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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층간소음 문제가 끝나길 바라며

     

처음 이 글을 시작할 때만 해도 빨리 완결을 지을 줄 알았다. 글이 이렇게 길어진 이유는 감정적인 문제가 컸다. 글을 쓰는 중에 위층에서 소음이 들리면 감정에 치우쳐 전개가 됐다. 그렇게 지우고 쓰고를 반복했다. 층간소음은 사생활과 사생활이 천장과 바닥을 경계로 맞닿아 있어 생기는 문제다. 서로의 사생활을 침범 받고 싶어 하지 않기에 층간소음 문제는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다.     


1차적인 책임은 아파트를 투기 목적으로 지은 건설사에 있고, 2차적인 책임은 층간소음 문제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못한 정치권에 있다. 지금보다 방음수준이 올라간다 하더라도 층간소음이 끝날지 모르겠다. 그때가 되면 방음이 잘 되어있는 집이라며 위에서 더 뛸 수도 있고, 뛰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인식이 생길지도 모르니 말이다. 자기 집에서 뭐든 해도 된다는 인식이 있는 한 어떠한 방음으로도 층간소음은 막기 힘들다.   

  

층간소음은 생활문제라는 점에서 일찍이 교육이 필요했다고 본다. 지금의 젠더교육처럼 어린 시절부터 층간소음 예절을 교육기관에서 가르쳤어야 했다. 가정에서의 교육으로 예절을 배우는 아이들이 갈수록 없어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남에게 피해를 끼치면 안 된다는 기본적인 사고가 잡혀있지 않다. 기초 예절까지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점에서 부담이 커지겠지만 어쩌겠나. 맞벌이를 해야 살 수 있는 세상에 아이들 교육은 교사란 직함을 가진 사람들이 온전히 맡아야 하는 게 아니겠나.     


처음 위층에 갔을 때 느꼈던 건 이 사람들이 층간소음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아파트이기에 소음을 내도 아래층이 이해해줘야 한다는 자세는 층간소음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과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음을 느끼게 했다. 민간의 문제로 보고, 피해를 보는 두 사람에게 알아서 문제를 해결하라 맡기다 보니 서로 다른 인식을 지니게 된 것이다. 심지어 어떤 BJ의 방송에서는 층간소음으로 신고해도 문 안 열어주면 그만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법을 통해 강압적으로 층간소음을 막을 순 없다. 아파트의 1층과 탑층이 아니고서야 누구나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되는 이 구조 속에서 강압적인 법은 더 많은 피해자를 만들 뿐이다. 그보다는 피해자가 숨통을 틀 수 있게 만드는 사회적인 배려와 인식이 자리 잡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현 정부는 층간소음을 중요한 민생문제 100가지에 포함시켰으나, 현재까지 어떠한 진척도 보이고 있지 않다.      


이 글이 극적인 해결 촉구나 명쾌한 방안을 제시하진 못한다. 그저 같은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공감이나 위안을 주고자 하는 목적에서 썼다. 마음에 강한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면 이 순간만큼은 차분히 가라앉혔으면 한다. 층간소음으로 무너지기엔 당신이 힘겹게 쌓아온 지난날들이 너무나 아깝지 않나. 언젠가 이 지긋지긋한 층간소음 문제가 끝나길 바라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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