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브이아이피(V.I.P.)> - Part 2

여혐 논란, 무엇이 문제인가

1. 미국 영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D.W.그리피스의 명작 <국가의 탄생>은 KKK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남북전쟁 이후 흑인들이 난동을 부려 백인들을 습격하고 이를 막기 위해 KKK단이 흑인들을 소탕하는 영웅담을 다루고 있다.


2. <마티>는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에 빛나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한 노총각의 사랑 이야기를 유쾌하면서도 가슴 졸이게 표현한 이 작품은 못생긴 노총각과 못생긴 여자의 사랑 이야기다. 마티는 주변 친구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자신보다 못하다는 말을 듣고는 방황한다.


3. <래기스>의 주인공 메간은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가지 못한, 별다른 꿈 없이 살아가던 여자였다. 하지만 아니카와 그녀의 아버지 크레이그를 만나면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자아를 확립한다. 그리고 한 동안 나타나지 않던 그녀는 불쑥 나타나 남자친구에게 말한다. 우리 그만 헤어지자고. 넌 내가 성숙하지 못했을 때 만난 미성숙한 사람이라는 듯이.


예전에 시를 한 편 쓴 적이 있다. 그 시에 ‘벙어리’라는 단어를 넣었는데 별 생각이 없었다. 문학 작품에서 흔히 많이 등장하는 용어라 생각했다. 그런데 교수님은 ‘벙어리’라는 단어를 지적했다. ‘세상이 갈수록 나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고 문학도 그런 방향을 따라야 한다. 네가 앞으로 글을 쓸 생각이라면 단어를 통한 편견을 야기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이때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항상 사회는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다녔던 내가 편견을 조장할 수 있는 단어들을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 코미디 시커먼스, 일류 개그맨들이 아무렇지 않게 했던 상대에 대한 비하, 신체를 때리는 가학적인 웃음코드 등은 요즘 먹히지 않는다. 이제 사람들은 그런 것에 웃기 보다는 불편함을 느낀다. 시대에 따라 논란이 되었던 작품들이 있었고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다시 평가받는 작품들이 있다. 미국 영화의 아버지 D.W.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은 미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손꼽히는 영화다. 하지만 이 작품의 내용은 참으로 거지같다. 남북 전쟁 후 링컨이 노예 해방을 선언하고 흑인들은 백인들에게 폭력을 가한다. 이전까지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오던 백인 가정은 흑인들에 의해 무너지고 폭력과 겁탈의 위협에 노출된다. 놀랍게도 이 ‘위기의 백인들’을 구하는 건 KKK단이다. 말을 타고 나타난 주인공이 흑인들을 죽이고 평화를 가져온다는 무용담은 개봉 당시에 큰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교수들은 이 영화를 가르칠 때 이런 문제되는 부분은 제외한 채 작품이 가진 영화적인 기법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만을 설명한다.



어느 작품이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제가 될 만한 부분들이 보인다. 이는 당시 시대가 통용하는 가치가 반영된 것일 수도 있고 문제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 감독의 사상과 생각 때문에 그런 내용이 담겼을 수도 있다. <브이아이피> 역시 큰 논란에 휩싸였다. 바로 ‘여혐논란’이다. 이 영화의 네이버 평점을 보면 추천이 많이 박힌 140자평 대부분이 여혐과 관련된 내용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악역 김광일은 여자를 잔혹하게 고문한 뒤 살해하는 살인마이고 이는 여성 관객들에게 상당한 불편함을 안겨주었다는 것이 여혐의 요지다. 단순히 말만 듣는다면 ‘왜 이리 난리야?’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의 초반 장면, 북한 소녀를 나체로 벗긴 채 잔혹하게 폭력을 가하는 김광일과 그 일행들의 모습은 분명 관객들에게 불쾌감을 주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진 장면이다.


불쾌감을 줄 의도가 없었다면 그렇게 선정적이고 잔혹하며 길게 컷을 붙일 이유가 없었다. 캐릭터의 강조를 위한 장면일지는 모르겠지만 보기 불편한 부분이었고 의도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여성이 연쇄살인마에게 살해를 당한다는 내용의 작품들은 많다. <쎄크리파이스>가 그랬고 <향수>도 그렇다. 하지만 이런 영화들에게는 ‘여혐’의 프레임이 씌워지지 않는다. <브이아이피>가 유독 욕을 먹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불쾌함이다. 앞서 말한 두 작품, <쎄크리파이스>의 경우 여성만을 살해하는 동기가 분명하고, <향수> 같은 경우에는 살인의 잔혹함 보다는 작품이 가진 슬픔과 고통의 감성이 진하다. 반면 <브이아이피>는 잔혹함만을 강조했다. 김광일이 ‘꼭’ 여자를 그렇게 잔혹하게 죽여야만 하는 정당성은 없다. 그는 그냥 싸이코고 그것이 취미다. 김광일 입장에서 말하자면 ‘난 감독이 그리 설정했기에 여자를 고문해서 죽이는 것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토리의 군데군데 이미 김광일이 얼마나 잔혹하고 차가운지가 잘 드러나 있다. 굳이 초반에 그런 장면을 넣지 않았더라도 캐릭터의 설명이 가능했다. 즉, 그 장면은 감독의 의도고 이는 캐릭터에 대한 임팩트 보다는 불쾌함만을 가져왔다.


