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리고 세상 3 - <포크레인>
가끔 이렇게 묻는 친구들이 있다. ‘김기덕 영화 왜 봐?’ 그의 영화는 지독하고 과격하며 잔인하고 야하다. 여기에 영화적인 구조나 재미가 크지 않다. 많은 이들이 김기덕 영화를 싫어하는 이유를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궁금한 것이다. 내가 왜 김기덕 영화를 보는지. 난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감추고 싶은 사회적인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이 시선은 감독의 연출작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가 각본을 쓴 작품들 역시 마찬가지다. 김기덕필름의 영화들은 감추고 싶어 하는 사회적인 문제를 가장 본질적으로 꿰뚫어 본다.
<택시운전사>의 흥행은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 우리 모두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을 가져다주었다. 지난 2번의 정권에서는 철저하게 5.18 민주화 운동을 무시했으며 그 참혹한 만행이 알려지는 것을 꺼려했다. 5.18 민주화 운동이 다시 한 번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새롭게 부각된 사실이 있다. 바로 당시 투입되었던 진압군의 만행이다. 이전까지 우리는 <박하사탕>이라는 작품을 통해 ‘진압군 역시나 그 시절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간직한 피해자다’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당시 시민들의 증언이나 자료들이 커뮤니티 사이트를 통해 활발하게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인식은 바뀌고 있다. 이건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행한 살상이 아닌 일방적인 살육일 뿐이라고 말이다.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는 건 당연하다. 2차 대전 당시 ‘침묵도 죄’라는 말이 있었다. 영화 <뉘른베르크의 재판>은 당시 나치에 협력해 그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한 판사들에 대한 재판을 다룬 영화다. 이 영화에서 그들이 재판을 받는 이유는 나치의 만행에 침묵한 죄이다. 변호사는 나치의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랬다고 말하나 재판은 그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변호사 역의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내뱉는 궤변이다. 그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시 침묵했던 모든 나라들의 잘못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2차 대전 내내 침묵을 유지한 미국에 대해서도 책임을 묻는다. 그의 논리는 이렇다. 이들의 침묵이 죄라면, 당신들의 침묵도 죄다. 당신들에게는 이들을 처벌한 권리가 없다. 사람들이 당시 진압군에게 분노하는 건 그들이 이 잘못된 명령에 침묵하고 잔혹한 살상을 저지른 것이다.
어쩌면 올해 <택시운전사>의 시각을 벗어나 반대의 시각으로 5.18을 다루는 작품이 <포크레인>인지도 모른다. <포크레인>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본다. 이 작품의 제목이 ‘포크레인’인 이유는 이 포크레인이 감춰진 아픔을 다시 꺼내내기 때문이다. 포크레인은 무언가를 파내야만 한다. 그게 존재의 이유다. 포크레인 기사인 강일은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진압군으로 투입되었다. 그는 산에서 사람을 죽였고 그 끔찍한 기억이 환영처럼 괴롭힌다. 그는 이 악몽을 끝내기 위해 찾아 나서기로 결심한다. 누가 ‘그날, 우리를 왜 그곳에 보냈는지’를 말이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우리는 크게 세 가지 입장을 취한다. 첫 번째, 원인을 찾는다. 두 번째, 범인을 찾는다. 세 번째, 침묵이 정답이라 여기고 침묵한다. 5.18 민주화 운동에 투입된 진압군의 경우 대부분이 세 번째 방법을 택했다. 그들이 한 행동은 결코 입으로 꺼낼 수 없는 행동이고 지옥 같은 기억이다. 강일은 두 번째 방법인 ‘범인’을 찾는다. 군대는 철저한 상명하복의 조직이다. 누군가의 ‘명령’이 있지 않고서야 행동하지 않는다. 전 재산이 29만원이라는 분이 자기가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니 누군가 내린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사람을 찾아 나선다. 왜 그곳에 보냈는지 알기 위해.
강일이 만나는 인물들 중 인상적인 사람이 세 사람 있다. 첫 번째는 경찰로 일하는 선임하사. 그는 반가운 얼굴로 강일을 맞이하고 집으로 초대한다. 부인에 아이까지 둔 그는 평범한 가장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지독한 폭력성이 있다. 그는 아들을 자신의 우리에 가두려고 들고 아내한테도 소리를 지른다. 심지어 밥상에서 자기 말을 안 듣는다며 아이를 매로 때린다. 그는 강일에게도 이빨을 드러낸다. 그는 5.18 당시 진압군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 폭력성은 사라지지 않았고 가족이라는 약한 존재에게 강압적으로 풀어낸다.
