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리고 세상 - 4. 아뉴스 데이
내가 우리나라 여성운동에 가지는 아쉬움 중 하나가 '연대'다. 여성들이 다 같이 힘을 합쳐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줄 알아야 되는데 특정한 권리 주장에 매달리고 자신들의 집단만을 중시하다 보니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뭉치지를 못한다. 여성단체는 더 처절하게 싸워야 한다. 특히 '피해를 입은 여성'에 대해 온정을 가지고 그녀들을 위해 '책임'을 져야 된다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 난 특히 강간 당한 여성들이 합의를 보지 않으면 안 될만큼 지원이 시원치 않다는 점이 너무나 아쉽다. 사법부는 합의에 너무나 관대하고 강간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너무나 차갑다. 이 차가운 시선을 바꿔놓아야 하는 것이 같은 여성들이 해야될 역할이고 이를 통해서 법을 바꿔나가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아뉴스 데이>가 가지는 힘은 크다. 이 영화는 '연대' 뿐만이 아닌 넓은 의미에서 '휴머니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1945년, 이미 독일군에 의해 침공의 아픔을 겪은 폴란드에 또 다른 비극이 다가온다. 독일군을 몰아낸 소련군들이 폴란드인들을 약탈하고 강간한 것이다. 적십자 소속으로 폴란드에서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프랑스 의사 마틸드에게 어느 날 수녀들이 찾아온다. 그들을 따라 수녀원에 온 마틸드는 충격을 받는다. 소련군들에게 강간을 당한 수녀들이 임신을 한 것이다. 하느님을 섬기는 직업인 '수녀'인 그녀들이 강간을 당한 것도 충격이지만 임신을 해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사실이 더 괴롭게 다가온다. 마땅한 출산에 대한 지식이 없는 그녀들을 위해 마틸드는 출산을 도와주기로 결심한다.
흔히 유럽이라는 나라에 대해 가지는 가장 큰 환상은 인권에 있어서 굉장히 높은 수준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어린아이는 어른이 되기 전까지 최소 400번을 얻어 터진다는 <400번의 구타>나 낙태를 법적으로 금지시켰던 차우셰스쿠 정권 당시의 루마니아를 다룬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을 보면 알 수 있듯 유럽의 인권문제 역시 오랜 시간 치열한 싸움을 통해 높아진 것이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수녀들이 임신을 한 거 자체가 죄악이며 더군다나 아버지가 없는 아이를 낳는다는 거 자체는 당시의 편견의 벽과 싸워야 될 문제였다. 더군다나 전쟁에 참가해 부상을 입은 고국을 위해 싸운 부상자들을 치료하기에도 바쁜 의사가 (당시의 기준으로) 한낱 여자, 그것도 국가를 위해 싸운 것이 아닌 수녀원에 박혀 있던 여자들을 위해 시간을 내 수녀원을 향한다는 것은 꽤나 선택하기 힘든 문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실존 인물인 마들렌 폴리악은 그녀들을 위해 소련군의 감시를 뚫고 수녀원을 향했다. 난 이 영화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정신의 가치는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연대, 다른 하나는 휴머니즘이다. 여성문제에 있어서 항상 나오는 말이 연대다. 사회의 모든 문제가 그렇다. 가만히 있으면 고름진 것이 튀어나와 자연스럽게 해결되지 않는다. 치열하게 싸워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권리를 찾을 수 있다. 촛불집회 당시 전국적으로 많은 이들이 촛불을 들었기에 정권이 바뀔 수 있었다. 그저 '저렇게 나쁜 짓을 한 대통령인데 뭐, 물러나게 되겠지' 라고 생각했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여성인권 역시 마찬가지다. 여성들끼리 연대를 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 연대가 그저 개인적으로 측정 집단만을 위한 연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연대의 가장 큰 힘은 확장성이다. 확장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연대가 의미가 있다는 설득에 성공해야만 한다. 설득 없는 연대는 진정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리고 그 설득에는 사회적으로 가장 힘든 처지에 처한 이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다.
난 이 영화에서 원장 수녀의 선택이 이해가 안 가지 않았다. 그녀의 선택도 당시 사회적인 시선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눈으로 볼때 이 얼마나 부끄러우며 책임지기 힘든 일이었겠는가. 하지만 그녀의 선택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여성들은 또 숨어야 하고, 피해자가 되어야 하며, 시대의 희생자로 남아야만 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영화가 가지는 힘은 여기에 있다. 한 발짝 더 나아갔다. 여성들의 연대를 통한 싸움. 남성들의 폭력 앞에 한 없이 나약하게 무너지고 혼자 그 아픔을 품지 않겠다는 저항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
두 번째는 휴머니즘이다. 내가 항상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세상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야지 멈춰서는 안 된다. 기술은 계속 진보하는데 인간은 발전 없이 그 수준 그대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인간이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한 방향, 인간다움을 존중하는 휴머니즘의 방향으로 걸어가야만 한다. 과거 유럽은 장애인이 잘못된 존재라고 여기며 이들을 고문한 것은 물론 사형까지 시켰다. 히틀러의 나치는 대놓고 정신지체 장애인을 돌보기 위한 돈의 액수를 공개하며 이들을 국가가 지켜줄 필요가 없다 말하며 '열성과 우성'의 논리를 펴기도 했다. 그랬던 유럽이 오늘날의 '사람'을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끊임없이 휴머니즘의 방향으로 달려왔기 때문이다. 난 낙태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강간이나 계획에 없던 임신은 그 사람은 물론 아이의 삶까지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임신하면 낙태하고, 또 낙태하는 사고를 가지고 이를 법적으로 허용해 달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태아도 생명이다. 하나의 인간이다. 인류의 방향은 바이오필리아를 향해가야 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 애정을 품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마틸드가 수녀들을 도와 준 이유는 여기에 있다. 생명에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음이 어디 있나. 사람이 당한 피해의 경중이 어디에 있나. 상처를 입은 사람은 치료해 줘야 하며, 감싸 안아줄 수 있어야 한다. 그녀는 생명을 중시했고 같은 인간인 수녀들을 존중했다. 그래서 그녀들을 도왔다. 이 영화의 결말이 마음을 울리는 건 결국 그녀의 이 '사랑'이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만약 원장수녀의 뜻대로 되었더라면 수녀원은 그런 활기와 생명력을 가진 공간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을 이겨낼 수 있는 건 '인간'이다. 인간에 대한 믿음, 사랑, 소망 만이 모든 아픔과 고통, 파괴와 슬픔을 이겨낼 수 있다. 그래서 휴머니즘이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생명을 경시하고 무시하며, 인간을 편을 나누고 등급을 매기는 행위는 퇴보 만을 의미한다.
휴머니즘에 기반을 준 연대. 오직 그것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고 더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마틸드의 '진심'이 다른 수녀들은 물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결국 남성까지 그 연대에 참여시킬 수 있었다. 난 오늘날 우리나라의 페미니즘 운동이 잘못되었다 생각한다. 남성을 배척하고, 남성을 멀리하며, 남성을 조롱하는 페미니즘은 성공할 수 없다. 이는 우리가 여성을 비하하고 조롱하며, 성적 대상으로만 여기는 일베 등의 집단을 혐오하고 멸시하는 것과 같은 효과만을 가져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