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적으로 생각해 볼 때 남들보다 훨씬 떨어지는 열성 유전자로 태어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반대인 뛰어난 우성 유전자로만 태어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히어로는 이런 뛰어난 우성 유전자로 이루어진 인물일 것이다. <언브레이커블>의 아이디어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대학시절 떠오르는 풋볼 유망주였으나 부상으로 꿈을 접은 경비원 데이빗은 열차 충돌 사고를 당한다. 131명의 탑승객과 승무원들이 모두 죽은 대형 사고였지만 데이빗은 멀쩡하게 살아남는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이빗. 그런 데이빗에게 엘리야라는 남자가 접근한다. 엘리야를 통해 자신이 자신도 모르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흔히 말하는 슈퍼히어로라는 사실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데이빗. 그는 회사에 전화를 하고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그는 단 한 번도 아프거나 지각한 적이 없다. 그러고 보니 대학 시절 분명 사고를 당했는데 왜 이리 몸이 건강한 거지? 그는 몰랐던 것이다. 자신이 남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슈퍼히어로'라는 것을.
이 작품은 우연히 초능력을 가진 세 청년이 겪는 현실적인 초능력자 이야기를 다룬 <크로니클>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정말 현실적인 '히어로물'이다. 헌데 이 현실적인 히어로물이 무서워지는 순간이 있다. 바로 '반전'이다. 이 영화의 색감은 마블 히어로물과 결을 달리한다. 굉장히 어둡고 칙칙하며 정적인 느낌이 강하다. 강한 액션과 흥미로운 기술을 생각하면 실망할 것이다. 다만 반전이 주는 의미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 영화다. 반전에 대한 고민거리, 과연 학교 수업의 '경쟁'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이 부분을 생각한다면 반전에 대해 더 깊게, 그리고 영화가 던지는 질문에 대해 심도 있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7살의 캣에게는 완벽한 엄마가 있다.(그래, 엄마가 에바 그린인데 어찌 안 완벽할 수 있을까.........) 예쁘고, 열정적이고, 청소며 요리며 완벽하게 해냈던 엄마. 엄마는 캣을 너무나 사랑했으나 그녀가 여자로써 눈을 떠갈 무렵, 그녀의 남친에게 접근하는 모습을 보였다. 캣은 직장에서 매력적인 사람인 아버지를 무시하며 가정에서의 답답함만을 호소하는 어머니를 마음 속으로 싫어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사라진 후에도 그 사실에 대해 궁금해 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버진 스노우>는 참으로 매력적인 심리 스릴러다. 1인칭 시점이 가지는 흥미로운 무기는 그 사람의 시점만으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그것이 '거짓'이더라도 관객들은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제공되는 정보가 한정되어 있으니 말이다. 이 영화는 결말부에 몇 번의 반전이 있다. 그 반전은 모두 캣의 심리와 관련되어 있다. 엄마에 대한 질투심, 분노, 화가 가족들은 물론 엄마의 실종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한쪽 방향으로 쏠리게 바꿔놓은 것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한 번 더 보는 재미도 있다. 캣의 시점이 아닌 캣의 엄마의 시점이 되어서 저때 캣의 엄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생각해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무엇보다 가장 흥미로운 건 영화의 반전이다. 결말부에 정말 허탈할 만큼 놀라운 반전이 있다. 이 반전은 왜 엄마가 실종되었는지에 대해 너무나 명확하게 알려주면서 동시에 왜 사건의 결말이 이렇게 날 수밖에 없었는지 명확한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만큼 심리적인 계단을 차곡차곡 잘 쌓아올린 영화다.
타임슬립 영화가 가져야 할 미덕은 교묘한 시간 장난을 통해 각각의 인물들이 다 얽혀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게 타임슬립 영화가 취할 수 있는 장점이며 굳이 타임슬립이라는 소재를 가져온 이유다. 가끔 타임슬립 영화 중 재미없는 작품을 보면 소재만 타임슬립을 가져왔을 뿐, 이런 시간이 줄 수 있는 재미가 전혀 없다. 그러니까 인물들 사이에 꼬아둔 매듭을 풀어낼 자신이 없으니까 처음부터 묶어두지 않은 것이다. <엔터 노웨어>는 저예산 영화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시나리오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참으로 흥미롭다.
