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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제목, 다른 '마더'

봉준호 감독의 <마더>와 넷플릭스 오모리 타츠시 감독의 <마더

어머니의 사랑인 모성애는 특별함을 지닌다. 자식을 향한 헌신은 종교에서 말하는 절대적인 사랑인 아가페와 같다고 한다.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는 아버지와의 관계와 중요한 차이점을 지닌다. 어머니는 자식과 일정 기간 몸을 공유한다. 자식은 태아일 때 부모의 몸 안에서 함께 생활한다. 어머니에게 자식은 자신의 일부이며 분신과도 같다. 예술에서 모성애는 뜨거운 사랑과 절대적 헌신으로 그려진다.

 

여기 같은 제목을 지닌 두 편의 영화가 있다. 두 작품 모두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를 그리지만 모성애의 방식에 있어 차이를 보인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는 모성애의 잔혹한 변형을, 오모리 타츠시 감독의 <마더>는 모성애의 상실로 인한 새로운 관계의 설정을 보여준다. 모성애는 인간이 태어나 처음 받는 사랑이다. 이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관계에 있어 뒤틀린 모습을 보여준다.

 

두 편의 <마더>는 사랑을 가장한 이기적인 모성애를 보여주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사랑 속 망가진 아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차이점이라면 봉준호가 그려낸 ‘마더’는 모성애가 지닌 책임감에 사로잡힌 인물이란 점이고, 오모리 타츠시의 ‘마더’는 가족 내에서 새로운 관계설정을 통해 모성을 떨쳐내고자 한다는 점이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마더

 

가끔 뉴스를 보다 보면 ‘가족 집단 자살’ 소식을 듣곤 한다. 이런 선택은 대부분 가장에게서 비롯된다. 가장이 가정을 지킬 자신이 없으니 다 같이 죽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이는 남겨질 가족에 대한 책임이 온전히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가족 구성원 개개인을 하나의 객체로 보는 게 아닌 거대한 집단으로 간주한다. 가족은 운명공동체라는 생각에 어린 자식에게도 같은 운명을 심어주고자 한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에서 어머니 역의 이름은 따로 등장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엄마’다. 태어난 순간부터 엄마로 있었던 거처럼 본인의 이름이 없다. 도입부에서 엄마는 아들 도준에게 줄 약을 준비하다 손을 다친다. 아들이 밖에서 무슨 일을 겪었다고 생각해 급하게 나오려다 실수를 한 것이다. 칼날에 흐르는 피는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잔혹함과 함께 피보다 진한 모자(母子)의 사랑을 암시한다.

 

도준은 남들보다 지능이 모자라다. 28살의 나이에도 생각과 행동은 유치원생 수준이다. 자살한 사고를 치고 다니는 아들을 챙기느라 엄마는 바쁘다. 그런 도준에게 최악의 사건이 발생한다. 한 소녀가 살해를 당하고 그 범인으로 도준이 몰린다. 시골 동네에서 약재상을 운영하는 엄마는 힘도 돈도 없어 스스로 범인을 잡고자 한다. 진범만 알아내면 아들이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범인을 찾아나서는 엄마의 모습은 면회 장면에서 예기치 못한 변화곡선을 그린다. 도준은 어린 시절 엄마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초반과 후반 도준은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어리숙하고 덜떨어지며 멍청했던 도준은 후반부에는 이런 면이 다소 사라진다. 오히려 재빠르고 교활한 면모도 보인다. 감옥 안과 밖에서 도준이 지니는 차이는 하나뿐이다. 바로 약이다.

 

엄마를 움직이는 모성애의 감정은 죄책감이다. 가족을 책임지지 못했다는 생각에 평생 속죄의 마음을 지니고자 한다. 엄마가 무리해서 형사 대신 수사를 벌이고, 점점 더 잔인한 면모를 보이는 건 따뜻한 사랑이 아닌 두려운 죄책감의 감정이기에 가능하다. 이 죄책감이 얼마나 두렵게 느껴졌는지 엄마는 자식의 성장마저 막는다. 도준은 엄마에 의해 아픈 기억을 간직하기 전으로 돌아간다. 도준에게 어긋난 유토피아를 선사한 것이다.



