 그 고통을 밖으로 내세우기 싫은 것이 인간이다.
그녀는 한의원에서 화상을 입는다. 정말 별 거 아닌 일. 뜸을 두다 실수가 있었고 그녀는 그대로 뛰쳐나온다. 자신의 상처에 대한 그 어떤 책임을 묻거나 불만을 토해내지 않은 채 그저 상처를 간직하고만 있다.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덧나’라는 주변의 조언에 따라 병원에 간 그녀. 병원에서 그녀는 며칠을 그대로 두었다가 심해진 화상 자국을 보게 된다. 화상을 치료하는 과정은 고통스럽다. 부위에 자극을 주고, 또 줘서 상처를 치료한다. 차라리 치료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 화상을 지우는 방법이다. 이 치료를 받으면서 그녀는 기억 속 한 사람을 생각한다. 그 사람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그녀의 언니다.
언니는 그녀와 달랐다. 똑똑하고 아름다웠으며 생기가 넘쳤다. 그녀의 평범함-보통의 자랑할 것이 없는-과 달리 언니는 특별했다. 하지만 언니는 그녀를 부러워했다. 마치 자신이 가진 모든 무기가 다 부질없고 허무한 것이라는 듯이 평범한 그녀를 부러워했다. 언니는 병에 걸렸다. 죽음을 앞둔 병. 그녀와 언니 사이의 따뜻한 정, 자매로 묶인 피가 뜨거워지고 함께 고통을 나누는 아름다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언니는 나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함께 병원에 찾아갔던 그 순간 이후 언니는 나를 무시한다. 그리고 죽은 언니의 아픔은 나에게 그대로 남게 된다. 나는 언니와 ‘행복한 이별’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언니를 사랑했다. 이 세상 누구보다. 한 부모의 배에서 태어났고, 같은 피가 흐르며, 항상 자신을 챙겨주고 사회인으로 정착하기 위해 도움을 준 언니를 그 누구보다 마음으로 품었다. 헌데 언니는. 언니는 그런 동생의 마음을 배신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극진한 병간호는 받아들였지만 동생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마음’은 그녀에게 상처로 남았다. 왜 언니는 이런 상처를 남긴 걸까? 자신의 죽음이 고통스러워서? 그 아픔을 견디다 못해 동생에게 화를 푼 걸까? 언니가 부러워했던 건 건강한 동생의 육체였을까? 그녀가 가진 모든 장점, 뛰어난 머리와 아름다운 미모는 죽음이라는 강력한 운명 앞에서 무력하다는 것을 알고 동생에게 시기와 질투를 느낀 것일까? 아니, 아닐 것이다. 언니 역시 동생을 사랑했다. 그녀는 사회에 나가는 동생을 위해 옷을 골라주고-비록 동생은 그 옷을 사지 않았지만- 병원에서 판정을 받았을 때도 동생을 데려갔다. 하지만 언니는 말할 수 없었다. ‘조금 먼저 갈 테니 이해해 줄 수 있겠니?’ 이 말을 하기 무서웠을 것이다. 생을 마감하는 사람과 남겨지는 사람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한다. 떠나는 사람은 자신 때문에 남겨진 이들이 고통 받을 것이 두렵다. 먼저 가버린 자신을 생각하느라 잠을 못 이루고 정신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피폐해지는 모습으로 남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잊어버리길 바란다. 자신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길 원한다. 하지만 남겨진 사람들은 잊어버리는 걸 두려워한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 기억 속에서 떠나간다면, 그 아름다웠던 추억들을 다 잊어버리고 얼굴마저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건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노력한다.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 아니, 사랑했던 순간을 영원히 기억 속에 간직하기 위해서.
언니는 동생이 자신을 잊길 바랐을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을 남기질 않았다.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이 기억 속에 남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그 선택은 남겨진 사람에게는 가장 큰 고통의 선택이었다. 동생은 알 수 없었다. 언니가 자신을 왜 부러워하는지 알 수 없었던 거처럼 왜 언니가 자신을 멀리했는지. 그 알 수 없는 이유는 그녀에게 상처로 남았다. 그리고 그 상처를 남긴 사람은 떠나버렸다. 몸의 상처는 그 흔적마저 말끔하게 지워버릴 수 있지만 마음의 상처는 지울 수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앙금’이라는 것이 남는다. 좋은 추억을 쌓아도, 매일 대화를 나눠도, 오해라는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마치 지독한 화상자국처럼.