이 불쾌함이 지나치게 심화된 건 최근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사건들 때문이다. 강남역 살인사건, 둘레길 살인사건, 수원역 어깨빵 남, 왁싱샵 살인사건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여성들 스스로가 생존권이라는 단어를 가져와 운동을 벌이고 있다. 겉보기에는 과장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최근 언론을 장식했던 굵직한 사건들이 모두 여성과 관련된 사건들이였으며 그들이 희생된 사건이었기에 여성들이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여성들의 페미니즘 운동은(참고로 난 이 페미니즘 운동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여성의 권위를 올려 양성평등을 이루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 이상을 나아간 여성의 특권을 주장하는 페미니즘은 남성 입장에서 그리 달갑지 않은 건 사실이다.) 커뮤니티 사이트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했고, 방법이 어찌되었건 간에 소정의 성과를 이뤄냈다. 이제 그들의 운동은 예술문화계로까지 진출했다.


그 대표적인 운동이 최근 있었던 문학계의 비리에 대한 폭로다. 이 과정에서 많은 문학인들이 문학계에 진출하거나 이름을 얻기를 원하는 여성들을 성적으로 희롱한 사실이 드러났으며 이는 많은 여성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충무로가 남성 위주의 영화만을 제작한다는 사실 역시 예전부터 많은 불만을 가져왔다. 갈수록 여성은 전형적이거나 작위적인 캐릭터로 등장하며, 나중에는 블록버스터 영화의 전형적인 인물상 혹은 남성의 폭력에 희생되는 입장으로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그 시범 케이스로 걸린 작품이 <청년경찰>이다. <청년경찰>은 여성이 폭력에 당하는 역할로만 묘사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그 비판에 불을 지른 것이 <브이아이피>다. 이미 여성들의 시선이 영화계로 넘어가고 시범 케이스로 <청년경찰>이 잡혔는데 거기에 <브이아이피>가 제대로 걸린 꼴이다.


하지만 이런 논란이 썩 달갑지는 않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이는 대부분의 장르 영화들이 반복하는 클리셰에 가깝기 때문이다. 연쇄살인범이 등장할 때, 여성을 죽이는 건 잔혹함을 강하게 나타내기 위해서다. 미국산 공포영화가 금발에 아름답고 육감적인 여배우를 꼭 초반에 죽이는 이유가 있다. 인간의 심리와 관련된 부분으로 공포감과 잔혹함을 더 강하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연쇄살인범이 남성을 죽인다면 이는 강인함과 관련되어 있다.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과시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식으로 묘사된다. <브이아이피>가 여성을 죽이는 살인마로 설정한 이유는 확실하다. 김광일은 잔혹한 캐릭터이며 그의 잔혹함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여성을 더 잔혹하게 죽이는 상황설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비록 초반 장면은 너무 과했지만 작품 내에서 여성을 죽이는 설정은 욕 먹을 설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장르가 가지는 클리셰는 의외로 견고해서 함부로 색다름을 시도했다가는 원하는 감정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감독이 과한 면이 있기는 했지만 ‘왜 작품에서는 여성만 죽어야 되냐?’는 불만으로 영화를 매도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성들이 이런 불만을 가지는 점 역시 충분히 이해가 간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치안이 좋은 국가다. 하지만 작정하고 저지르는 살인을 막기는 힘들다. 누군가를 ‘혐오’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칼을 겨누는 행동이다. 혐오는 분노를 낳고 분노는 충동을 낳는다. 분노한 이들이 많아질수록 그 대상은 더 위협에 노출된다. 그리고 그 대상은 그저 ‘성별’이라는 이유로 내가 될 수도 있다. 여혐이 지속된다면 그 반대인 남혐도 활발해질 수밖에 없다. 집단이 뭉치면 힘을 가지고 힘은 칼이 된다. 그 칼은 이미 남성들을 향하고 있고 남혐 운동 역시 진행되고 있다. 극단이 또 다른 극단을 낳은 꼴이다.


결국 국가차원에서 혐오를 조장하는 일을 막는 것밖에 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항상 더 나은 방향으로 향해가야 한다. 편견을 없애고 고통을 희석시키며 아픔을 나누고 같이 울어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장르적 클리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인정이 필요하다. 예술에는 자유가 필요하며 이 자유는 수위를 지키는 하에서는 용인되어야 한다. <브이아이피>의 수위는 높았지만 사회적으로 통용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 사회의 분위기가 이 작품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고 작품 외적인 부분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한다.(감독이 좀 과하기는 했지만 싸이코, 정신병자라는 말부터 이 영화가 시각적 포르노에 불과하다는 말은 좀 심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예술에 있어 표현범위는 넓어진다. 어차피 제대로 돌아가는 세상에 예술이란 하나의 상상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예술은 선전도구가 되며 편견을 가르치는 위험한 수단이 되고야 만다.



<마티>와 <래기스>는 오늘날 통용되기 힘든 가치를 지닌 영화들이다. ‘못생긴 사람은 못생긴 사람하고만 이어져야 해’와 ‘내가 자아를 찾는 건 연인을 차는 합당한 이유가 될 수 있어’라는 생각은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하지만 사회가 못생긴 사람들은 못생긴 사람들끼리 놀아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기에, 내 마음대로 상대방을 차는 건 욕 들어먹을 행동이기에 치우친 편견으로 보는 것이 아닌 이 작품이 가진 재미를 해석하고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 가능한 것이다. 여혐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혐오를 없애야 한다. 편견이 만든 장벽은 모든 시각을 편협하게 만들고 갈등을 조장하고 부추긴다. 그리고 다른 사람 또는 집단을 증오하고 싫어지게 만든다. 세상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된다. 예술가들 역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조심을 기울여야 되겠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들 또한 이런 마음가짐을 항상 품고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이전글 <브이아이피(V.I.P.)> Part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