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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 누가 세상을 버겁게 만들었나

유서


아이라는 건 모두 시험관으로 만들면 그만

선택된 인간의 난자와 정자로

우수한 인간을 만들면 된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태어난 아이들은 전부 똑같은 옷

똑같은 음식 똑같은 방 똑같은 교육 똑같은 교육자를 할당받아

평등한 환경에서 키우면 된다

그중에서 노력과 재능이 부족해서 뒤쳐져 박해 받는다면 어쩔 수 없다

<소녀>의 시작부분은 결말부분과 연결되어 있다. 이 작품은 시작부터 ‘유서’를 보여주면서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에 대해 알려준다. <고백>의 작가 미시마 유키코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만큼 유사한 분위기와 감성을 풍긴다. 주인공 유키는 어린 시절 강압적인 할머니에게 원한을 품고 죽일 생각으로 얼굴에 천을 덮는다. 하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일어난 할머니는 유키에게 몽둥이를 휘두르고 유키의 손에는 커다란 상처가 남는다. 이 상처는 유키에게 상징과 같다. 과거의 고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리고 그 상처 때문에 자신을 주체하지 못해 남에게 어떻게 마음을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는 상처 말이다.

아츠코는 어린 시절 유키의 절친이었다. 둘은 함께 검도를 했지만 유키가 손을 다치면서 그만두면서 두 사람의 길은 갈라지게 된다. 학교에 진학한 이후에도 유키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는 아츠코. 아츠코는 특채로 검도부에 뽑힌다. 그녀는 대회 중 발목을 다치고 이 일로 동료들에게 왕따를 당한다. 일본은 특이하게도 그 사람이 자신이 가진 능력만큼의 일을 해내지 못하면, 즉, 부진하거나 실수를 하면은 ‘할 일을 해내지 못한다’면서 이지메를 한다. 아츠코는 ‘세계최강’이라고 불릴 만큼 검도 에이스였고, 그런 그녀가 대회 중 부상으로 낙마하자 친구들은 이지메를 가한다. 유키는 아츠코를 주인공으로 소설 ‘밤의 곡예’를 쓴다. 이 작품의 내용은 우리는 누구나 밤의 곡예사처럼 아슬아슬한 어둠 속에서 외줄을 타는 인생을 살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는 이런 문구가 나온다.


‘인생을 한 번에 실패하는 법은 간단하다. 발을 헛디디면 된다.’

문구 그대로 아츠코의 처지를 빗대어 쓴 표현이다. 헌데 그녀가 아츠코를 위해 쓴 이 소설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문예상을 받는다. 대학 시절 동인활동을 했으나 등단을 못해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국어선생이 그녀의 소설을 훔쳐 등단한 것이다. 이에 살의를 느끼는 유키. 그녀는 몰래 교무실에 잠입, 국어선생의 비밀을 까발리고 국어선생은 지하철역에서 자살한다. 그리고 새로 온 담임과 전학 온 여자 아이. 그 여자 아이가 유키와 아츠코 사이에 끼어들면서 안 그래도 말이 없던 두 사람의 사이는 더욱 벌어진다. 아츠코가 전학생과 어울려 나쁜 짓을 하고, 유키가 남자친구(라고 할 수 있는)를 사귀면서 두 사람의 소통은 단절되게 된다.


두 사람 사이의 소통이 단절된 이유는 유키와 아츠코, 이 두 사람이 서로를 좋아하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상처가 깊은 사람은 자신감이 결여되고 결여된 자신감은 자신을 어떻게 남에게 보여야 좋을지 망설이게 된다. 유키의 상처는 어린 시절 할머니의 강압과 폭력, 그리고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여전히 집안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고, 아츠코의 상처는 다리를 다친 후 더 이상 쓸모없어 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래서 유키는 말 대신 글로 아츠코를 위로하기 위해 소설을 쓴다. 하지만 전달되지 않는다. 그리고 작품은 2막을 향한다.


