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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을 위한 쉼표 하나, 켄 로치 감독을 말하다

영화, 그리고 세상 - 20. <레이닝 스톤>, <빵과 장미> 外

                                                                                            

사회에 있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구성원이지만 가장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은 '노동자'일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권리를 무시당하고 짓밟힌다. 우리나라의 경우 노동자들이 시위라도 할 때면 그들에 대한 비난여론이 언론을 장식하며 법에 명시된 권리가 지켜지지 못하는 것은 물론 과대한 배상금 책임으로 '노동운동'은 물론 노조 가입조차 꿈꾸지 못하게 만든다. 심지어 이런 노동자들을 '빨갱이', '귀족노조'라 명명해 비난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 노동자들이 누려야 되는 그들의 권리가 마치 '좌파라는 색깔을 가진 정치적 활동'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노동자들을 위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드물다. 설령 만든다 하더라도 그들이 처한 환경을 보여주는데 그칠 뿐, 문제의 '본질'에 대해 파고 들어가지는 않는다.즉, 현상은 있되 본질은 없으며, 울분은 있되 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이는 노동자들의 편에 서는 것이 마치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보여주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50년 가까이 오직 '노동계급'을 위한 영화를 만든 감독이 있다. 78살의 고령에도 '노동자들을 위한 쉼표 하나'를 위해 영화를 만든 감독 켄 로치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숨기지 않은 감독이다. 


켄 로치 감독은 트로츠키주의자이다. 흔히 '공산주의'라 하면 레닌과 스탈린을 생각하는데 레닌 이후 정권은 스탈린이 잡게 되지만 사실상 '공산주의'라는 사상 그 자체에 더 충실하고 가까웠던 인물은 트로츠키이다. 이런 트로츠키주의자인 켄 로치 감독은 영국의 프리시네마 운동의 세대 중 한 명이며 단 한 번도 자신의 이런 정치적인 성향을 숨기거나 변형시킨 적이 없는 감독이다. 67년 <불쌍한 암소>로 본격적인 감독 생활을 시작한 그는 한 노동자 가족의 애환을 담은 작품 <케스>로 주목받게 된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매'로 상징되는 소년과 그런 소년의 앞길을 막고 방해하는 기성세대, 결국 그들에 의해 매가 죽게 되는 과정을 다룬 이 작품은 이후 노동계급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켄 로치 감독의 세계관을 잘 보여준다.


<가족생활> 등의 작품을 만들며 70년대에 일관되게 노동계층에 주목하는 모습을 보여주던 켄 로치 감독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대처 정권에 의해 작품의 검열이 심화되면서 '주요 검열 대상자'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 노조 운동을 다룬 4부작 다큐멘터리 <리더십의 문제들>과 광부들의 애환을 다룬 <당신은 누구의 편입니까?> 등등 많은 작품들이 검열의 대상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켄 로치 감독은 자유로운 작품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70년대 영국은 극심한 경기침체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에 79년, 영국의 총리에 오른 보수당 출신의 마거릿 대처는 공공지출 삭감, 관료와 노조 권한의 감축, 탈규제, 공기업의 민영화 등 사회복지 제도를 후퇴시키면서 시장경제를 살리는데 주력한다. 대처는 이런 노력으로 영국을 금융 강국으로 부상시키면서 총리 3선에 성공하지만 그 이면에는 대부분의 국민인 노동자들의 고통이 숨어있었다. 1990년, 철의 여인이라고 불렸던 대처의 대처리즘의 문제가 대두되면서 그녀가 총리직에서 사임하자 이를 기념(?) 하듯 켄 로치 감독은 <숨겨진 계략>이라는 작품을 만든다. 이 작품은 1985년 북아일랜드 협정을 맺은 대처가 '자신만의 다른 법'으로 아일랜드를 통치한 것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당시 대처 내각은 아일랜드 독립군인 IRA를 독립군이 아닌 테러리스트로 규정, 그들의 정치적 직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처의 집권기간 동안 작품 활동을 쉬었던 켄 로치 감독은 이 작품을 시작으로 '대처'라는 인물의 만행과 그가 망쳐놓은 영국 노동자들의 삶을 끊임없이 고발한다.


