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남
공항에서 내려 택시를 탔다. 택시는 후에 도심을 지나 한참 외진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택시 기사는 미터기로 간다고 했으나, 미터기도 조작한다는데 하는 의심을 하면서 목적지에 이르렀다.
게스트 하우스, 'Thimothy House'까지 택시비는 30만 동, 그러니까 15달러였다.
게스트 하우스에 들어서자 영어를 하는 한 청년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맞이했다. 그리고 주인인 듯 한 긴 머리 여성이 기다리고 있었다며, 온 얼굴에 반가움을 담고 내 두 손을 잡았다. 첫눈에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택시요금이 15달러였다고 말하자 말도 안 된다며 그녀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택시 기사는 이미 떠났는데. 그녀가 너무 안타까워했다. 알고 보니 fifteen을 fifty로 잘못 알아들었던 것이다. 어쨌든 내가 바가지를 썼을까 봐, 그렇게 택시 기사를 좇아 뛰어나가는 그녀가 너무 고마웠다.
그녀는 영어를 하지 못했고, 좀 전의 그 청년이 모든 얘기를 대신했다. 청년의 이름은 훼이었다. 우린 다 친구고 가족 같으니까 편안하게 지내라고. 후에에서 관광할 왕릉들을 이틀에 걸쳐서 자기가 안내해 줄 거라고, 따로 투어 신청을 안 해도 된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은 저녁 7시 30분에 안주인 녹과 시내에 나가서 저녁도 함께 먹으라고. 자기는 오후에 호텔에서 일하고 9시에 끝나니까, 9시 30분쯤 합류하겠다고 했다.
게스트 하우스는 드높은 천정과 대리석 바닥, 층층이 다른 테마로 꾸며진 아름다운 저택이었다. 1층엔 카페. 내가 묵게 된 3층은 주인 네가 함께 쓰며 드넓은 부엌과 식당, 거실, 한편에는 피아노가 있는 곳이었다.
환상적인 발코니가 있어서, 밤이 되면 현란한 야경을 보여주기도 했다. 집이 예뻐서 웨딩 촬영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훼이가 다운받아준 통역기로 녹과 나는 대화를 나누었다. 많은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사족 없이 핵심적인 얘기들을 할 수 있었다.
여행 떠나기 직전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했더니, 이제 내가 원했던 대로 글을 쓰면 된다고 따뜻하게 웃으며 말해주었다.
이 집은 원래 게스트하우스가 아니라 가족이 함께 살기 위해 지은 집으로, 개인 스파까지 완비되어 있었다. 디자인도 그녀가 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들을 미국에 유학 보내느라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게 되었다고 했다. 베트남의 경제 환경에서 아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려면, 어지간한 재력으로는 엄두를 내기 어렵다.
그녀는 내게 혼자 살고 싶을 때가 없냐고 물었다. 나야 남편도 없고 애들도 다 커버려서, 거의 혼자 사는 것처럼 자유로운 상태라고 말했다. 정작 그렇게 물어보는 그녀 자신이 그러고 싶을 때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들과 남편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이 너무 크다고 했다. 남편은 자신보다 더 어른스럽지 못해서, 매사를 자신이 책임지고 이끌어야 한다고 했다.
게스트하우스 운영도 잘되지 않아 그것도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러 가지로 휴식이 필요해 보였다.
8시쯤 녹의 오토바이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그녀는 내게 길거리 간식을 사주었고, 길거리 버스킹 바구니에 넣으라고 돈을 주기도 했다. 저녁은 내가 샀다.
직물 갤러리를 돌아보고 있을 때, 일을 끝낸 훼이가 우리를 만나러 왔다.
우린 거리에 앉아 구운 옥수수를 사 먹으며, 아시안 컵 축구의 준결승 진출을 축하하는 열광적인 퍼레이드를 지켜봤다. 베트남 사람들의 축구 사랑이 이렇게 열렬할 줄 몰랐다.
2002년 서울에서 열린 월드컵 축구 때의 거리 응원을 떠올리게 했다.
돌아오는 길에 녹의 오토바이 뒤에 타서 어떻게 잡아야 할지 엉거주춤했더니, 녹이 내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꽉 감싸게 했다. 게스트하우스가 조금은 주인과 더 가까울 수도 있다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가깝게 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