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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에 빠진 '미국'을 말하다

영화, 그리고 세상 - 15. <로스트 인 더스트>, <라스트 홈> 外

                                                                                                                                                                                                                                                                                                                                                                                                                                                                                                                                                                                                                              

2016년, 미국 대선은 충격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언더독이자 괴짜인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하며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이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으며 전세계를 충격에 몰아넣었다. 몇몇 사람들은 트럼프라는 인물에 대해 다른 평을 내리며 미국의 선택을 '위대하다' 포장하려고 하지만 그는 인사정책에서부터 잡음을 내고 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당선에 대해 미국 백인남성들의 '기득권에 대한 염증'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득권은 그들의 층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고 경제위기는 고위층이 아닌 중산층의 몰락을 가져왔다. 오늘은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만들어낸 미국 사회의 구조를 이 세 편의 영화를 통해 이야기 해볼까 한다.

돈, 돈, 돈, 돈........ 돈이 없어 문제야!


<로스트 인 더스트>의 형제 토비와 태너는 은행강도다. 전과자인 형 태너는 그렇다 쳐도 전과 하나 없이 깨끗한 동생 토비가 은행강도 일에 가담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혼남인 토비는 가족을 부양할 능력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빚 때문에 어머니의 유산인 농장마저 차압당할 위기에 처한다. 이에 동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형 태너는 토비와 함께 은행강도 일을 한다. 그들이 가면과 총을 든 이유는 하나다. 돈이 필요해서.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다. <라스트 홈>의 데니스 역시 돈 때문에 심각한 상황을 겪는다. 싱글 대디인 그는 주택 대출금 연체 문제로 홈리스가 되고 만다. 단 2분 만에 가족들과 함께 단란하게 살아가던 집을 부동산 업자에게 빼앗긴 것이다. <머니 몬스터>의 카일은 더하다. 그는 경제쇼 <머니 몬스터>를 보고 투자를 했다가 하룻밤에 8억 달러를 날린다. 

이 세 작품의 주인공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첫째,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처한 '경제적인 위기'를 '폭력'으로 타개하고자 한다. 토비, 태너 하워드 형제는 은행강도 일을, 데니스는 부동산 업자 릭을 도와 용역 일을, 카일은 총을 들고 경제 쇼 머니 몬스터의 사회가 릭을 인질로 잡아 자신들의 위기를 이겨내고자 한다. 이들의 두 번째 공통점은 그들이 모두 자본주의의 희생양이라는 점이다. 하워드 형제는 태어나면서부터 '목장' 말고는 가진 것이 없어 지긋지긋한 가난과 싸워야만 했다. 서부의 로맨틱한 카우보이는 개뿔, 마치 대한민국의 죽어가는 농민들처럼 미국 서부의 카우보이들 역시 가난이라는 지독한 '끈'을 끊지 못하는 구조 속에 갇혀 있다. 데니스와 카일은 자본이라는 보이지 않는 흐름 속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린다. 데니스는 연체금을 갚지 못했다면서 단번에 집을 잃어버리고 카일은 주가 조작의 농간 속에서 시장의 흐름과는 다르게 거액을 하룻밤 사이에 날려버린다. 예전처럼 집에 돈을 모아두는 구조가 아니기에 국제시장의 흐름에 따라 '자본'이라는 것은 마치 생명처럼 흐름을 달리한다.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너무나도 가혹한 '희생자'들을 만들어낸다.