켄 로치의 영화는 크게 두 분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노동자의 문제를 다룬 노동영화고 두 번째는 저항의 정신을 담은 전쟁영화다. 먼저 노동영화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레이닝 스톤 : 네이버 영화                                                                                                                


켄 로치의 노동영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켄 로치 감독은 트로츠키주의자이다. 그는 노동문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대처 수상의 집권기간 동안 발생한 노동문제에 초점을 두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레이닝 스톤>이다. 대처 정권에 의해 '집단 해고'를 당한 노동자들은 제대로 된 실업수당 하나 받지 못한 채 말 그대로 '맨몸으로 돌 비'를 맞고 있었다. <레이닝 스톤>의 아버지 밥 역시 실직한 이후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한 신세다. 그는 친구 토미와 함께 양을 훔쳐 생계를 꾸리지만 트럭이 도둑맞자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종교적인 신념으로 딸  아이의 미사에 입힐 드레스는 새것으로 맞추고 싶은 아버지는 어떤 일이라도 해보기 위해 노력하나 쉽지 않다. 결국 은행에 돈을 빌리나 이 돈은 사채업자에게 넘어간다. 사채업자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밥은 사채업자를 우발적으로 죽이게 된다. 이 이야기의 원인은 실업 이후 안정적인 삶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실업급여가 나오지 않으니 당장 먹고살 길이 없는 것이다. 이런 노동자의 비극은 <네비게이터>에서 더욱 심화된다.

                                                                                                          

철도민영화 문제를 다룬 이 작품은 초반 흥겨운 음악과 함께 왁자지껄하고 활기찬 출근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은 하루아침에 자신들이 철도청 소속이 아닌 민영기업의 노동자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 동업자였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경쟁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유연성과 효율성을 앞세운 민영화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하나 둘 빼앗는다. 멀쩡한 새 장비를 부수고, 기본으로 지급되던 장비는 지급되지 않으며, 강압적인 권고사직을 종용한다. 떠들썩했던 휴게실은 점점 한산해지고 웃음이 가득했던 노동자들의 얼굴에는 그늘만 드리운다. <레이닝 스톤>이 무너진 대처 정권을 배경으로 한 작품답게 ‘희망’을 이야기했다면 <네비게이터>는 대처 정권 내내, 그리고 그 이후에도 문제가 되고 있는 민영화의 고통으로 끝을 맺는다. 한 직원이 한밤 중 사고를 당하나 동료들은 119를 부를 생각을 하지 못한다. 납득할 수 없는 기업의 행위들이 노동자들의 사고를 무너뜨렸고 그들은 자신들이 해고당할 것이 두려워 차마 신고를 하지 못한다. 이는 사채업자를 죽였으나 ‘그의 횡포에 눈물을 흘렸던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신부의 말을 통해 죄를 용서받은 밥의 해피엔딩을 생각했을 때 가혹하다. 이 가혹함은 경제적 살인과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네비게이터>의 철도노동자들은 경제적 살인에 직면하고 이를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동료의 희생을 택한다. 즉, 돈이 직접적으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지만 살인의 원인이 되는 이유를 보여준 것이다. <레이닝 스톤>의 사채업자 역시 이런 존재다. 켄 로치 감독은 그를 죽이고 그 죄를 밥에게 묻지 않음으로써 경제적 살인에 대한 저항의식을 보여준다.

