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인간이란 가장 뛰어난 적응력의 동물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


인간이란 동물은 환경 적응력에 있어 가장 뛰어난 종일 것이다. 그들은 더운 열대우림은 물론 건조한 사막과 추운 극지방에서도 살아간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에 불편함이 있지만 이 불편함에 '적응'이 되고 나면 그것이 크게 불편한 것이라 여기지 않는다. 그건 단순히 기후에 있어서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국가의 형태에서도 마찬가지다. 중세 봉건왕조 시대부터 현대의 자유 민주주의 사회까지, 인간은 전혀 다른 형태의 국가에서도 '여전히' 살아오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 <모래의 여자>가 창조한 세계관은 그 기괴함에도 불구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그리고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니키 준페이라는 남자는 모래땅으로 곤충채집을 나선다. 아무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낭만처럼 여기고 '자신의 이름'을 붙일 곤충을 찾기 위해 모래땅에 온 남자. 하지만 그는 마을 주민들의 계략에 의해 가족을 잃은 한 과부의 집에 갇히게 된다. 그 공간은 사방이 '모래'로 되어있는 집이다. 그곳에서 여인은 밤이면 모래를 퍼낸다. 모래가 이 집을 집어삼키는 것을 막기 위해. 그건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밤이면 모래를 퍼낸다. 남자는 그런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그 전에 모래만이 가득한 이곳에 있기가 싫다. 그리고 남자는 탈출을 꿈꾼다.


하지만 남자는 자신이 찾으려는 '진화된 곤충'(학계에 알려지지 않은)처럼 점점 '모래로 가득한 마을'의 삶에 적응되어 간다. 그건 절망에 절망을 맛보면서 자신이 가진 '인간의 높은 기준'을 한 단계씩 낮추면서 시작된다. 알몸의 여자에게도 이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그는 '물'을 얻기 위해 여자에게 성행위를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자고 설득하며 끝까지 반항심을 놓지 않았던 마음은 죽음의 순간에 자존심마저 모두 버린채 제발 살려달라며 애원하게 만든다. 그가 이 모래땅에서 발견한 곤충들이 이곳에서 살아가기 위해 자신들을 '변화'시킨 거처럼 남자는 오직 '생존'을 위해 이곳에 적응해간다.


점점 자신이 지켜온 것들이 '환경'에 의해 파괴되며 자그마한 모래 속의 집에 생활에 적응해가는 준페이의 모습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이는 답답하게 모래 속의 집에 갇혀 생활하는 여자와도 관련이 있다. 준페이는 그녀에게 이런 생활이 답답하지 않느냐며 말한다. 하지만 그녀는 '왜' 걸어야 하는가에 대해 준페이에게 역설한다. 자신도 이곳에 오기 전에 많이 걸어봤지만 걸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이다. 그녀는 모래 밖의 삶에서 점점 파괴되어져 왔다고 본다. 이는 전후 일본 사회가 가진 암울한 모습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두 발은 자유로우나 어디를 가도 겪게 되는 육체와 정신의 고통. 그런 고통 속에서 '적어도' 모래를 파내면 살아갈 수 있는 이 모래구덩이 속 집이 그녀에게는 걸어 나갈 수 있는 세상보다 더 자신에게 맞는 세계로 여겨졌을지 모른다.


준페이에게 초점을 맞춰보자. 그는 곤충을 발견해 '이름'을 남기기 위해 모래땅으로 왔다. 하지만 그는 이 모래땅에서 본인의 이름을 잃어버린다. 이름을 알리기 위해 온 사람이 오히려 이름이 사라지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이는 준페이와 곤충과의 관계를 통해 계속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는 곤충을 수집한다. 수집된 곤충은 채집창에 갇혀 사실상 '관찰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준페이는 마을 주민들에 의해 여자의 집이 있는 모래 구멍에 갇힌다. 그는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관찰' 당한다. 그가 모래에 관심을 가진 것은 '모래'로 이뤄진 공간에서 곤충이 다른 변화를 보일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환경에 따라 진화하는 곤충. 그런 곤충처럼 준페이는 이 모래땅의 마을에 적응한다. 곤충을 잡으러 온 그가 오히려 모래에 잡혀 '인간곤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번에는 시점을 바꿔보자. 준페이는 이곳 마을 사람들을 나쁘게 생각한다. 그들은 준페이를 과부의 집에 일손이 딸린다는 이유로 불법감금시켰다. 물을 주지 않아 힘겹게 만든 것은 물론 그가 탈출을 시도하자 소금모래 쪽으로 몰아 죽음의 순간까지 몰아붙였다. 준페이는 이에 대해 강한 반발과 순수한 척하는 이 마을 사람들에 대해 악의를 가진다. 하지만 그는 뒤에 가서 이들의 시점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이들의 행동에 어느 정도 정당성을 부여한다. 정부란 곳은 상황이 어려울 수록 국민들에게 과한 부담을 안겨준다. 세금을 높이고 노동환경을 열악하게 만들며 많은 의무를 지게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애국심'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모래땅 역시 마찬가지다. 매일 밤이면 모래를 퍼내야만 한다. 모래를 퍼내지 않으면 집은 무너지고 한 구덩이의 집이 무너지면 다른 구덩이 역시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 그래서 구덩이에 사는 마을 주민들은 큰 부담을 짊어지게 된다. 매일 밤 막대한 양의 모래를 퍼내는 부담을. 하지만 그 부담 역시 '마을을 위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즉, 그들이 준페이를 구덩이에 가둔 것은 '노동력이 필요해서'라는 이유이고 이는 그들 입장에서 마을을 지키기 위한 합리적인 선택으로 여겨진다.


<모래의 여자>의 재미를 주는 포인트는 무엇일까? 이는 이 작품이 가지는 두 가지 장점에 있다고 본다. 첫 번째는 두 남녀를 관찰하는 관음증적인 성격이다. 모래의 구덩이에 갇힌 이 제한된 공간에서 두 남녀가 펼치는 심리전과 육체적인 밀당은 '훔쳐보기'의 재미를 제대로 보여준다. 제한된 공간, 사방을 덮은 모래의 향기처럼 찌들어가는 남녀의 심리와 육체, 그리고 연속된 인간성의 상실은 관음증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준다. 두 번째는 '모래'라는 독특한 소재다. 아베 코보는 '일본의 카프카'라는 별명답게 문체에서 그 독특함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 문체를 더 돋보이게 하는것은 독특하면서 재미있는 소재다. 모래로 이루어진 마을이라는 설정부터 그 속에 갇힌 두 남녀, 모래가 가지는 텁텁함과 건조함을 담아낸 문체는 색다르면서 놀라운 경험이다.

작가의 이전글 <우리를 침범하는 것들> - 나를 침범하는 모든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