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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사랑 아니야

끔찍한 데이트 폭력에 관하여

사진출처 - 펜바스 컬처뉴스


꽤 오래 전 일이다. 6년도 더 전이니 말이다. 그때 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데이트 폭력’에 대한 다큐였는데 그 내용이 꽤나 충격적이었다. 한 여자가 등장한다. 그녀는 얼굴 전체가 칼에 긁혀 몇 번에 걸쳐 성형수술을 받았고 또 받아야 한다. 정상적인 옛 얼굴로 돌아갈 수 없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건 전 남자친구다. 자신에게 이별을 고하자 얼굴을 여러 개의 칼날로 긁어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라도 끝낼 수 있어 좋다고 말한다. 남자친구의 끔찍한 폭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으니 말이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겼다. 왜 그녀는 그렇게 남자친구한테 당하면서도 쉽게 헤어질 수 없었던 걸까? 이후 등장하는 여성들의 증언은 ‘데이트 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잘 보여주었다. 


한 여성은 데이트 폭력을 당한 뒤 문을 잠그고 경찰에 신고했다고 한다. 방 밖에서 문을 두들겨 대는 남자친구에게 공포를 느끼면서. 헌데 도착한 경찰은 문을 열라고 한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이인데 대화로 잘 해결해 봐라’ 결국 여성은 경찰에 신고해 봐야 소용없음을 알게 되고 남자를 용서해주고, 또 폭행당하고, 용서해주고, 또 폭행당하고 하는 악순환의 반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헤어지지 왜 저래?’ 라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헤어지는 건 더 강한 폭력, 심하게는 살인을 야기한다. 몇 달 전, 폭력을 일삼는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하자, 그 집으로 가 부모님을 죽이고 여자친구를 감금 뒤 강간, 그 여자가 창문 아래도 떨어져 도망치다 심하게 다친 사건이 발생했다. 이별을 고하는 건 더 강한, 심지어 내가 아닌 주변 사람이 다칠 수도 있는 폭력을 가져온다는 공포가 자리 잡는다. 대놓고 ‘부모님을 가만두지 않겠다’라고 협박하는 남성들도 있으니 이별이란 게 쉽지 않다.


사진출처 - 한국일보


데이트 폭력의 문제는 최근 붉어진 게 아니다. 이 문제는 예전부터 계속 있어왔고 문제되어 왔다. 최근에야 이 문제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건 좋으나 싫으나 어쨌든 여성운동(그 방법이 비록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이 꾸준히 진행되면서 여성들의 권리와 피해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어 왔고 그것이 데이트 폭력이라는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이다. 데이트 폭력 역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과거 대한민국은 성범죄에 너무 관대했다. 강간당한 여자와 강간한 남자를 부부로 연을 지어준 판사를 명판사라고 소개한 기사가 있었는가 하면 여자가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게 강간을 당하는 이유라는 재판 주장도 있었다. 심지어 밀양 여고생 집단 강간사건 당시 피해자들은 인생이 완전 파탄 났지만 그 가해자들은 아직도 잘 사는 건 물론 당시 경찰들과 마을 주민들까지 오히려 피해자들을 욕했다. 한국 경찰이 강간 피해자와 가해자를 한 차에 태워서 이송하는 것도 비교적 최근까지 있어왔던 일이다. 지속적인 여성 운동과 강간 피해자에 대한 관심이 이 모든 악습을 바꿔놓은 것이다.


그래서 한국은 성범죄에 대한 처벌이 강하다. 반면 데이트 폭력에 대한 처벌은 약해도 너무 약하다. 이것이 데이트 폭력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며 이 문제를 공론화해서 정치인들이 신경 쓰게 만들어야 될 이유다. 헌데 데이트 폭력의 공론화에 있어 몇 가지 문제가 있다. 흔히 데이트 폭력에 대해 가지는 오해다. 그 오해는 크게 3가지로 말할 수 있다.