2막은 봉사활동을 떠난 두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유키는 아동병동으로, 아츠코는 노인병동으로 봉사활동을 떠난다. 이곳에서 유키는 자신의 음침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준 탓치와 스바루와 친구가 된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모두 희귀병에 걸렸으며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인생이다. 탓치는 죽기 전 아버지를 만나보고 싶다고 말하고, 유키는 탓치의 아버지를 찾아주기로 마음먹는다. 아츠코는 노인병동에서 타카오라는 남자를 만난다. 무뚝뚝한 그에게 어려움을 느끼는 아츠코. 하지만 그는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뒤에서 동료들을 뒷담화 하는 직원들에게 염증을 느끼는 아츠코에게 버팀목이 되어준다. 타카오와 불꽃놀이를 함께 보는 아츠코. 타카오는 아츠코에게 자신의 과거를 말한다. 그는 여고생 성추행 사기단에게 당해 직장도 가족도 모두 잃어버렸다. 그때 돈 5만 엔만 주었다면 넘어갈 수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우기는 그 아이들과 재판까지 갔고 돌아온 건 해고와 이혼이었다. 그는 바닥에 엎드려 여고생에게 사실을 말해달라 했지만 돌아온 건 멸시와 조롱이었다. 그 말을 듣고 아츠코는 알게 된다. 전학생이 자신에게 보여준 사진. 그 사진 속 주인공이 타카오라는 걸 말이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힘은 미시마 유키코의 원작이 가지는 감성과 스토리의 확장성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별 상관없어 보이는 인물들을 나열한 뒤 그들을 자연스럽게 하나의 사건으로 연결한다. 각각의 인물들은 하나로 뭉쳐 작품의 주제의식을 더욱 강화시킨다. 동시에 <고백>에서 보여주었던 독특한 감성이 이 작품에서도 그대로 묻어난다. <고백>이 특정 세대의 교실에 대한 보고서였다면, <소녀>는 교실의 소녀들이 어떻게 세상에 나아가고 그 속에서 용기와 상처를 얻느냐에 대해 다루고 있다. 무언가를 하면 할수록 계속해서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빗나가는 유키, 자신이 상처를 당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한 아츠코. 이 두 사람에게 삶이란 밤의 곡예고 외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펼치는 연기다.


아쉬운 점은 일본영화의 고질적인 문제다. 일본에는 이야기꾼이 많다. 그래서 좋은 이야기가 넘친다. 하지만 좋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 좋은 그릇을 가진 감독은 드물다. <백설공주 살인사건>이 <예고범>의 나카무라 요시히로, <고백>이 거장 나카시마 테츠야를 만나 때깔 좋게 영화화된 반면 이 작품은 산만하고 지저분하며, 감정선과 이야기의 연결이 약한 부분이 너무 많다. 원작을 영화화 할 때, 연결고리가 약한 부분을 강하게 만드는 것도 감독이 할 일이다. 결과적으로 미시마 유키코 감독은 멋진 원작을 통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지만 여성 감독임에도 불구 여성들의 심리를 스토리에 잘 녹아내지 못했다.

또 다른 고질적인 문제는 일본 젊은 배우들은 연기를 ‘진짜’ 못한다는 것이다. 눈만 크게 뜨고 목소리만 높일 줄 아는 연기를 보여주고 보여주고 또 보여준다.(그래서 일본은 10대 20대 배우들이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이르러서 정착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 혼다 츠바사, 야마모토 미즈키 두 배우는 이런 주인공의 심리 상태에 대한 표현이 중요한 영화에 전혀 어울리는 배우들이 아니었다. 왜 이상일 감독이 <분노>에서 수많은 20대 젊은 여배우들을 내버려 두고 미야자키 아오이를 캐스팅한 걸까? 이야기가 크고 복잡할수록, 그러면서 각각의 인물들이 사연이 있고 그 감정이 강할수록 영화는 배우에게 기대는 경향이 커진다. 대본을 넘어선, 미장센을 넘어선 그 무언가를, 이어지는 감정의 표현을 배우가 해내야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상일 감독은 <분노>에서 모든 주연 배우들을 ‘정말’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로만 캐스팅했다. 그래서 30대 중반의 미야자키 아오이가 동안을 믿고 캐스팅된 것이다.


<소녀> 역시 그렇게 했어야만 했다. 멀뚱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는 두 배우를 보며 누가 마지막 속마음을 터놓기 전까지 그런 감정을 느꼈겠는가. 심지어 두 배우는 신인도 아니다. 둘 다 20대 중반이며 경험이 많은 배우들이다. 이미 그녀들의 연기력은 충분히 보여 졌고 이 작품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럼에도 일본 영화는 이런 고질적인 실수를 반복한다. 애초에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거의 없는 수준이니까 이미지만 보고 캐스팅하는 것이다. 스토리가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싶다면 추천하는 영화다. 하지만 그 이상을 바란다면, 책을 보았을 때의 느낌처럼 깊은 감정에 빠지고 싶다면, 차라리 <고백>을 한 번 더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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