부모는 자식의 성장을 두려워한다. 자신이 어른이 되어가면서 느낀 고통과 아픔을 자식이 똑같이 겪을 걸 알기에 마음 한 구석에 걱정을 품고 산다. 만약 자식이 성장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영원히 부모 품에서 살아간다면, 육체는 힘들지 몰라도 정신은 행복할지 모른다. 천방지축 도준의 모습은 엄마를 힘들게 만드는 거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엄마가 원했던 아들의 모습일지 모른다.

 

엄마가 범인을 잡아야 했던 이유는 아들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과 직결된다는 점에 있다. 도준이 기억을 되찾고 성장하게 된다는 건 자신을 떠나간다는, 또는 엄마의 위에 설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 순간을 원하지 않았던 엄마는 필사적으로 범인을 찾는다. 이 과정에서 잔인하게 변해가는 엄마의 모습은 더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싶지 않다는 외침과 같다. 엄마는 자신의 방식으로 구축한 모성애를 지키기 위해 분투한다.

 

영화의 결말에서 기억을 잃는 건 도진이 아닌 엄마가 된다. 이는 아들이 성장했고, 결국 엄마는 늙을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아이와 노인은 같다. 육체적·정신적으로 누군가의 보호를 받아야만 한다. 아이 같던 도진이 사라지자 엄마는 노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이 과정에서 모성애의 원동력이었던 죄책감을 지우려는 모습을 보인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끈질기게 잡고 있던 그 감정에서 엄마가 해방된 순간, 햇살이 비치고, 관광버스 안에서 춤을 추는 영화의 명장면이 펼쳐진다.



애정을 받고자 하는 마더

 

근 몇 년간 일본의 사회적 문제는 가족의 붕괴다. 안정적인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가정 역시 마찬가지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부부는 자식을 낳아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 아동폭력과 방치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이유다. 오모리 타츠시 감독의 ‘마더’는 무책임한 엄마의 모습을 담는다. 이 과정에서 일반적인 영화와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 바로 모성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정한 사건을 통한 모성의 상실이나, 온갖 무책임한 행동 속에서도 결국 모성은 남아있다는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엄마인 아키코와 아들 슈헤이의 관계는 모자(母子)보다 친구에 가깝다. 아키코는 슈헤이에게 곤란한 부탁을 하는가 하면, 아들을 이용해 가족들에게 돈을 요구한다. 주어온 자식들에게 먹고 살기 위해 도둑질을 시키는 <어느 가족>의 설정과 비슷해 보이지만, 그 목적이 다르다.

 

<어느 가족>의 경우 가족 구성원 전원이 일을 한다. 그들은 일종의 대안 가족이고 그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에게 헌신한다. 그들은 각자가 맡은 아버지 또는 아들의 역할에 충실하며 서로에 대한 사랑을 품고 있다. 그래서 아버지 역의 오사무는 아들 역의 쇼타에게 도둑질은 시키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를 바라진 않는다. 동시에 사랑을 주고 아들을 책임지는 아버지의 면모를 보여준다.




반면 아키코는 슈헤이를 애완동물처럼 여긴다. 애완동물에게는 역할이 주어진다. 주인을 즐겁게 해줘야 한다. 슈헤이는 애완동물처럼 예쁨 받기 위한 역할에만 충실하다. 그리고 아키코는 그런 슈헤이를 이용한다. 놀랍게도 이 작품의 구성은 삼각관계와 비슷하다. 아키코는 호스트인 료를 좋아한다. 료 때문에 도망자 생활을 하고, 폭력을 당해도 그에 대한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 그녀가 료와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이용하는 건 슈헤이다.

