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벚꽃은 봄보다 빨리 진다
명지의 목소리가 다시 미진을 부른 건 상진이 두 번째로 출판사를 찾아왔을 때였다. 감자와 고구마를 쪄 온 신인작가는 캐릭터 구상에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고백했다. 조언대로 타인의 시점에서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해봤지만 글에 담기는 건 자신의 모습이다. 나이가 들면 사람을 더 잘 이해할 줄 알았는데 편협한 시각으로만 바라본다며 푸념을 내뱉었다. 서른만 넘어가도 친구가 없어진다는 말을 시작하려는 찰나 편집장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번에는 정신과 의사 혜진이다. 진석이 진료를 다 취소했다며 보호자와 상의한 것인지 물었다. 매번 받지 않는 스마트폰을 대신해 택시를 탔다. 이번에는 머리를 굴렸는지 공원이 아닌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서 발견됐다. 그네에 앉은 진석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여기서 뭐, 아니지. 그네를 타고 있는 거지. 왜 여기서 그네를 타고 있는 거야. 지금 상담 받으러 갈 시간이잖아.
-어른보다는 아이들이 더 고민에 공감해줄 거 같아서. 입바른 동정보다 순수한 직선이 더 듣기 좋잖아.
-제발 말 좀 들어. 당신 때문에 이게 몇 번째야. 나 지금까지 회의만 세 번은 허탕치고 나왔어. 나 만난다고 기다린 사람들 내가 돌려보냈다고. 나까지 망가뜨리려고 그러는 거야?
-아, 핸드폰이 묵음으로 되어 있었구나. 앞으로는 잘 받을 게, 미안.
그날 이후 미진은 점심시간마다 진석을 데리고 병원을 향했다. 점심은 샌드위치나 햄버거, 과자로 때웠다. 집에 오면 남편은 방문을 굳게 잠갔다. 일부러 TV 앞에서 식사를 했다. 예능을 틀어놓고 크게 웃었다. 공원에 나가 달리고 또 달렸다. 온몸의 수분이 빠져 푹 잠이 들 수 있도록. 그래서 눈물 한 방울이라도 흘릴 슬픈 생각을 하지 않도록.
두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보호자를 만나 환자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인터넷에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내용과 함께 정신적인 문제는 과거에서 왔을 확률이 높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어떤 자료는 한 개인의 모습 중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건 빙산의 일각이며 수면 아래에는 더 많은 모습이 감춰져 있다고 설명했다. 몇 개의 자료를 더 찾아본 미진은 8년 동안 겪은 진석의 모습을 모두 말할 각오로 진료실 문을 두드렸다. 진석의 상담 내용을 훑어보던 혜진은 준비했던 질문을 내뱉었다.
-남편 분이랑 나이 차이가 꽤 있더라고요. 대학교 때 만났다고 들었는데 계기가 있었나요?
-오빠가 휴학을 오래했어요. 군 제대 후에 작가가 된다고 준비하다가 실패해서 학업이라도 빨리 끝내자는 마음으로 돌아왔다고 하더라고요.
-평소에 대화는 많이 하세요? 주로 무슨 대화 나누세요?
-오빠가 말이 많아요. 별명이 편의점이거든요. 24시간 쉬지 않고 말한다고 해서요. 뭐, 그날 뉴스기사 보고 말할 때도 있고, 영화나 책 이야기도 하고 그래요. 여기 오고 난 이후부터는 말이 없어졌지만요.
-듣기로는 남편 분이 갑자기 직장에 나가지 않았다고 하던데. 그 시점 즈음에 무슨 일이 있진 않았나요? 사소한 거라도 좋아요.
-글쎄요, 전혀 없었어요. 적어도 제 기억에서는요. 그런데 왜 자꾸 이런 걸 질문주시는 거죠? 첫날 이야기 드렸듯이 남편은 새 영화 작업에 들어가면서...
-제가 보기에는 가족 문제에 더 가까워 보여요. 남편 분은 영화 일에는 신경 쓰지 않고 있어요. 완전 손을 놓아버렸거든요.
눈 내리는 날의 흰나비처럼 진석이 입버릇처럼 말했던 꿈은 마음에서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의 행동은 가족에 얽매여있는 거처럼 보인다고 의사는 말했다. 부담이 심하면 멀리 도망을 쳤을 것이다. 술을 마시거나, 다른 여자를 만나거나, 일탈이라 부를 법한 행동에 열을 올리는 게 예상된 반응임에도 집 근처 공원을 어슬렁거렸다. 혜진은 이 행동에 대해 가정 내의 불만이라 했다. 그 불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집에서 멀리 떠나지 않는 거라고 설명했다.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라 부를 만한 순간이 있었을까. 기억을 더듬던 미진은 한 서랍장에서 손을 멈춘다. 결혼하고 2년이 지났을 무렵, 진석은 영화공장에 합류했다. 이제 안정된 소속을 얻었다며 축하파티를 열어준 미진은 2세 계획을 말했다.
-첫째는 딸보다 아들이 좋을 거 같아. 든든한 오빠가 있어야 동생들을 지켜줄 거 같거든. 우리 적어도 두 명은 가지자.
-애보다 개 키우는 걸 추천할게. 우리 둘이 행복하면 그만이지, 애까지 셋은 너무 버겁다. 요즘 TV에서 보니까 포메라니안 귀엽던데, 어때?
-왜에~ 난 낳고 싶은데. 오빠는 싫어? 오빠 닮은 아들 낳으면 좋아할 거면서, 그치?
-내가 강아지 상이잖아. 나 닮은 강아지는 어때? 침대에 내 얼굴이 두 개 누워있으면 더 좋을 거 같지 않아?
-저기, 나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거든. 난 아이 낳고 싶어. 자기랑 나 닮은 아이 낳아서 행복을 주고 싶다고.
-아이가 있으면, 뭐가 달라져?
무슨 의미였을까. 슬픈 눈에 냉소적인 목소리는 미진의 기억 속 진석과 달랐다.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뭐라고 말한 거지? 기억을 더듬던 머리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브레이크를 밟는다. 빨간불이 켜진 신호등을 무시한 미진 앞에는 유리창 너머로 삿대질을 하는 나이든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