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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아이피(V.I.P.)> Part 1

북에서 온 낯선 손놈


보기 상당히 망설여졌던 작품이었습니다. 일이 생겨서 예매를 취소했고 이후 이웃 분들 평이 그리 좋지가 않았던 작품이죠. 보러 가는 날 새벽에 배탈이 나서 그냥 집에서 쉴까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올해 (저에게는) 한국영화 최고의 기대작이었던 만큼 극장을 향했습니다. 원래는 리뷰를 한 편만 쓸까 했지만 할 이야기가 많아서 3편 쓸까 합니다. 첫 번째 리뷰는 감상과 분석 위주, 두 번째 리뷰는 이 영화를 둘러싼 여혐논란, 세 번째는 작품이 투영하는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참고로 첫 번째 리뷰는 작품 구성, 줄거리에 대한 생각, 배우들에 대해 주로 다루었습니다.



내가 전부터 계속 주장하던 것이 있다. 한국 예술계는 정말 좋은 소재를 가지고 있다. 헌데 이 소재를 제대로 써 먹지를 못한다. 바로 ‘북한’이다. 김대중 정권 이후 북한과의 우호관계가 성립되면서 북한과 남한과의 관계를 다룬 영화들은 대부분이 감동이나 코믹 코드를 다루었다. 북한을 도발할 수 있는 예민한 내용이나 북한을 악으로 규정짓는 작품은 내 기억에는(메이저 작품에서) 보기 힘들었다.(대표적으로 007 시리즈 중 한 편이 북한을 적으로 등장시켰다 국내에서도 비판 여론에 시달렸다.) <브이아이피>는 ‘북한’을 소재로 한 작품 중에서 ‘소재’면에 있어서는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다.


북한 고위층 자제가 살상을 저지른다. 북한은 말이 공산주의 국가지 사실상 왕조국가다. 김광일은 장성택의 중국 자금을 관리하는 오른팔 김모술의 아들로 그가 북한에서 저지르는 살인 행위는 모두 비밀로 덮어진다. 하지만 장성택이 힘을 잃으면서 김모술이 잡혀가고, 김광일은 해외로 떠돌게 된다. 그런 김광일을 국내로 데려온 것이 박재혁과 그의 상관이며 이 일을 계기로 그들은 필드에서 본사로 들어오게 된다. 즉, 밖에서 일하던 놈들이 사무직이 된 것이다. 헌데 이 기획에는 문제가 있었다. 이 기획을 담당한 폴이라는 미국인은 북한의 중국 자금을 노리고 그를 붙잡아 두지만 살인을 저지르는 취미 때문에 차마 미국에는 못 데려온 것이다.


한국과 북한, 미국의 관계를 이용한 설정이 돋보이는 시나리오는 아쉽게도 초중반에 꽤나 긴 지루함을 준다. <브이아이피>가 초중반을 확실히 잡기 위해서는 김광일을 ‘추격’하는 식으로 시나리오를 이끌어 갔어야 했다. 하지만 박훈정 감독은 확실한 시나리오의 방향을 정해놨기 때문에 추격전으로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에서 연쇄살인을 저지른 범인이 김광일이라는 것이 금방 밝혀지고 그는 잡혀간다. 여기서 박훈정 감독은 경찰과 국정원의 다툼으로 재미를 줄 계획을 세웠다. 그러니까 추격전을 포기한 대신 두 권력기관의 싸움을 다룬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부분이 큰 재미를 주지 못하였다.


<신세계>가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건 배우들의 합이 너무 잘 맞았기 때문이다. 황정민-이정재-박성웅이 주는 케미가 상당했고 그들 한 명, 한 명이 각자의 개성을 너무나 잘 표출시켰다. 이 영화에는 명장면이 참 많은데 그 이유는 배우들이 장면을 잘 살릴 수 있게 서로의 캐릭터를 잘 버무렸기 때문이다. 비빔밥에 비유하자면 재료도 좋은데 섞이기도 참 잘 섞인 경우다. 헌데 <브이아이피>는 반대다. 따로 놀아도 너무 따로 논다. 이 작품에서도 나름 캐릭터들에 개성을 부여했지만 그 개성이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채이도는 과하게 마초적인 성향을 드러내나 기억에 남는 건 지나치게 피워댄 담배뿐이고(느와르에 대한 지나친 오마주라는 생각이 든다.) 소처럼 큰 눈을 지닌 박재혁은 출세 길이 막혀 열이 올라 욕을 내뱉는데 너무나 착해 보인다. 애초에 캐릭터들의 매력이 떨어지고 강한 부분만 표출되다 보니 서로 합을 내는 장면에서 아쉬움이 많다. 그런 느낌이 가장 강했던 장면이 김광일을 채이도가 다시 체포하는 장면이었는데 채이도가 말을 할 때 옆에 있는 박재혁이 내는 합이 전혀 없었다. 어떠한 감정이라도 드러나는 표정이나 제스처를 취했어야 했는데 그저 단역처럼 옆에 서 있기만 했다.


