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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란 어디에 존재하는가

영화, 그리고 세상 - 18. <밀양>

     

내리쬐는 햇빛 사이에 한 여자가 서 있다. 그 여자의 이름은 신애. 그녀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밀양으로 내려온다. 그저 죽은 남편의 고향이라는 것이 그녀가 밀양으로 내려온 이유다. 도로 하나만 건너면 서로 다 아는 이웃사촌 지간인 이 조그마한 도시에서 신애는 아들 준과 함께 새로운 삶을 준비한다. 그리고 그 삶속에 종찬이라는 남자가 들어오기를 희망한다. 카센터 사장인 그는 밝고 명량하며 활기차다. 누구나 좋아할 만한 성격을 가진 이 남자는 신애를 좋아한다. 그는 그녀의 정착을 도우며 알콩달콩 자신의 마음을 표한다. 이 코믹할 것만 같은 멜로영화는 한 순간에 범죄스릴러의 옷을 입게 된다. 신애의 아들 준이 유괴를 당한 거다.
    

 
신애는 초조와 불안에 휩싸인다. 아이와 엄마와의 숨바꼭질 장면을 통해 ‘실종’을 예고했던 영화는 이내 유괴살인에 도달한다. 준이 다니던 웅변학원 원장이 아이를 죽인 것이다. 죽음에 절규할 줄 알았던 신애는 그저 넋을 잃고 침묵한다. 그녀가 오열을 토하는 것은 ‘교회’의 입구에 달했을 때다. 준의 유괴전화를 받았을 때, 신애는 종찬을 찾아간다. 그녀에게 있어 밀양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는 종찬이며 그만큼 이 마을사람들에 대해 잘 아는 남자를 그녀는 모른다. 하지만 카센터 앞에 도달한 신애는 노래방 기계로 열창을 하는 종찬을 보고 발걸음을 돌린다. 사람들과 소통하며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소극적이지도 않았던 신애가 갑자기 움츠러들게 된 것은 준이 실종되면서부터다. 어쩌면 그녀는 ‘준’이라는 아들의 존재를 ‘남편’과 동일선상에서 보았을지도 모른다. 집에서의 익숙한 숨바꼭질 장면이나 마을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 모두 그 주변에는 준의 존재가 있었다. 하지만 준이 죽은 후 그녀와 밀양을 연결하는 ‘고리’는 완전히 끊어지게 된다. 이에 신애는 울음소리 하나 제대로 낼 자신이 없는 혼자만의 고독이 가득한 장소로 밀양을 인식한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온 ‘익숙함’은 ‘종교’다. 교회의 십자가는 가장 대중적이며 보편적인 가치인 ‘사랑’을 이야기한다. 자신이 알던 익숙함을 만난 신애는 자연스럽게 감정을 표출하며 교회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박도섭-아들을 죽인 웅변학원 원장-을 용서하기로 마음먹는다.
    

 
신애는 박도섭과의 만남을 통해 낮선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종찬을 비롯한 교회 사람들은 이미 주님을 만나고 용서를 받았다 말하는 박도섭에 대해 ‘정말 다행’이라고 말한다. 나는 용서하지 않았는데, 상처를 입은 것은 나인데,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주님에게 먼저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는 박도섭의 모습과 그런 박도섭을 향해 ‘주님을 받아들여서 정말 다행’이라고 말하는 교회 사람들은 신애에게 괴리감을 느끼게 만든다. 그녀가 바랐던 건 동네 양아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박도섭의 딸 정아처럼 그 역시 그런 처절한 모습으로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 그를 용서하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 같은 모습을 상상했을 신애는 이미 마음의 구원을 얻은 박도섭의 모습에 절망하고 그 ‘은혜로운 마음’을 버린다. 폭력을 당하는 정아를 무시하고 돌아서면서 ‘용서’라는 단어를 지워버린 것이다.
    