서부, 집, 방송....... 미국이 무너진다


예전 헐리웃 영화계를 대표하던 장르는 서부극이었다. 미국의 시작이 개척으로 이뤄진 만큼 그 시대를 다룬 서부극은 '미국'을 상징하는 하나의 키워드였다. 하지만 이 서부극은 서부극의 영웅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를 통해 영화의 장르로써 무너지게 된다. 고바야사 마사키가 <할복>을 통해 사무라이의 정신을 무너뜨린 거처럼 이스트우드는 <용서받지 못한 자>를 통해 서부극 영웅들의 정신을 부정한 것이다. 그리고 <로스트 인 더스트>는 '자본'을 통해 서부극을 무너뜨린다. '미국의 개척자들이여, 당신들이 말과 총으로 정복한 이 땅이 이제는 돈에 의해 정복 당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더 이상 서부극에 열광하지 않는 이유? 그들 역사의 정신이 자본에게 먹혀 버렸는데 왜 요즘 세대가 서부극에 열광하겠는가? 이것이 잔혹한 현실이며 미국이 처한 현실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디언과 나이든 보안관 마커스는 이런 역사의 흐름을 보여준다. 마커스는 화려한 간판과 불빛에 휩싸인 서부에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볼품없는 육체는 범죄자를 쫓는 멋진 '보안관'의 모습이 아닌 이제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낡은 것'을 의미한다. 이런 낡은 것과 함께하는 존재가 그의 인디언 파트너 경찰이다. 은퇴를 앞둔 나이든 보안관과 역사 속에 사라진 인디언. 어쩌면 그들은 이 서부에 남은 마지막 '로망'을 지키기 위한 존재들일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이 두 사람을 모두 퇴장시켜 버린다.

집은 안식의 공간이다. 집이란 자신의 공간을 의미하며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들(가족이나 친척, 애완동물 같은)이 머무르는 공간이기도 하다. 집이 없다는 것은 불안을 의미한다. 평안을 위한 개인의 사적인 공간이 사라지는 것은 인간이 가진 사적 영역의 파괴를 가져온다. <라스트 홈>은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를 '집'을 통해 이야기한다. 집을 잃어버렸다 라는 것은 안정과 평안은 물론 가족이라는 작은 국가의 개념이 무너진 것을 의미한다. 서브프라임이 가져온 중산층의 붕괴에 대한 실감은 '집'을 통해 더 크게 다가온다. 살 곳이 없다는 것만큼 절망적인 일은 없다. 특히 미국에서의 집이란 자신의 앞마당이며 자신이 지켜야할 공간이다. 미국의 총기 자유가 왜 허용 되겠는가? 이는 앞서 <로스트 인 더스트>에서 말한 서부 정신의 연장선, 개척시대 당시 자신의 집 앞마당은 자신이 지켜야 한다는 미국 탄생의 역사가 가진 정신에서 비롯된다. 헌데 총을 통해서 자신들의 앞마당을 지켜왔던 미국인들이 '돈' 에게 자신들의 앞마당을 빼앗긴 것이다. 

미국의 언론은 세계에서 가장 자유롭고 민주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민주주의의 최전선에 있는 나라가 미국이며 사회의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언론인의 자세가 많이 보고 된 국가이기도 하다. 올해 초 개봉한 <스포트라이트>의 경우 미국 저널리즘의 정신을 가장 잘 보여준 영화이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의 모든 방송들이 이런 '정의로움'에 기초한 것은 아니다. 미국의 방송 역시 '자본의 늪'에서 빠져있다. <머니 몬스터>의 리는 주가조작에 대한 정보를 속인 것은 아니지만 이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아보지도 않고 그저 '방송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방송인이다. 그는 주가라는 것이 언제나 변할 수 있고 갑자기 폭락할 수도 있다고 여기며 IBIS 주가 폭락 사태를 카일을 만나기 전까지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분야의 '전문방송'이라면 적어도 '사건'에 대해 명확한 '분석'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머니 몬스터'는 세계 금융시장의 정보를 주는 시장을 '주도'하는 방송임에도 불구 이에 대한 조사가 부족했고 그저 기업에서 해주는 소개에 맞춰 추천을 해주는 방송에 불과했다. 이는 미국이 가진 저널리즘 정신을 상실한 채 그저 '선동기관'으로 방송이 전락해 버렸음을 보여준다. 

