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팔림과 분노

며칠 전에 시사회에 다녀왔다. 관객 시사의 경우 마스크를 철저하게 쓴다. 반면 언론배급 시사의 경우 벗고 있는 기자 또는 배급사 관계자가 허다하다. 그러면 마스크를 써 달라고 이야기하면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할지 모른다. 헌데 그게 쉽지 않다.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고서야 내 쪽으로 침이 튀지 않는데, 써 달라고 말했다 상대가 화를 내면 그 침이 고스란히 나에게 튈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최근 뉴스를 보면 심심치 않게 공공장소 마스크 착용을 지키지 않아 써 달라는 말에 오히려 상대가 화를 내 난동을 부렸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다. 난동까지 가는 경우는 단순 화가 아닌 분노란 단어가 어울린다. 분노는 분개하여 몹시 화를 낸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다툼이 아닌 오랜 시간 억눌러 온 화가 더는 인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강하게 터지는 걸 우리는 분노라 말한다.


쪽팔림은 이 분노를 단숨에 끌어올리는 열쇠다. ‘쪽팔리다’는 부끄러워 체면이 깎이다는 말의 속어다. 쪽팔림은 다수 앞에서 당하는 상황에서 연출된다. 체면이 깎인다는 표현 자체가 자신의 명예나 위신이 떨어진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존심이 있다. 이 자존심은 개개인마다 다르다. 누구는 남들이 부끄럽게 여기는 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가 하면 누구는 대수롭지 않은 일에 자존심을 부린다.


‘마스크 좀 써 달라’는 말은 대수롭지 않게 다가온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 국가에서 정한 행정명령이고 지키지 않을 경우 벌금이 부과된다. 헌데 이 한 마디가 누구에게는 분노를 유발하는 쪽팔림으로 다가온다. 다수의 사람들 앞에서 나를 창피 주는 건 물론 나를 질병을 옮기는 환자처럼 바라본다는 생각, 덧붙여 마스크 좀 쓰지 않았을 뿐인데 마치 죄인처럼 몰아간다는 생각에 과하게 성을 낸다.


이 감정의 기저에는 한 가지 사실이 숨겨져 있다. 바로 내가 한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지를 하지 못할 경우 보이는 반응은 당황과 부끄러움이다. 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걸었는지에 대해, 이 사람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에 대해 파악하는데 시간이 걸리며 표정은 ‘나 당황했어요’라는 얼굴이 된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했음을 알게 된 뒤에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부끄러움은 무지에서 온다. 반면 무지하지 않다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쪽팔림이 분노로 연결되는 건 내가 한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주변에서 날 어떻게 바라볼지 알기에 나타나는 감정이다. 인간이란 단어 자체가 사람과 사람 사이(사람 인(人) 자에 사이 간(間) 자)를 의미한다. 인간은 사회성을 지니고 있고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 존재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면 그 쪽팔림을 이겨내기 힘들어 한다.


지하철역 거지 역시 쪽팔림을 안다. 어떤 거지는 동전을 주면 자길 무시하느냐며 집어던진다. 자존심의 영역은 개개인마다 다르며 그 영역을 건드리는 순간 분노를 겪을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관계에 있어 최대한 거리를 두며 책임자가 아닌 이상 타인의 일에 개입하려 하지 않는다. 분노는 인간이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감정이며 근원적인 악을 품고 있다. 내 말 한 마디가 그 감정을 이끌어 낸다면 이보다 가성비 나쁜 거래는 없을 것이다.


최근 사회적인 화두는 개인이다. 개개인의 심리와 상황을 주목하며 이전의 화두였던 이데올로기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소설의 경우에도 개인의 문제에 대해, 에세이의 경우도 개인의 심리에 대해 다룬 작품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개인에게 어떤 트라우마가 있고 어떤 사고를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없기에 그 분노의 과정 역시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이 내 행동이 옳다 하더라도 상대가 쪽팔림을 느끼고 분노를 내뱉는, 그 화가 나에게 닥치는 이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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