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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침범하는 것들> - 나를 침범하는 모든 것들

가끔 우리는 너무나 고마운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비관하곤 한다. 훈련소에 입소했을 때, 난 대학교를 안 나온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줄을 몰랐다. 학교에서 툭하면 하는 소리가 아무리 공부를 못해도 대학은 어디라도 간다는 소리였고, 친구들도 다 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훈련소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집안 사정 때문에 대학을 못 간 사람도 있었고, 대학 생활을 너무 꿈꾸지만 성적 때문에 못 간 사람도 있었다. 주변과 같아서 너무나 평범하게 여겼던 것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왜냐하면 삶이라는 건 수많은 ‘침범’을 당하기 때문이다. 태어난 가족부터 내가 꿈꾸는 미래까지 결코 그 길은 쉽지가 않다.



<우리를 침범하는 것들>은 평범하지 않은 한 가정에서 태어난 남자 채드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그는 독실한 신자인 아버지 콜비와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세상 누구보다도 소중한 자식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채드가 무리의 우두머리로 있는 곳은 도시의 외곽으로 제대로 된 집 보다는 캠핑카, 그리고 컨테이너에서 생활한다. 이들은 법의 보호를 받지 않으며, 보호를 받지 않기 때문에 의무도 지지 않는다. 이곳은 무법지이며 동시에 자유의 낙원이다. 하지만 채드는 이곳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아들과 딸 만큼은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기를 원하지만 콜비는 아들 타이슨이 채드의 뒤를 이어 무리의 지도자가 되기를 원한다.



작품은 모순적인 구도를 통해 채드라는 인물이 가진 심리를 강렬하게 묘사해낸다. 채드는 어떤 인물인가? 라고 묻는다면 쉽게 답하기 힘들다. 그는 사회를 등졌으며 그 무리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살아온 방식에 염증을 느끼며 자식들만큼은 정상적인 삶의 굴레에서 살아가기를 희망한다. 자식들을 사회에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그 아버지부터가 사회에 정착해야만 한다. 하지만 채드는 그 자신의 아버지에 의해 정착을 거부당한다. 콜비는 채드가 무리를 이끌기 위해 더 강해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인 채드는 아들을 이 외곽에서 탈출시켜 주고 싶어 하지만 또 다른 아버지인 콜비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 



이처럼 ‘삶’이라는 건 누군가의 침범에 의해 내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향해간다. 산다는 게 그렇다. ‘난 나 혼자서 알아서 살아갈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꼭 누군가에게 침범하게 되며 침범을 당한다. 겉보기에 이 무리들이 외곽에 있어서 아무런 침범도 당하지 않고 살 거 같지만 아니다. 콜비는 무리를 지키기 위해 채드에게 범죄를 저지르게 하며 이 범죄는 그들 울타리 밖의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밖에 없다. 채드는 자신의 울타를 지키고 싶어 하지만 이 울타리는 콜비에 의해 침범을 받고, 그 침범이 끝나고 나면 범죄의 여파로 사회에 의해 다시 침범을 당한다. 그리고 그 자신도 사회를 등지는 공간에 있으면서 계속 그곳을 침범한다.



그렇다면 삶이 누군가를 침범하는 건 삶이 가지는 필연적인 성격일까? 그건 아니다. 만약 삶의 목적이 매일 게임을 하는 것이고 방에서 게임만 하고 하루 종일 지낸다면 어떠한 침범도 받지 않고, 침범을 하지도 않는다. 침범은 방향에 있다. 모든 삶에는 방향성이 있다.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흐르듯 어딘가로 향한다는 방향만 정해둔다면 삶은 그대로 흘러간다. 채드가 가지는 모순은 여기서 온다. 그는 콜비와 같은 방향을 향해왔다. 하지만 자신의 아들은 그 반대의 방향으로 가기를 원한다. 그래서 힘이 든다. 콜비가 사회를 등졌듯이, 채드 역시 콜비를 따라 그런 행동을 반복해 왔듯이, 사회도 그들을 등졌다. 그의 아들 타이슨 까지도.



난 이 작품의 결말을 이렇게 생각한다. 채드가 아들 타이슨에게 더 강해져야 한다고 했던 말. 자신의 무리를 이끌기 위해 더 강해져야 한다는 뜻 혹은 사회로 돌아가기 위해 더 강해져야 한다는 뜻 둘 중 하나가 아닌 두 가지를 다 의미하는 말이라고. 채드가 강아지를 돈을 뿌리고 데리고 나오는 장면은 그의 성격에 따른 분노나 자신과 그 무리들을 무시하는 행동에 대한 폭발보다는 아들을 위한 미래를 설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드의 행동이 순간적인 감정에 의해서라면 이후 그가 보여준 행동들이 너무 계획적이라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는 이미 자신은 사회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콜비에 의해 외곽의 삶에 너무 물들였고 사회에 반하는 행동을 너무 크게 저질렀다. 그가 있으면 타이슨과 자식들은 그가 꿈꿔왔던 사회에의 적응을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택했을 것이다. 자식에게 용기를 주면서 동시에 결의를 다지게 할 방법을. 작품 초반, 강아지를 잃은 아이에게 새 강아지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두 세계’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위한 시작을. 작품의 마지막, 어찌되었건 채드를 돕는 건 그의 아버지고, 외곽의 사람들, 그리고 가족이다. 가족이란 건 결코 버릴 수 없는 존재다. 서로가 서로의 울타리를 침범하지만 넓게는 하나의 울타리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울타리를 부수고 나가는 건 쉽다. 하지만 자신의 울타리를 연결해 더 넓은 울타리와 하나가 되는 건 어렵다. 타이슨은 가족을 껴안으면서 동시에 사회에 적응해야만 하는 어려운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감정선이 쉬운 영화는 아니다. 또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모든 이들에게 공감이나 영감을 줄 내용도 아니고 말이다. <스타드 업>이나 <아이 노우 유 노우>처럼 딱히 내용에 따른 주제의식이 끌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가 가진 힘은 분명하다. 바로 마이클 패스벤더다. 그는 겉으로만 거친 남자가 아닌 가슴이 뜨겁게 타오르는 아버지를 보여주었다. 단 하나, 이 부자의 뜨거운 감성만이라도 받아들인다면 충분히 즐길 만한 작품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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