                                                                                                     

트로츠키는 혁명이 러시아 내부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인물이다. 켄 로치 감독은 그의 신봉자답게 '영국'의 노동자뿐이 아닌 전 세계의 노동문제에 관심을 보인다. <빵과 장미>에서는 미국에서 일하는 멕시코 노동자의 문제를 다뤘으며 <자유로운 세계>에서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해 다루면서 '영국'이 아닌 '전 세계의 노동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 <빵과 장미>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 작품은 영국이 아닌 미국을 배경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노동시장이자 다양한 인종들이 이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허나 노동시스템은 ‘유연성’을 이유로 자본가들이 하위계층을 착취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작품의 주인공 마야는 멕시코에서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온 이주 노동자이며 그녀의 언니의 도움을 받아 청소부로 일을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마야는 그저 ‘빵’이라는 생계유지만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노조운동가 샘을 만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노동자들에게는 빵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들의 인권, 존중받을 권리인 ‘장미’도 소중한 것이다. 이는 ‘돈’이 문제라 여겨졌던 노동시장의 구조에서 벗어나 사람을 바라보며 그들의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레이닝 스톤>, <네비게이터>, <빵과 장미>가 노동자들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촉구하는 결말을 택한다면 <자유로운 세계>는 냉철한 노동자가 되어가는 한 여성의 모습을 통해 퇴색되어가는 장미의 의미를 보여준다.

                                                                                                        

주인공 앤지 그리고 그녀의 친구 로즈는 실업자이다. 그녀들은 이주노동자 인력소개소보다는 불법노동자 인력소개소가 훨씬 돈이 된다는 것을 알고 이 사업을 시작한다. 앞서 소개한 작품들이 ‘착취당하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했다면 이 작품에서는 ‘착취를 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전자와 똑같은 착취당하는 존재였다. 그녀는 왜 자신이 당한 고통을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느냐. 그건 돈 때문이다. 빵이 필요하기에 그녀는 스스로 장미를 꺾어버리고 숙련된 노동자라 일컬어지는 착취자가 된다. 이 작품을 통해 켄 로치 감독은 ‘노동자의 착취’가 자연스러운 시장의 산물이라는 노동시장의 변명을 일갈한다. 

                                                                                                       


켄 로치의 전쟁영화


그렇다면 이런 노동의 문제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단순한 시장의 문제인가? 아니면 돈이 가지는 속성의 문제인가? 이에 대한 켄 로치의 답은 ‘계급’이다. 그의 전쟁영화들은 조국, 명예, 휴머니즘이라는 전쟁영화가 내포한 의미와는 궤를 달리한다. 전쟁이란 왜 일어나는가? 그건 계급 때문이다. 영국이 아일랜드의 위에 군림하려고 했기에 IRA가 독립운동을 벌였으며 그들 사이의 치열한 전쟁이 일어났다. 이 계급이라는 것은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눠지는 노동의 문제와도 깊게 연관되어 있다. 노동의 문제는 계급의 문제요,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투쟁뿐이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 <랜드 앤 프리덤>은 이런 계급과 저항의 의미를 깊게 내포하고 있다.