조디라는 여자가 남자친구와 함께 은행을 털고 나오던 중 어딘가로 사라진다. 뒤이어 차를 몰고 가던 사만다가 숲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외딴 오두막으로 가게 된다. 사만다, 조디, 톰. 이 세 남녀는 자신들도 모르게 길을 잃어 여기로 오게 되었다. 서로 대화를 나누던 세 남녀는 그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타임슬립이 가지는 가장 큰 힘, 다른 시대의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이게 되고 그들 각자가 선택한 삶이 다른 이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자연스러운 반전이다. 반전의 무게 때문에 길을 잃어버리는 영화들이 많은 반면, 이 영화는 반전이 하나의 흐름이 되어 결말부로 영화를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게 설정되어 있다.
<커퓨>, <떠나기 전 해야할 일>로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알린 감독 숀 크리스틴슨이 쓴 각본은 역시나 매력적이다. 그의 각본은 인간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며 각자의 캐릭터성을 부여, 그들이 엮이는 순간을 흥미롭게 풀어낸다. 아쉬운 점은 <떠나기 전 해야할 일>에서도 느꼈듯이 포인트가 될 만한 부분에서 강한 임팩트를 주지 못한다. <엔터 노웨어> 역시 포인트가 될 수 있는 부분에 더 힘을 주었다면 흥미로운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가진 반전, 그 자체의 힘만은 분명 관객들에게 큰 흥미와 즐거움을 줄 것이 분명하다.
개인적으로 유럽산 범죄 스릴러를 좋아한다. 이들 범죄 스릴러는 소재나 이야기를 풀어가는 면에서 기존의 헐리웃 스타일과 비교했을 때 훨씬 다양하며 독특하다. 그러면서 일본 스릴러가 주는 인간적인 따스함이 결말부에 담겨 있다. 이 작품, <실종: 사라진 아이>는 정말 골 때리는 영화다. 만약 흥미로운 범죄 스릴러를 보고 싶은 분이라면 비추하는 영화지만 장르에서부터 낚는 훅이 강한 영화를 보고 싶은 분들이라면 추천해주고 싶은 영화다.
나쁜 아이들을 데려간다는 악마의 축제가 열리는 이탈리아의 한 작은 마을. 이곳에서 토미라는 4살 된 아이가 사라진다. 아이가 악마에게 잡혀갔을 거라 여기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마누엘과 아내 린다는 고통의 세월 속에서 5년을 보낸다. 5년 후, 기적적으로 숲에서 발견된 토미. 마누엘은 아들을 찾았다는 기쁨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하지만 너무나 낯선 토미의 모습에 린다는 당황하고, 토미는 개를 잔혹하게 죽인다. 혹시 토미에게 악령이 씌인 것이 아닐까. 식당에서도 식당 여주인을 포악하게 폭행하는 토미. 그리고 여주인의 아들은 토미가 토미가 아니라고 말한다. 어차피 미친 애라며 여주인 아들의 말을 무시하는 마누엘.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의심은 심해지고 교회에 들어간 토미는 구토를 내뱉는다.
영화는 초반에는 범죄스릴러의 느낌을, 중반부에는 공포의 느낌을, 결말부에는 드라마의 느낌을 낸다. 한 마디로 복합적으로 장르가 섞인 짬뽕물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장르의 변경 때마다 반전이 크게 작용해 반동은 크지만 거북하지 않게 장르를 넘겨주기 때문이다. 반전도 이중반전인데 첫 번째 반전 때는 공포가 느껴지고 두 번째 반전 때는 가슴이 아린다.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의 변화를 느끼고 싶은 분들이라면 추천해주고 싶다.