 
믿음의 마음이 무너지고 사람들 사이에서 낮선 자신을 발견한 신애는 복수의 대상을 바꾼다. 이미 감옥에 갇힌 박도섭이 아닌 그를 용서한 ‘주님’에게 복수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 대상으로 자신을 주님에게 이끈 김 집사의 남편 강 장로를 삼는다. 그를 꼬드겨 정사를 벌일 계획을 세웠던 신애는 그가 자신의 유혹에 끝내 넘어가지 않자 처참하게 무너진다. 복수에 실패한 그녀는 신을 저주한다. 주님은 박도섭에게 마음의 구원을 주었다. 마을의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다행’이라고 말하며 그를 용서해줄 것을 강요한다. 반면 그녀 자신은 실패의 연속이다. 남편이 죽었고 아들이 죽었다. 마지막 순간 행하기를 바랐던 신을 향한 사소한 복수 역시 무위로 돌아간다. 그리고 종찬 역시 자신을 멀리하려고 하자 끝내 미쳐버린다. 구원의 빛 한 줄기조차 주지 않는 가혹한 신을 피해 그녀는 숨어버린다.
    

 
이 작품의 인상적인 점은 배경이 ‘밀양’이라는 점이다. 이는 짧은 원작 때문에 추가한 서사와 인물관계와는 다른 배경의 변화다. 왜 영화는 작품의 공간을 밀양으로 설정한 것일까? 그 바탕에는 밀양에서 일어났던 ‘밀양 성폭행사건’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사건만큼 집단에 대해서는 용서의 은총을, 그와 반대에 선 이들에게는 가혹한 칼날을 들이댄 일은 없었다. 신애는 김도섭을 용서해야 한다는 집단의 강요-그리고 용서를 통해서만 집단에 들어갈 수 있다는 무언의 암시-에 저항하나 자신의 파탄이라는 끔찍한 결말만을 맞이한다. 이는 영화의 마지막, 정신병원에서 나온 신애가 찾아간 미용실에서 정아가 일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 극적으로 드러난다. ‘살인자의 딸’ 정아는 마치 신이 용서를 받은 거처럼 잘 살아가고 있지만 ‘피해자’인 그녀는 망가진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바라볼 뿐이다. 결국 ‘주님’이라는 존재가 만든 집단 속에서 신애의 영혼은 ‘구원’을 얻지 못하였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절망으로 끝을 맺지 않는다. 영어 제목 ‘Secret Sunshine’이 의미하는 희미하지만 완연한 햇살이 그녀를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존재가 바로 종찬이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종찬은 알게 모르게 창틈을 통해 우리를 비추는 햇빛처럼 신애를 비추고 있다. 그녀가 처음 밀양에 왔을 때, 준이 납치당했을 때, 교회에 처음 찾아갔을 때, 박도섭을 만났을 때, 그리고 유혹에 실패했을 때. 그녀는 종찬을 찾아갔고 종찬은 그녀의 곁에 있어주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였다. 그렇다면 종찬이란 캐릭터는 신애에게 ‘구원’을 의미하는 존재일까? 아니, 종찬과 신애는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이 될 수 있는 존재다. 종찬은 서글서글하고 친절하지만 자존감이 높은 존재는 아니다. 그는 남들에게 잘하나 그들은 그를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다.-이는 교회 주차장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엄마한테 매일 안부전화를 받으며 사는 못 미더운 아들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드는 이가 신애다. 밀양에 온 그녀가 의지할 사람은 종찬 뿐이고 그녀를 곁에서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 역시 그뿐이다. 알게 모르게 신애는 종찬에게 햇살이 되어주었고 그 역시 그녀의 곁을 따뜻하게 비춰주었다.
    

 
<밀양>은 ‘구원’에 대해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신의 권위를 넘보지 마라’라고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가 말하는 ‘구원’이란 결국 마음이다. 집단에 휩쓸리지 않고, 익숙한 것에 현혹되지 않으며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그리고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 옆에서 함께 있어주는 ‘존재’ 그 자체로도 구원의 ‘햇살’이 되어주는 것이 절망 속에서 인간을 구해내는 힘이라고 말하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결국 신애는 구원받을 것이다. 그의 곁에는 종찬이 있으니. 이 절망과도 같은 이야기가 아름다운 이유는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은 한 줄기 빛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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