두 번째는 대대장이다. 강일은 대대장의 집에서 그의 아들과 만나고 5.18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에 아들은 말한다. ‘아버지도 누군가의 명령을 받아서 그랬겠죠’ 강일은 대대장이 5.18에 대해 쓴 책, 그러니까 당시 광주 시민들을 빨갱이 폭도라고 쓴 책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나 아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에게 아버지는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를 갖춘 인물이다. 그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서 나왔기에 대대장은 자랑스러운 아버지며 5.18은 그저 작은 흠결일 뿐이다.
세 번째는 스님이다. 고통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종교로 가는 것이다. 종교는 사랑이며 용서고 관용이다. 하지만 이런 종교가 가진 문제도 있다. 신의 이름으로 자기가 자기를 용서하는 것이다. <밀양>에서 박도섭은 자신을 용서해주기 위해 온 신애에게 이미 주님이 용서했다고 말한다. 신의 이름을 빌린 스스로의 용서는 피해자에게 더 큰 상처를 준다. 이런 대표적인 인물을 뽑자면 고문기술자 이근안과 인천 호프집 화재사건의 사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큰 잘못을 했음에도 목사가 되었다. 과거의 잘못을 용서하는 거 피해자지 본인이 아니다. 강일은 스님이 된 채 입을 다문 사단장을 보고 분노한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5.18을 기억에서 지웠다. 그들이 이 기억을 지운 이유는 하나다.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다. 김기덕 각본의 특징은 직설적이다. 하고 싶은 말을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직접적으로 내뱉는다. 한 청년은 강일과 그의 상관에게 말한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고. 5.18은 민주화 운동이 되었다고. 한 마디로 너희들을 동정해 줄 사람은 없다는 소리다. 그가 바라본 문제의 본질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군인, 두 번째는 달리진 시대다. 달라진 시대가 학생의 입을 통해 등장했다면 군인은 강일이 만난 사람들을 통해 나타난다. 이미 제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의 계급은 확실하다. 강일은 여전히 부하이며 상관들은 그를 부하처럼 대한다. 그들이 만나는 순간, 그들은 군인이 된다. 이 약간 과장된 장면은 당시 그들이 군인이었기에, 상명하복에 복종하는 조직이기에 명령을 따라야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5.18 민주화 운동의 진압군들에게 화살이 가지 않았던 이유는 대한민국 남자라면 군대에 다녀오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군대를 경험했고 그곳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강압적인 공간인지 안다. 그래서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앞서 말한 것과 다른 또 다른 시대가 바뀐 것이다. 더 이상 군대의 부조리는 용납되지 않는다. 시대는 ‘아닌 건 아닌 것’을 말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요즘 세대들에게 진압군은 비난받아야 마땅한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포크레인>이 지금 이 시점에 가지는 의의는 여기에 있다. 5.18이 민주화 운동이냐 아니냐를 다투는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화두는 ‘책임’으로 넘어갔다. 전두환이 자신의 잘못을 부정하고, 그가 정치권의 문제로 출소하게 되면서 5.18은 ‘현재진행형’이 되고야 말았다.
‘그’가 책임을 부정하면서, 정치권이 그 ‘책임’을 용서해주면서 남겨진 사람들은 ‘범인’을 잃어버렸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찌 해야만 하나. 그 아픈 고통을 피하고 무시한 채 계속 살아가야만 하나. 작품은 이에 대해 가장 이상적인 결론을 제시한다. 세상 모든 문제의 해결은 하나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과해야 된다. 먼저 공격을 멈춰야 되는 건 가해자가 되어야지 피해자에게 침묵과 용서를 강요해선 안 된다. 강일이 피해자를 찾아간 건 용서를 빌기 위해서다. 처음에 그는 모든 책임을 범인이 가져가 주기를 바랐다. 마음에 가득 쌓인 죄책감이 그를 만나 풀리길 바랐다. 하지만 책임을 회피하고 숨기고, 잊으라고 말하는 사람들만을 만났고, 고통을 이기지 못해 포크레인을 몰고 왔으나 아무것도 ‘파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