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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의 잔혹함을 담은 페이크 다큐

영화, 그리고 세상 - 19. <개를 문 사나이>

페이크 다큐멘터리란 마치 실제로 일어난 일처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촬영을 하는 영화를 말한다. 이런 페이크 다큐의 형식이 가져오는 가장 큰 효과는 리얼함이다. 한때 <블레어 위치>를 기점으로 <파라노말 엑티비티>, <알.이.씨> 등의 공포영화들에 이 기법이 유행처럼 번졌는데  마치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듯한 착각을 주기 때문에 공포라는 장르에서 많이 사용하는 방식이다. <개를 문 사나이>는 92년에 나온 벨기에 영화로 '폭력'이라는 소재를 페이크 다큐로 풀어낸 굉장히 독특한 흑백영화다. 

<개를 문 사나이>는 시작부터 충격적이다. 한 남자가 지하철에서 여자를 목졸라 죽이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스스로를 연쇄살인범이라고 말하는 남자인 벤과 그를 따라다니며 영화를 찍다가 어느새 공범이 되어버리는 촬영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벤이라는 남자가 청산유수처럼 내뱉는 말은 자신이 가진 폭력에 대한 나름의 철학이며 중간중간 나오는 전쟁장면과 폭소를 내뿜는 웃음은 그의 폭력에 관심을 가지게 하고 그의 행위에 흥미를 느끼게 한다. 그래, 영화의 초반,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벤의 행위에 빠져들며 그의 철학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영화가 주는 재미에 웃음을 터뜨린다. 마치 타란티노의 피에 물든 영화를 보는 거처럼 말이다.

하지만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고 강간장면에 도달하면서 점점 웃음은 사라지게 된다. 영화가 웃음을 제거한 순간, 관객들은 냉정하게 화면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말하게 될 것이다. 미친, 저 새끼들 뭐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방금 전까지 당신은 저들의 행위에 웃음을 터뜨리고 그들의 개똥철학에 고개를 끄덕이며 재미있게 영화를 감상하고 있었다는 것을. 갑작스러운 폭력의 잔혹함에 눈을 뜨는 순간, 영화 속 제작진들이 벤과 공범이 되어버린 거처럼 관객들 역시 벤과 공범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아, 왜 이 불편한 웃음을 나는 즐겼던가, 나는 왜 이것이 타란티노 영화의 폭력의 웃음 혹은 샘 페킨파 감독의 폭력의 미학이라고 여겼던 걸까. '미디어'라는 것은 폭력을 정당화할 수단과 능력을 갖추고 있다. 몇 가지 양념과 시선의 변화 만으로 보는 이들을 빠져들게 만드는 것이 방송이 가진 힘이다.

'폭력'이라는 것은 이 작품처럼 강압적인 힘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다치게 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말로 상처를 주는 것, 다른 이의 사생활을 들춰내고 폭로하는 것, 진실을 왜곡하고 몰아 나락으로 빠뜨리는 것. 이 모든 것이 폭력이다. 그리고 그 폭력이 향하는 곳은 위에서 아래다. 미디어의 폭력은 위에서 아래를 향할 뿐, 위를 향하는 경우가 드물다. 더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물어뜯고, 그 물어뜯은 붉은 속살을 보여주며 잔혹한 재미에 빠지게 만든다. 우리는 사람과 사자를 싸움을 붙인 과거 로마의 콜로세움을 보며 그들의 야만적인 놀이문화에 혀를 차지만 피와 뼈만 보이지 않을 뿐 현 미디어 역시 폭력성을 가지고 있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는 기회를 빙자로 누군가를 바보로 만들거나 마녀사냥을 한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한 개인의 진실된 모습을 지나치게 파고들며 그들에게 높은 도덕성과 성인군자 같은 모습을 강요한다. 토크쇼에서 남을 공격하는 모습, 누군가를 비하하는 모습 역시 '재미'라는 이유로 모두 용인되며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깐깐하고 고지식한 선비 취급한다.

이는 영화 속 벤의 살인의 반복과 이를 포장하는 개똥철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자극이 주는 재미'에 빠진 tv는 더 큰 자극을 주기 위해 애쓰며 이런 자극을 찾는 사람들은 욕과 비방이 판을 치는 인터넷 개인 방송을 찾기도 한다. 제목이 <개를 문 사나이>라는 이유는 아마 '개'라는 주인을 향해 무조건 꼬리를 흔들고 즐거워하는 약자를 무는 '사나이(주인 혹은 언론 그리고 폭력)'의 모습을 통해 아래를 향하는 미디어의 폭력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실제 영화에 아이디어를 제공한 벨기에의 한 TV보도물 시리즈는 사소한 사실을 부풀려 사람들의 사생활을 침해했다고 한다. 미디어라는 '강자'가 '출연자'라는 약자를 물고 놓아주지 않는 모습에서 이 영화의 제목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 

폭력의 무서움은 그것이 주는 즐거움에 빠진 사람은 '잘못'을 눈치채지 못한다는 점이다. 누군가를 왕따시키고, 때리고, 놀리는 아이들은 자신의 행동이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재미를 위한 행동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웃음기가 쫙 빠진 폭력의 굴레에 놓여진다면 그 순간 알게 된다. '아, 이게 정말 잔혹하고 끔찍한 행동이구나.'라고 말이다. 영화는 흑백의 거친 화면과 페이크 다큐 형식, 그리고 블랙코미디를 가미하며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아주 독특하고도 머리가 띵 울릴 정도로 냉정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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