1936년, 우파 공산주의 정권이 성립되며 왕권이 중단된 스페인은 군부 세력에 인한 쿠데타로 내전에 휘말리게 된다. 이 내전은 참혹한 학살에도 불구 공산주의 확산을 경계하던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국가에 의해 외면을 받았다. 영화는 공산당 당원인 데이빗이 스페인 인민전선을 위한 국제의용군에 지원, 민병대가 되어 참전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역사란 향수가 아니다'라는 켄 로치 감독의 말처럼 그는 이 과거의 스페인 내전을 통해 '민중들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스페인 내전은 파시스트들에 의한 민중의 탄압이었으며 이런 탄압을 이겨내기 위한 '노동자와 공산주의자'들의 전투였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노동자들이 가졌던 가장 위대한 전투'에 대해 말하고 있다. 동시에 트로츠키주의자이자 반 스탈린주의자인 그답게 이 전투의 패배를 아쉽게 바라보며 역사가 가진 '희망가'를 노래한다. <랜드 앤 프리덤>은 전투에서 졌다는 이유로 '우리는 패배자'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이 아니다. '혁명에는 전염성이 있다. 우리는 실패했지만 반드시 우리의 시대가 온다'는 영화의 말은 <레이닝 스톤>이 담았던 희망을 그대로 전달한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IRA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젊은 의학도였던 데미안은 영국군의 횡포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이성과 지성에 무력감을 느낀다. 그는 형과 친구들의 설득으로 아일랜드공화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반군사조작인 IRA의 일원으로 참여한다. 감독은 이 작품에서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를 계급에 의한 갈등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국은 무조건적인 악, 아일랜드는 절대 선으로 포장하여 강한 카타르시스를 시도하지 않는다. 그가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희망이 아닌 폭력의 정당성이다. IRA의 창시자 마이클 콜린스는 영국과의 협상을 통해 아일랜드의 독립을 약속받았으나 북아일랜드를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IRA는 내부에서 노선이 갈린다. 이때 그들이 겪는 갈등은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폭력을 행사해 왔느냐이다. 무엇을 위해 총을 들었고, 무엇을 얻기 위해 싸워왔는가. 아니, 이전에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 택한 폭력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라는 물음이 그들에게 남는다. 이는 노동운동과 비슷한 흐름을 보여준다. 우리는 많은 노동운동의 실패를 경험하였다. 노동운동의 실패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지나친 폭력으로 인한 반감, 두 번째는 확실한 노선이 정해지지 않아 분열된 세력의 한계를 들 수 있다. 켄 로치 감독은 칸 영화제 소감에서 미국-이라크 전쟁을 예로 들며 전쟁은 매번 비슷한 양상으로 비극을 일으키지만 사람들은 그 비극을 비겨갈 줄 모른다고 말하였다. 어쩌면 노동문제 역시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지미스 홀그리고 <다니엘 블레이크>


<레이닝 스톤>에서 노동당 사무소에서 일하는 밥의 장인은 이런 말을 한다. ‘제도는 우리가 만들지 않았지만 바꿀 수 있다’ 은퇴를 앞둔 노감독은 마지막 두 작품을 통해 이런 제도에 대한 변화를 촉구한다. 그 첫 번째 작품이 <지미스 홀>이다. 공산주의자 지미가 아일랜드로 돌아오면서 겪는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지나친 신앙과 자본가들의 욕심 때문에 춤추고 음악들을 공간조차 없는 마을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여든이 넘은 노감독은 한 번이라도 현실과 타협할 만도 하지만 끝까지 자신의 사상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는 지미를 통해 종교와 자본에 착취당하는 이들에게 하나의 '쉼표'를 주기 위해 노력한다. 비록 그 노력이 실패로 끝날지라도 언젠가 다가올 '그들을 위한 세상'을 꿈꾸며 말이다. 이 작품을 켄 로치의 전쟁영화와 노동영화의 특성을 동시에 담았다 평하고 싶은 이유는 주인공 지미가 가진 속성에 있다. 지미는 <랜드 앤 프리덤>의 데이빗처럼 저항한다. 그가 이 저항을 택한 이유 역시 데이빗과 비슷하다. 데이빗이 쥐꼬리만 한 실업수당과 바뀌지 않을 것만 같은 노동시위 대신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에 찬 전쟁터를 향한 거처럼, 미국으로 갔던 지미는 대공황의 여파에 밀려 고향인 아일랜드로 돌아온다. 이미 실패의 경험이 있는 지미는 조심스럽지만 여전히 바뀌지 않는, 그리고 그들의 힘으로 바꿀 수 없을 것만 같은 기존의 제도에 저항하기 위해 자신이 앞장서기로 결정한다. 