 

그러니까 슈헤이는 남녀 간의 관계에 비유하자면 일종의 호구다. 여자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며, 여자가 떠날까봐 전전긍긍한다. 이는 기존의 모자(母子)관계를 새롭게 보여준다. 엄마에게 모성은 없다. 철없는 아키코는 핏줄을 이유로 생떼를 부려 가족에게 돈을 받아내는 거처럼, 가족이란 관계를 이용해 슈헤이를 붙잡는다. 그 덫에 잡힌 슈헤이는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 아키코에게 이용만 당한다.

 

이런 관계의 재설정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길거리 생활을 하던 아키코 가족이 시설에 오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아키코는 사회복지사인 아야에게 거칠게 군다. 엄마를 진정시키기 위해 곁으로 간 슈헤이를 붙잡은 아키코는 마치 남자친구가 나타났으니 이제 너는 조용히 하라는 듯한 야릇한 미소로 아야를 쳐다본다. 평생을 남에게 의존해 온 아키코는 슈헤이 또한 자신에게 애정을 주고 기둥처럼 받쳐줘야 할 존재일 뿐이다.




모든 어머니가 신의 사랑을 지니는 건 아니다

 

모성애를 다룬 작품들은 그 과정이 어찌되었건 결말부에 모성애의 위대함을 강조한다. 자식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이 있음을 강조하며 따뜻함을 주고자 하고, 이는 경우에 따라 극의 흐름 전체를 뭉개는 아쉬움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었다. 봉준호는 감정의 흐름을 통해, 오모리 타츠시는 관계의 재설정을 통해 모성애에는 아름다운 측면만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마더’에서 엄마 역을 맡은 김혜자는 ‘국민 엄마’로 통할 만큼 작품에서 주로 어머니 역할을 맡아 왔다. 자식을 향한 헌신적인 모성애를 표현해 왔던 엄마의 변신은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이 변신보다 더 충격적인 건 자신을 감추고 모성을 발산하며 관객들을 현혹시킨 연기다. 엄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모든 행동은 도준을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 잔혹함마저 자식을 위해 부모는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거처럼.

 

이는 김혜자란 배우가 지닌 이미지를 통해 껍질을 만들어낸 봉준호의 연출력과 그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낸 김혜자의 연기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시도다. 엄마의 모성애에 관객이 의심을 품지 않으면서 개운하지 않은 뒷맛으로 이야기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보여준다. 어머니의 헌신은 그 모든 게 자식을 위한 것일까. 때로는 자신을 위한 걸 자식의 이름으로 행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말이다.

 

귀여운 외모에 건강미 넘치는 이미지로 사랑받아 온 나가사와 마사미는 밑바닥 인생을 지닌 캐릭터를 연기하며 한 방울의 모성애도 흘리지 않는다. 자식을 방치하고 학대하는 사람이 사정을 말하며 사실은 애정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런 여지를 마련하는 건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변명을 영화가 대신 전달하는 것과 같다. 아키코는 처음부터 끝까지 슈헤이에게 의존만 한다.

 

료와 슈헤이 사이의 갈등에서 료의 편만 드는 그녀의 모습은 더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자신을 좋아하는 아들을 이용하는 간사한 여성의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모성애는 어머니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피어나지 않는다. 자식만 생각하며 자식을 원동력으로 살아가는 어머니도 있겠지만, 한 몸을 공유한 사이임에도 함께 나아가는 반려(伴侶)가 아닌 애완(愛玩)의 개념으로 자식을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이 두 편의 <마더>는 같은 제목을 지녔고, 비슷한 모자(母子)관계를 그리지만 그 행동의 원동력과 어머니의 모습에서 차이를 보인다. 기존의 작품들과 달리 모성애의 어두운 측면을 다뤄내며 색다른 시각을 선사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통해서는 서스펜스의 매력 속 모성의 이기적인 측면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오모리 타츠시 감독의 영화에서는 처절한 드라마 속 모성이 아닌 감정으로 자식을 품는 어머니도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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