관계라는 것이 그렇다. 쉽게 상처를 받고 상처를 입는다. 내가 배려라고 한 행동이 상처가 될 수 있고 상대방이 의도 없이 내뱉은 말이 치부(恥部)를 찌르기도 한다. 몸에 생긴 이런 조그마한 상처는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이면 말끔히 치료된다. 하지만 마음은 다르다. 상처의 원인을 알 수 없고, 진단할 수 없다. 상처를 입힌 사람에게 그 책임을 지라 말할 수 없고, 의사에게 찾아가 진료를 받을 수도 없다. 그녀는 자신이 왜 상처를 받았는지, 언니가 무슨 상처를 주었는지, 이 상처를 왜 치료할 수 없는 것인지 설명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내뱉는 퉁명스러운 말에 상처를 받았지만 그 이유를 명확하게 말할 수 없는 거처럼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화상처럼 명확하게 밝힐 수 없다.
이 작품은 몸과 마음의 상처를 대조시켜 ‘회복하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몸<->마음, 화상<->마음의 상흔, 뜸<->언니는 서로 대조를 이룬다. 몸과 마음은 상처를 받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몸은 드러나고 치료될 수 있는, 하지만 마음은 드러나지 않고 치료될 수 없다는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화상과 마음의 상흔은 치료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 치료의 과정이 정말 고통스럽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화상이 상처를 꺼내고 다시 꺼내는 치료를 거친다면 마음의 상흔은 숨기고 또 숨기는 과정을 통해 치유된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상흔을 회상하지만 다른 이에게 이 기억을 꺼내놓지 않는다. 뜸과 언니는 둘 다 나에게 상처를 준 존재다. 뜸은 육체에 언니는 마음에. 이 두 대상의 또 다른 공통점은 상처를 치유하려다 더 큰 상처를 주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다리의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 뜸을 두었고 오히려 상처에 직접적으로 두는 방식으로 인해 더 큰 상처를 입었다. 언니는 그녀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녀를 이끌어준 존재다. 자매는, 핏줄은 질기고 단단하다. 그녀가 언니를 누구보다 사랑했다는 건, 그만큼 정신적으로 의지했다는 의미기도 하다. 헌데 언니는 마지막 순간 그녀에게 상처를 남기고 떠나갔다. 자신의 육체적인 고통을, 정신적인 고통을 나누기 싫어-혹 그것이 동생에게 트라우마로 남을까봐 두려워 택한 행동은 오히려 그녀에게 깊은 상흔으로 남았다. 마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뜸을 맞으러 갔다가 더 큰 상처가 남은 거처럼.
이 작품의 제목인 <회복하는 인간>의 의미는 반어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사회성을 가진 동물인 인간의 삶은 상처의 연속이다. 사람을 통해 얻는 즐거움이 있다면 그 반대의 감정인 고통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고통은 마음에 상처를 남기고 또 남긴다. 설혹 이 상처가 완전히 나아 상흔이 된다 하더라도 이 상흔이 또 찢겨 치유되길 기다린다. 아니, 어쩌면 인간이 가진 마음의 상처라는 건 영원히 나을 수 없는 화상자국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고통의 감정은 지나갔다고 하지만 지워지지 않은 흉터를 보면 그때의 아픔이 다시 떠오르는 거처럼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다시 떠올리면 고통이 피어나는 상처일지 모른다. 결국 인간은 회복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상처는 지워지지 않고 반복되며 또 재생되고 덧입는다. 하지만 회복하지 않는다면, 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녀의 깊어진 화상자국처럼 더 큰 고통을 야기한다. 회복이란 선택이 아닌 필수요, 삶의 과정이다. 어쩌면 인간에게 상처란, 마음에 남은 상흔이란, 그리고 이를 지우기 위한 회복의 과정이란 끝없는 순환이요, 인간이기에 짊어져야할 고통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