동시에 ‘장미’를 놓치지 않는다. <레이닝 스톤>, <빵과 장미>, <자유로운 세계> 모두 장미를 원한다. 딸의 드레스 하나 살 수 있는 돈(<레이닝 스톤>), 최빈곤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돈(<빵과 장미>), 딸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돈(<자유로운 세계>) 등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는 빵이 아닌 최소한의 인간다운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장미를 이 작품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마을회관이다. 음악, 춤, 문학, 미술. 자본주의 사회에서 쓸모없다 여겨지는 인간의 문화 활동을 이 작품은 장미, 인간의 인간된 권리라 주장하고 있다. 이는 ‘해고당하지 않을 권리’라는 최소한의 노동적 보호 장치를 넘어 ‘직장생활 동안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와 자본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종교는 영적으로 깨끗한 인간은 자본과 쾌락에 물들지 않을 것을 종용하며 자본가는 이런 인간들을 착취한다. 그래서 노동시장에서의 장미는 큰 의미를 지닌다. 구조를 돈이 아닌 사람을 중심으로 바꾸라는 메시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장미의 권리는 한 두 명의 투쟁만으로 쟁취할 수 없다. 중요한 건 ‘연대’다. 켄 로치 감독은 그의 마지막 작품,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통해 이 연대에 대해 강조한다. 평생 목수로 성실하게 일한 다니엘은 심장질환으로 일을 그만두고 실업급여를 받으려고 하나 절차상 문제로 쉽지 않다. 까다로운 실업급여 지급 정책은 다니엘 같이 생계가 곤란한 사람들에게 큰 절망과 고통을 준다. 이는 런던으로 이주한 싱글맘 케이티 역시 마찬가지다. 다니엘은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노력하지만 자기 한 몸 가누기 힘든 그이다. 결국 케이티는 몸을 팔고 이에 다니엘은 충격을 받는다. 자신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 여기는 다니엘에게 손을 벌리는 건 케이티의 딸이다. 다니엘이 자신들의 힘이 되어주었기에, 이제는 자기가 다니엘의 힘이 되어주겠다는 케이티의 말은 혼자만의 고통을 고독처럼 간직했던 노동계층들의 ‘연대’를 의미한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내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이 작품 속 명대사는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에 대해 꼬집음과 동시에 그들이 서로 연대해야만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받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들을 게으름뱅이, 사기꾼, 거지 등으로 만드는 제도를 바꿀 것을 촉구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답은 연대다. 짧은 순간이지만 다니엘이 벽에 적은 문구를 보고 사람들은 하나로 마음을 모았다. 그들은 다 같이 자신들을 바라보는 잘못된 시선과 제도를 비난하고 비판했다. 노감독은 그의 마지막 영화를 통해 더 이상 현상에 안주하지 말고, 작은 변화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말고 우리 모두가 연대하여 제도를 ‘바꿔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에는 두 명의 인물이 큰 역할을 해주었다. 한 사람은 트로츠키이다. 그의 사상은 켄 로치 감독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이는 50년 가까운 기간 동안 한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 꾸준히 담아낼 수 있는 마르지 않는 샘물의 역할을 해주었다. 두 번째는 대처다. 켄 로치 감독의 영국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대처를 저격하고 있으며 그녀가 만든 정책들이 죽인 영국의 노동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는 켄 로치 감독에게 '영국'과 '대처'가 있는 한 얼마든지 노동자들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소재가 되어주었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을 더 뽑는다면 노동자의 편에 서지 않는 사람들, 즉, 자본가일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노동자의 편에 섰다면 켄 로치 감독의 <지미스 홀> 같은 작품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끝없이 '노동자를 위한 세상'을 위해 '전쟁'을 하는 이유는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랜드 앤 프리덤>은 스페인 내전, 그 자체만을 다룬 작품이 아니다. 노동자들의 투쟁, 전쟁, 살기위한 몸부림을 담아낸 작품이다. 그의 영화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끝을 맺었지만 영화에 담긴 목소리만은 끊임없이 소리를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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