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리고 세상-2. 윈드 리버
주의 : 글에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년 미국 영화계에 대해 내가 던진 화두는 ‘분노’다. 난 트럼프의 당선이 미국인들이 느끼는 분노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이 분노가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어찌되었던 ‘대통령’이란 자리는 그 시대가 택하며 트럼프는 현재의 미국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헌데 작년에 다른 분류로 묶기는 했지만 마음에 걸리는 영화가 한 편 있었다. 바로 <로스트 인 더스트>다. 이 작품은 서부라는 미국의 시작을 상징하는 공간이 ‘자본’에 의해 변해버린 모습을 보여준다. 난 이 작품을 ‘구조에 빠진 미국’이라고 칭했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미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는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현재 미국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그들 나라의 탄생은 원주민을 몰아낸 백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들은 이런 역사의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적극적인 이민정책을 폈고 미국은 다양한 인종들이 함께 살아가는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미국 내부의 인종차별은 여전하고 대놓고 인종차별 정책을 예고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면서 ‘남의 집을 빼앗고 그 자리를 차지한’ 그들의 정체성에 의문을 달게 만들었다. 이는 총기도 마찬가지다. 알다시피 미국은 땅이 어마어마하게 크다. 그리고 집과 집 사이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다. 이런 거리적인 요인은 경찰이 오는데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그래서 미국은 스스로를 보호할 총이 필요하고 자력구제에 대한 범위가 넓다. 하지만 이보다 더 강한, 총기에 대한 문제가 매년 끊이지 않음에도 이를 규제할 수 없는 이유는 이들의 정체성과도 연관되어 있다.
미국은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세운 국가고 이 과정에서 서부 시대를 맞이했다. 집집마다 총을 가지고 있었고 이 총은 인디언들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주는 무기였다. 어찌 생각하면 총은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했던 미국인들의 ‘상징’ 그 자체다. 하지만 이 정체성을 유지하기에 문제가 너무 많다. 여기에 미국은 다양한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이 부분은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음 침공은 어디?>를 참조하시길 바란다. 이 부분까지 쓰면 영화소개 전에 서론이 너무 길어지게 된다.) 이런 때에 <윈드 리버>라는 이 스릴러 작품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영화만큼 ‘정체성’에 대해 강한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도 드물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작품에서 무슨 정체성? 그것도 미국의?’ 그래, 이 작품은 미국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기 보다는 인디언들이 겪었던 참상을 하나의 살인사건을 통해 은유적으로 풀어내고 있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미국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건 예의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미국은 이 작품 속 인물들과 비슷한 처지에 처해 있다. ‘자신들의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윈드 리버라는 인디언 보호구역을 배경으로 한다. 이곳은 눈이 많이 쌓이는 지역이다. 야생동물 헌터 코리는 작품 초반 늑대를 사냥하는데 이 장면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늑대, 퓨마 등등 야생에서 살아야 하는 동물들이 인간의 마을에 들어와 가축을 잡아먹고 결국 죽음을 당한다. 이는 야생의 영역에서 살 곳을 잃어버리고 결국 인간의 마을까지 내려온, 살 곳을 잃어버린 인디언들의 처지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그들의 처지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이 바로 살인사건이다. 한 인디언 소녀가 피를 토한 채 죽어 있는 걸 코리가 발견하고 신입 FBI 요원 제인을 중심으로 수사가 진행된다. 인디언이 죽었으니 인디언에 대한 탄압을 다루고 있겠구나 라는 유추는 쉽게 할 수 있다.(더군다나 공간도 인디언 보호구역이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코리의 감정 변화다. 나탈리의 부모님은 딸의 죽음에 절규를 하는데 코리에게는 이 모습이 남일 같지 않다. 그 역시 3년 전 딸을 잃었다. 결국 이들의 고통은 한 사람의 고통이 아닌 ‘공동체의 고통’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코리가 수사에 동조하는 부분은 백인인 제인과의 ‘화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 공동체의 고통을 끊기 위해 스스로 나선 것이다.
왜 이들에게 이런 고통이 닥친 것일까? 이 부분은 두 가지 시점에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앞서 줄기차게 말했던 서부극, 두 번째는 <로스트 인 더스트>를 통해 예로 들었던 자본이다. 쫓겨난 인디언들은 특정한 지역에서만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그들이 밀려난 지역은 도시의 외곽이다. 중심에서 밀려난 이들은 그들의 권리를 존중받을 수 없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점점 살아갈 공간을 빼앗긴 동물들이 ‘칩입자’로 간주되어 ‘사살’을 당하는 거처럼 인디언들 역시 ‘동물’처럼 침입자로 간주되는 고통을 겪게 된 것이다. 이 눈은 그들의 것이다. 하지만 인디언 소녀가 트레일러에 발을 들이미는 순간, 그녀는 ‘침입자’가 되어버린다.
자본 역시 이들의 삶을 망친 요소 중 하나다. <로스트 인 더스트>에서 서부의 풍경을 자본이 바꿔버린 거처럼 이 눈 위의 잔혹한 사건 역시 시작은 자본에서다. 벌이 때문에 이곳에 온 이들 때문에 사건이 발생했고 그들 때문에 100년을 넘게 하얗게 바닥을 덮었던 눈의 풍경이 변했다. 특히 나탈리의 오빠를 비롯한 젊은이들이 마약 등으로 자신을 망치는 모습은 자본으로 인해 변해버린 인디언들의 삶과 새하얀 눈마저 바꿔버리려는 잔혹한 자본의 성질을 보여준다. 눈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 빼놓을 수 없다. 작품에서 눈은 수사를 방해하고 힘들게 만드는 스릴러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하지만 작품 전체의 의의로 볼 때 눈이란 잔혹한 안대와 따뜻한 이불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눈은 모든 걸 덮어버린다. 고통도, 아픔도, 치욕도.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깨끗하고 아름다운 풍경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동시에 고통과 아픔을 덮어버림으로 더 이상 괴롭지 않게, 따스하게 우리를 안아준다. 이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듯이 새하얀 풍경을 보여주며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영화의 결말은 이 눈의 성질과 참 잘 맞아 떨어졌다고 본다. 차갑고 아프지만 동시에 따뜻하다. 고통이 눈에 묻힌 거처럼 그들의 아픔 역시 눈에 묻어버린다. 자, 그러면 여기서 다시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결국 이 작품은 눈이 가지는 공간성을 통해 인디언들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눈 속에서 다시 한 번 삶을 꿈꾸는 그들을 통해 말이다.
하지만 이런 정체성은 숲속의 공간마저 잃은 채 인간들의 세상으로 밀려나 결국 죽임을 당하는 야생의 동물들처럼 서늘하기만 하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다. 테러의 위협 속에 몇몇 정치인들의 행동이 민주주의의 근간인 자유와 평등을 앗아갔고 자본의 위협이 평화와 사랑을 이야기하던 미국의 입을 차별과 분노를 말하게 만들었다. 마치 어디서도 자기를 찾을 수 없기에 더 극단적으로 혐오를 외쳐 스스로를 증명하는 이들처럼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고 있는 꼴이다. 미국은 원주민들의 역사를 지우고 그곳에 새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새겼다. 이 정체성은 과거의 반성이며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기 위한 기준이다. 그들 스스로 세운 이 기준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살 곳을 잃어버린 야생동물들처럼, 피를 흘리며 죽어간 인디언 소녀처럼 또 다른 희생을 만들어낼 뿐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