가족은 사랑이다. 그리고 아픔이다. 누구나 이 말에 공감할 것이다. 내가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아무 이유 없이 날 지켜주고 위로해 줄 사람은 가족이지만, 동시에 그 무엇보다도 큰 상처와 고통을 주는 것 역시 가족이다. <데이라이트>는 가족에 대한 스릴러 영화다. 가족 때문에 사건에 빠지고, 가족 때문에 위기를 겪으며, 가족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음을 알게 되고, 가족 때문에 다시 사랑을 얻는다.
싱글맘이자 변호사인 이리스는 우연히 자신에게 오빠가 있음을 알게 된다. 어렸을 적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오빠. 알고 보니 오빠는 자폐증을 앓고 있었고 모녀 살해범으로 30년째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있었다. 오빠를 면회한 이리스는 그가 무죄일 거라고 생각하고 사건을 재수사 하기로 마음 먹는다. 하지만 그녀의 사건 재수사를 방해하는 세력들이 움직이고, 이리스는 이 사건이 보통 사건이 아님을 짐작하게 된다.
스릴러적인 구성으로만 보자면 만족스럽지 못한 영화다. 유럽 스릴러 특유의 끈끈하지 못한 긴장감과 마치 북유럽 작품을 보는 듯한 늘어지는 드라마가 일반적인 스릴러 영화에 기대하는 스릴감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결말이 밝혀지는 순간, 그 무엇보다 뜨거운 그리고 차가운 가족의 의미를 알게 되면 그 지겨웠던 순간을 다 보상 받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빌리지>는 참 말이 많았던 작품이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샤말란의 암흑기가 시작되었다는 사람들과 이 작품이야 말로 샤말란의 마지막 명작이며 이 작품의 실패 이후 샤말란이 무너졌다고 보는 사람들로 나뉘었다.(다행히도 요즘 샤말란이 부활에 성공하면서 <빌리지>가 그의 마지막 명작이 될 일은 없어졌다.) 한때 샤말란의 마지막 명작 소리를 들었을 만큼 배역진이 화려하다. 당시 떠오르는 젊은 배우들이었던 브라이드 달라스 하워드, 호아킨 피닉스, 아드리언 브로디와 톱 중년배우 윌리엄 허트와 시고니 위버가 출연했다.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 이 마을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하고 아름답지만 숲속의 괴물 때문에 알게 모르게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한 마디로 이 마을은 괴물과 마을 사람들 사이의 알게 모르게 평화조약이 성립되어 마을 사람들은 숲밖으로 나서지 않으며, 괴물은 마을을 습격하지 않는다. 마을 청년 루시우스는 정신질환을 앓는 노아의 약을 구하겠다고 마을 원로들의 반대에도 숲에 들어갔다 괴물을 만나고 충격을 받아 돌아온다. 그뒤 마을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기이한 일. 이에 마을 사람들은 루시우스 때문에 괴물이 노했다고 생각한다. 노아는 마을의 아름다운 처녀인 아이비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루시우스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 이에 노아는 루시우스를 칼로 찌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야 만다.
마을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노아는 죽게 된다. 하지만 마을 밖으로 나가는 숲에는 괴물이 있다. 아이비는 루시우스를 위해 마을 밖으로 나가기로 마음 먹는다. 사실 이 작품의 반전은 별 거 아닐수도 있다. 하지만 난 이 반전에 개인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샤말란이 진짜 천재라고 생각했던 건 <식스센스>나 <언브레이커블>보다 오히려 이 작품에서 더 강하게 와 닿았다. 인간이 가진 죄악은 타고난 것인가, 아니면 환경이 만들어낸 것인가. 인간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건 공포인가 아니면 자유인가. 사회가 품고 있는 문제를 이렇게 재미있고 흥미있게 풀어낸 작품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괴물 그리고 소녀라는 두 소재의 상반된 의미도 좋았다. 괴물은 공포를 소녀는 순수를 상징한다. 영원한 순수를 잡아두기 위해서는 꼭 괴물의 공포가 필요할까? 그 순수라는 건 영원히 유지될 수 있는 걸까?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가지게 만드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흥행에 성공했다면 샤말란에게 암흑기가 오지 않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에게 이 작품은 분명 야심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야심이 실패했고 무너졌다. 이것이 타고난 천재의 자신감을 무너뜨리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때론 우리는 도덕과 법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모든 법은 도덕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나 모든 도덕이 법에 포함된 것은 아니다. 그러하기에 법과 도덕이 서로 엇깔리는 상황이 올 때가 있고, 그럴 때 난 마음의 양심에 기대어 무엇을 선택할지 물어보게 된다. 한 미혼모가 있다. 그녀는 마약중독자이다. 어느 날 그녀의 딸이 실종되고 이 사건은 매스컴의 주목을 받는다. 아이 엄마의 행실 상 범인이 마약조직과 연관되어 있다고 여기는 사립탐정 패트릭과 앤지. 두 사람은 베테랑 경찰 레미와 함께 사건을 수사한다.