너무 아픈 미국, 그리고 트럼프


미국의 고전영화들을 보다 보면 그들의 '자본주의'에 대해 경고하는 작품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 장르를 불문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경계가 당시의 시대정신처럼 담겨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미국 영화계는 자본주의에 대한 경고를 잊어버렸다. 그들은 자본의 맛에 취했고 더 큰 자본을 굴리는 데만 신경을 썼다. 그리고 자본주의에 의해, 자본을 가진 이들의 구조에 의해 미국이 망가지자 이제야 지독한 자본주의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만든 구조는 전형적인 가진 사람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다. 그들은 낙수효과를 주장하며 자신들의 잔에 술을 가득 채우면 너희들의 잔도 채울 수 있다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잔을 가득 채우고 새로운 포대를 가져와 계속 잔을 채울 뿐, 술을 흘리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들의 채운 술 포대는 철저히 지키면서 술 한잔 먹기 위해 세워 둔 유리잔은 쉽게 깨질 수 있게 내버려 둔다. 이런 구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가 <라스트 홈>이다. 미국의 경제가 망해도 죽는 건 중산층일 뿐, 부유층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 중산층은 집이라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홍수에 휩쓸리지만 부유층은 방주에 탄 채 밖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신경도 쓰지 않는다. 결국 무너진 중산층을 챙겨주는 건 사회를 지배하는 1%가 아니다. 낙수효과는 없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자신들이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미국 중산층들에게 힐러리와 그녀를 비호하는 언론의 행태는 반감을 가져왔을 거라고 본다. 수많은 언론기관이 트럼프를 공격했다. 하지만 이미 '방송'이라는 것은 있는 사람들을 대변하며 자본의 논리에 휩싸였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머니 몬스터>를 통해 보았듯이 그들에게 '위기'가 닥치지 않고서야 본질을 파고들 생각 따위는 없으며 주어진 것을 받고 읽는 앵무새들에 불과하다. 어쩌면 미국인들은 힐러리로 대변되는 미국의 1%를 무너뜨리고 다시 '미국의 정신'을 되돌리고 싶어했던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들에게 힐러리는 트럼프보다 더 '악한' 후보로 여겨졌는지 모른다. 자본이 먹어버린 미국의 정신, 서부의 개척 역사를 돈으로 씻어버리고 그 역사를 만든 '미국 백인 남성들'을 길거리로 내몬 소위 상류계층들을 그들은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내가 미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왜' 트럼프를 택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여기는 한국이고 보이는 자료로 분석하는 것보다 더 깊은 그 나라만의 감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미국이 가진 아픔이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보다 더 크다는 것이 이번 대선 결과 뿐만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한국사회 구조의 문제를 말하다 <두 남자>


앞서 살펴본 작품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미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다뤘다는 점이다. 사회 1%가 지배하는 구조, 그 1%의 뜻과 의지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구조. 이 '구조'라는 것은 철저하게 만들어진 것으로 인간의 삶은 구조에 따라 달라진다. <두 남자>는 한국사회의 구조적 문제 때문에 밑바닥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두 남자에 대해 다루고 있다. 가출팸 리더인 진일과 불법 노래방 업주 형석. 이 둘은 겉보기에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쓰레기처럼 보일 수 있지만 성훈의 존재 하나로 이 두 사람이 사회의 구조에 갇힌, 결국 바닥을 길 수밖에 없는 역할을 맡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일은 가영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지만 결국 그를 쫓는 성훈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형석 역시 아무리 강력한 육체와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다고 해도 '법으로 하자'는 사채업자 친구의 위에서 노는 성훈을 당해낼 수 없다. 그들이 성훈을 이길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다. 그가 소위 말하는 '금수저'이기 때문이다. 어떤 잘못을 해도 돈으로 빠져나오며 사람을 부림에 있어 돈이 많기에 망설임이 없다. 생각해 보자. 형석과 진일 위에 이런 금수저, 아니, 그들보다 나은 조건의 사람들이 하나 둘 쌓이기만 해도 그들은 위로 올라갈 수가 없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이야기가 이미 옛날이 되어버린 한국 사회의 씁쓸한 이면을 이 두 남자는 보여준다. 진일은 가영을 구하기 위해 핸드폰을 훔치고, 사기를 치며, 형석은 사채업자 친구 말을 듣다가 날린 돈을 만회하기 위해서 여자장사를 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깨끗하게 살아라'는 말은 사치이며 오만이다. 사회가 더러운데 개인이 깨끗해져 봐야 그 구조를 어떻게 깰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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