사진출처 - 미루네


첫 번째, 데이트 폭력을 사랑싸움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이다. 흔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나오는 장면이 있다. 남자와 여자가 싸우고 남자가 여자에게 심하게 대하자 주인공이 그 남성에게 뭐라고 한다. 그러니 여자가 오히려 화를 내며 ‘우리 오빠한테 왜 그래요?’ 라고 말하며 오히려 주인공이 곤란해지는 장면. 이처럼 데이트 폭력은 ‘어차피 둘이 좋아하니까 다시 화해할 텐데 뭐’ 라는 착각 속에 묵인되어 진다. 친구들끼리 아무리 우정이 좋아도 상호합의하에 싸우는 것이 아니면 때리는 건 폭력이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폭력이 용인된다면 그런 사고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한때 우리는 부모가 자식을 패는 것이,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었던 때가 있다. 이런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은 폭력을 용인했고 이는 심각한 사회적인 문제들을 야기했다. 이제 그런 시대가 지났다. 데이트 폭력 역시나 힘에 기댄 악랄한 과시에 불과하다. 


두 번째, 때리는 것만이 폭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폭력의 사전적 정의로 생각할 때 때리는 것만을 폭력으로 규정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폭력의 가장 중요한 성질은 ‘억누르는’ 것이다. 사람이 폭력을 쓰는 이유는 남을 억누르기 위해서다. 남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남을 억누르는 말도 폭력이다. 욕설은 물론 행동제약, 강제적인 성관계의 강요는 모두 폭력이다. 사랑이란 서로 존중하고 아껴주는 것이지 희생을 강요하는 게 아니다. 핸드폰 검사, 만남 금지, 인간관계 조정까지 그 모든 게 폭력이라는 인식을 해야만 한다. 그저 ‘난 때리지 않으니까 데이트 폭력 아닌데?’라는 사고방식은 자기합리화며 욕설이나 행동제약에 대한 합리성 부과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에 의한 남성 강간을 다룬 영화 <폭로>


세 번째, 데이트 폭력은 남성이 여성에게만 가하는 폭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우리나라 성교육이 정말 잘못되었다 생각하는 이유가 잠정적 가해자를 무조건 ‘남성’으로만 지목하는 것이다. 물론 성범죄는 남성이 저지르는 비율이 높다. 그건 신체적으로 남성이 더 강하다는 점을 부인하기 힘들다. 하지만 성폭력은 남자가 저지를 수도 있고 여성이 저지를 수도 있으며, 남성이 남성에게, 여성이 여성에게도 저지를 수 있다. 그 모든 면에 대해 교육을 시켜야 하는, 말 그대로 나의 ‘성 권리’에 대해 교육을 시켜야 하는 것이 성교육이다. 내가 본 다큐멘터리에서는 여성이 남성에게 가하는 데이트 폭력도 등장했다. 그 남성은 몇 년 전에 동거하는 여자친구 몰래 돈을 불릴 생각으로 모아둔 돈을 가지고 도박을 했고 결국 다 잃어버렸다. 용서를 빌며 집에 돌아온 뒤 몇 달 동안 여자친구의 주기적인 폭력에 시달렸다. 남자는 죄책감 때문에 반항하지 못했다. 헌데 남성이 이 사실을 주변에 알리지 못한 건 ‘남성이 여성에게 당한다’라는 사실이 쪽팔려서다. 그들은 대화를 통해 서로의 앙금을 해소할 기회도,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남자 쪽이 ‘여성에게 맞는다’라는 사실 때문에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하면서 몸에 늘어나는 상처만큼 마음의 상처도 커졌다. 폭력은 피해자와 가해자만 있을 뿐이지 그 성별에 대해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여성이 남성에게 가하는 것도 명백한 데이트 폭력이다.


영화 <돈 크라이 마미>에서는 재혼하고 행복해하는 어머니 때문에 딸이 새 아빠의 폭력을 견딘다. 어머니는 폭력을 알지만 새 아빠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 폭력을 묵인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모든 아픔을 아름답게 승화시킬 거라 생각하는 건 착각이다. 폭력은 중독이다. 한 번 휘두르면 그 대상의 아픔과 고통에 빠져 계속 반복된다. 데이트 폭력은 명백한 가해자의 잘못이다. 그러기에 대다수의 가해자로 지목되는 남성들부터 인식을 바꿔야 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여성들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흔히 사람들이 하는 착각, 난 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살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특별한 사람은 많지 않다. 넘치는 사랑이 기적 같은 순간을 만들어낼 거라는 동화는 착각이며 이 착각이 본인을 비롯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거나 극단적인 경우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다. 데이트 폭력에서 가장 필요한 건 철저한 신고와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의 접근 금지다. 데이트 폭력은 2차, 3차 피해가 가장 발생하기 쉬운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한 인식의 변화, 특히 경찰과 정치권에서 좀 더 처벌의 수위와 대처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했던 거처럼 지속적인 관심과 공론화가 필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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