사회문제를 다룬 추리 작품은 줄거리가 그 사회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어야 한다. 이 작품은 작가가 되기 전 아동 상담가로 일했던 베스트셀러 작가 데니스 루헤인의 경력이 잘 묻어나는 원작을 바탕으로 했기에 깊은 물음을 던질 수 있었다. 한 엄마가 있다면, 도저히 아이의 엄마라고 말하기 힘들 만큼 자격이 없는 여자에게 딸이 있다면 그녀가 딸을 키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그 딸 역시 엄마처럼 불행하고 역겨운 삶을 살아갈 것이 불보듯 뻔한 일인데 과연 그 아이를 엄마에게 계속 두는 것이 올바른 일일까?
친권은 그 무엇보다 강하기에 아무리 아이가 부모 때문에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도 빼앗을 수 없다. 우리나라도 최근 아동학대 문제가 큰 이슈가 되었는데 이는 주마다 법이 다른 미국 역시나 마찬가지다. 미국도 아이의 행복할 수 있는 권리와 부모의 친권 사이에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 작품의 반전, 그리고 그 이후의 결말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과연 무엇이 옳은 판단이었는지 말이다.
'몰입도'를 영화의 가장 높은 가치로 생각하는 분들이라면 <리멤버>는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이다. 몰입도적인 측면에서는 이 작품을 능가할 영화가 그리 많지 않으니 말이다. 이 작품의 흥미로운 점은 주인공이 거동도 생각도 느릿느릿한 치매 노인임에도 불구 긴박한 스릴감을 준다는 점이다. 치매에 걸린 거트만은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팔에 번호가 새겨져 있는 그는 과거 유태인 수용소에 갇혀 있었고 수용소에서 가족을 잃었다. 이제 새 가족의 품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해도 될 그이지만 친구 맥스와 함께 자신들의 가족을 죽인 녀석을 용서할 수 없기에 그 녀석을 찾아 죽이기로 마음 먹는다.
살해 방법과 정보제공은 맥스가 그리고 살인의 실천은 거트만이 하기로 한다. 맥스는 몸이 불편하지만 정신이 멀쩡하고 거트만은 치매지만 아직은 몸을 움직일 수 있다. 영화는 거트만의 '모험'을 통해 2차 대전의 기억을 품은 현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직도 그때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독일인, 그때의 고통을 아직도 간직한 노인, 나치 사상에 빠져 히틀러를 경배하는 젊은 청년 등등 다양한 군상들을 보여준다. 거트만이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 그리고 마지막 복수를 꿈꾸는 이유는 분명하다. '싹'은 남겨두면 다시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반전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가 가진 스토리와 아톰 에고이안의 연출이 워낙 출중해 오히려 반전이 방해가 되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굳이 이 자체로도 훌륭한 영화의 흐름을 왜 비틀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반전이 주는 재미만은 확실하다. 마지막 한 방이 있기에 영화 속 숨은 단서들을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은행나무 침대>,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의 성공으로 강제규는 한국 블록버스터의 대가가 되었다. 실패를 모르고 달려오던 그는 <마이웨이>로 크게 미끄러지게 되고 이후 다른 길을 택한다. 바로 감성영화다. 단편영화 <민우씨 오는 날>로 눈물나는 연출을 선보인 그는 <장수상회>로 또다시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앞선 영화들과 다르게 이 영화는 꽤나 잘 알려진 영화지만 100만이 조금 넘는 관객수만을 동원했기에 아쉬움에 넣어보았다.