배우들에 대한 디스가 될 수 있겠지만 앞서 관객들이 걱정했던 장동건의 복불복 연기, 그리고 김명민이 드라마와는 다르게 영화에서 뚜렷한 흔적을 남기지 못하는 이유가 너무나 잘 드러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배우 다 범죄 느와르에 잘 어울리는 외형의 소유자들이지만 이를 살리는 캐릭터를 이끄는 힘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중반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경찰 vs 국정원의 구도가 큰 재미를 주지 못하였다. 초반에 충격적인 살인 장면에 비할 때 힘이 지나치게 떨어지는 이유다. 여기에 이 영화가 가진 또 다른 문제점이 있다. 바로 비장함이다. 과한 비장함은 관객을 피곤하게 만든다. <브이아이피>는 쉼표가 없는 영화다. 모든 인물들이 어깨에 힘이 확 들어가 있고 이야기도 무거우니 피로가 더해진다. 느와르의 느낌을 낸 것은 좋았지만 비장함이 과하니 가라앉는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후반부로 향하면서 이야기는 점점 힘을 얻는다. 감독이 의도하는 부분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며 실질적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풀어놓기에 동력이 감긴다. 오락영화보다는 무거운 느와르 스타일을 택했고, 흥미 위주의 살인자 이야기 보다는 복잡한 정치셈법에 대해 풀어놓았다. 그러니 오락성의 측면에서는 기대보다 감소된 측면이 크다. 그러면 정치드라마의 흥미가 강하냐. 또 그런 것도 아니다. 느와르의 느낌을 기반으로 했기에 철저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감독은 후반에 계속 액션을 넣으면서 오락적인 측면을 강조하고자 했으나 무게감 때문에 감소되었고 캐릭터의 합도 부족해 재미적인 측면에서 아쉬운 작품이 되었다.


아이디어, 그리고 감독이 향하고자 했던 방향성은 참 좋았다고 생각한다. 북한이라는 소재를 흥미롭게 풀어낸 것은 물론 이것을 단순히 살인극에만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치 영역으로 확대시키고 의도한 성과를 이뤄냈다는 점은 칭찬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북한에서 온 낯선 손놈, 김광일 역을 맡은 이종석의 연기를 또 빼놓을 수 없다. 예전에 그의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때가 <관상>이 개봉한 이후였는데 이종석의 지인은 그가 <관상>을 보고 자신의 연기를 질책했다고 말했다. ‘내가 나올 때만 흐름이 뚝뚝 끊긴다. 너무 속상하다’ 이 배우, 참 재미있는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신인배우들이 이름 있는 배우들과 촬영을 할 때면 출연한 것만 해도 영광이라 여기고 많이 배웠다는 식으로 생각하거나 인터뷰를 한다. 헌데 그는 냉정하게 자신의 연기를 바라보았고 얼마나 부족한지 스스로 인식하였다.


그가 연기 못한다고 욕먹는 모델 출신들 중 가장 안정적인 연기를 선보이는 것은 물론 젊은 남자배우들 중 가장 빨리 성공을 거둔 건 결코 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도 그는 꽤나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우아하고 기품 있으면서 사악하고 악독한 두 얼굴을.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여주다가도 이를 갈며 총구를 들이미는 이중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었다. 여기에 하나 더 그를 칭찬해주고 싶은 건 이 김광일이라는 악역이 관객들에게 호의적으로 어필할 매력을 갖추지 못한 캐릭터임에도 선택했다는 점이다. <브이아이피>를 보고 나면 기분이 더럽다. 이 기분이 더러운 이유는 악역이 정말 쓰레기고 이 쓰레기를 죽여 봐야 아무런 여운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구더기가 가득 담긴 썩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나면 저게 한 때 우리 집에 있었다는 찝찝함만 남을 뿐이지 개운하거나 속 시원한 기분 따위는 들지 않는다. 그에게 김광일 캐릭터의 선택은 그 어떠한 이득도 남지 않을, 오히려 관객들로 하여금 더럽다는 생각만 들게 만드는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 캐릭터를 연기했고 작품에서 주고자 하는 느낌을 잘 표현해냈다.


아마 보신 분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많이 갈릴 것이다. 그만큼 장르적 쾌감과는 거리가 멀며 캐릭터가 약하고 재미를 주는 요소가 적은 반면, 소재나 이야기가 신선하고 영화가 주는 느낌이 취향저격이 가능하기에 다른 느낌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브이아이피>는 불호다. 내 기대가 너무 컸던 것도 있었지만 좀 더 흥미로울 수 있었던 이야기를 너무 지겹게 이끌어간 면이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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