남을 위한 배려심과 다정함이라고는 전혀 없는 까칠을 넘어 무려한 할아범 성칠은 옆집에 이사온 금님의 환한 미소와 사글사글한 태도에 당황과 동시에 마음의 문을 연다. 어느새 동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금님과 데이트까지 하는 성칠. 두 사람은 노년에 사랑의 꽃을 피워간다. 그래, 이렇게 평범하게 노년의 사랑을 꽃 피웠다면 여기 목록에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반전은 영화 <노트북>을 생각나게 만든다. 다르게 보자면 <굿바이 레닌>과 비슷하기도 하다. 반전 자체만을 보자면 크게 놀랄 것도 없다.
하지만 강제규 감독이 이미 <민우씨 오는 날>에서 선보인 그의 또 다른 무기인 '감성'의 힘은 꽤나 강하다. 가슴 따뜻한 감동이 진하게 밀려오는 것이 겉은 맑고 고운 육수인데 맛은 깊다. 물론 아쉬움도 크다. 연출이 너무 올드하며 유치하다. 요즘 시대에 맞지 않는 방법을 택했고 결국 흥행실패로 이어졌다. 큰 줄기는 단단한데 곁가지가 너무 약하다. 하지만 두 주연배우가 주는 감동만큼은 참 좋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재미있게 보셨다면 <민우씨 오는 날>도 추천하고 싶다. 문채원과 손숙의 연기가 정말 좋았던, 두 배우가 감성을 하나로 포개어 정말 큰 슬픔이 느껴졌던 단편영화다.
<시크릿 윈도우>는 참으로 억울할 영화다. 스티븐 킹의 탄탄한 원작을 바탕으로 했음에도 비슷한 반전의 영화들이 너무 많이 나와서 이 영화가 가진 반전만의 매력을 느끼기가 힘들다. 보면서 '설마 이거?' 했던 게 딱 정답으로 맞춰지니 말이다. 이 작품이 나온 2004년 무렵에도 그런 말이 있었으니 13년이 지난 지금은 더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시크릿 윈도우>를 택한 이유는 하나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조니 뎁이기 때문이다.
배우 한 명이 작품 전체를 바꾸는 경우를 영화에서는 종종 경험한다. <사랑하는 마도리>에서의 아라가키 유이가 그랬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의 강동원이 그랬다. 스토리가 뻔히 예상되는 평범한 작품이 배우 하나에 의해 색깔을 입고 특별함을 가지게 된다. 이 작품에서 조니 뎁은 그런 특별함을 더해준다. 그가 맡은 모트 레이니는 유명 작가다. 그는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고 그 충격으로 이혼을 준비한다.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적이 드문 별장을 향하는 모트.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았다는 충격은 생각보다 컸고 그는 잠으로 이 시간을 이겨내기 위해 애를 쓴다. 당연히 창의적인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에게 찾아온 존이라는 남자는 모트가 자신의 소설을 표절했다고 주장하고 그를 괴롭힌다. 모트는 소설이 자신의 것임을 주장하기 위해 그와 싸우지만 그는 상상 이상으로 강하고 교활하다.
조니 뎁은 모트가 가진 심리적인 아픔과 갈등, 혼란을 아주 섬세하게 표현해냈다. 예측 가능한 스토리임에도 불구 이 영화가 특별할 수 있는 이유는 배우 조니 뎁 때문이다. 그의 연기에 빠지다 보면 반전이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반전의 순간이 오기가 기다려질 것이다. 그의 좋은 연기만으로도 이 작품은 충분히 볼 만한 가치가 있고 또 특별하다 평가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