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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의 여인과 리조트에서 보낸
하루

- 베트남

by Annie



짐을 꾸리고 거실에 나와 앉아 있었더니 녹이 방에서 내게 손짓한다. 그녀는 터들 넥의 타이트한 니트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침대 위에 연 팥색과 회색의 똑같은 드레스를 가리키며 입어보라고 했다. 난 연 팥색을 골라 입었다.


그녀가 아름답다며 자기는 배가 나와서 흉하다고 했다. 베트남 여성들은 타이트한 옷에 대해 체형과 관계없이 별 두려움이 없는 것 같다. 한국에서는 몸매에 자신이 없는 한, 타이트한 드레스는 입지 않는데. 몸매에 자신이 있다손 쳐도 쉽지 않은데.


우린 쌍둥이처럼 색조차 비슷한 드레스를 입고, 택시를 불러 집을 나섰다. 리조트에 도착해서 난 밖을 좀 돌아볼 테니 함께 하고 싶으면 하고, 쉬고 싶으면 쉬라고 했다. 그녀는 자고 싶다고 했다.

7시쯤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하고 혼자 나왔다.


수영장 근처로 나갔더니, 너른 수영장에 썬배드들이 비를 맞고 있었다. 넓은 정원에 야자수들이 맵시 있게 서있고 수영장에서 삼사십 미터 거리에 바로 비치가 있었다.

이곳 썬배드에 하루 종일 누워 자기도 하고, 책도 읽고, 글도 쓰면서 쉬고 싶었는데 하필 비가. 어제였으면 환상적이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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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센티 정도 되는 방파제에 올라서니 성난 파도들이 몰려오는데, 마치 금방이라도 쓰나미가 닥칠 것 같다. 로비로 올라가 보니 이곳을 예약할 때 보았던 사진 그대로 풀장 바로 너머로 바다가 이어지는 뷰. 바로 그 뷰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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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안타까워하며 그곳을 바라보고 있으니 직원이 스파를 권한다. 무료 사우나도 할 수 있다고 해서 사우나를 하러 들어갔다가 10분도 채 안 돼서 그냥 나와 버렸다.

딱딱한 사우나 의자에 혼자 누워 있다가, 아무 특별할 것도 없는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돌아다니다 보니 카페 같은 곳이 있어서 들어가 보았다. 바, 카페, 레스토랑 등의 기능을 모두 갖춘 곳, 바로 옆의 메인 레스토랑과 함께 양쪽 모두에서 즐길 수 있다고. 5시부터 7시까지는 해피 아워로 음료가 원 플러스 원이었다.


난 5시쯤 메인 레스토랑에 가서 레드 와인을 시켰다. 원래 해피 아워 적용은 옆의 카페 레스토랑에서만 적용되는데, 여기서도 그냥 해주겠다고 했다. 바다 뷰가 시원하고 아직 사람들은 없었다. 테이블 세팅이 무척 호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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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정도 있으니 녹이 내려왔다. 난 구운 새우를 시켰고 그녀는 샐러드와 다른 요리도 하나 더 시켰다. 그녀도 레드 와인 한 잔. 난 프리 와인 한 잔을 더 시켰고 그녀의 프리 와인까지 3잔을 마셨다.

거기에 디저트 케이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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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식전 바게트가 너무 맛있어서 하나 더 달라고 했다. 이렇게 마음껏 먹고 50달러. 이 가격이면 한국에서도 싼 가격은 아니었으나, 둘이서 먹었으니 1인당 25,000원인 셈이다. 호화로움에 비해 비싼 가격은 아니었다. 베트남에선 큰돈이지만.

그곳에서 두 시간 정도 머물면서 각자 전화, 채팅 등을 하면서 자유로이 즐겼다.


침대는 킹 사이즈로 정말 안락하고 가벼운 깃털 같은 베개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정말 푹 잤는데 그곳에서 그만 귀마개를 잃어버리고 왔다. 정말 마술처럼 깊은 잠에 빠지게 하는 효과 만점인 귀마개였는데.

글을 좀 쓸까 했는데 와인 때문인지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담가서인지, 나른해서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그냥 자기로 한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여전히 실비가 내리고 있다. 베란다로 나가서 비 때문에 세워둔 하얀 매트리스를 눕히고, 그곳에 기대 누웠다. 천국이다. 비가 안 오고 날이 조금만 더 따뜻했더라면. 그러나 그마저도 탓할 수 없을 만큼 좋다. 8만 원에 이런 곳이.


녹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데 아름답다. 베트남 풍의 드레스인데 그녀의 고상한 멋을 더해주는 아름다운 옷이었다. 나는 그녀의 사진을 몇 컷 찍고, 그녀는 내게 베트남 식 요가 같은 호흡법을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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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먹으러 어제 그 식당에 다시 갔는데 자리를 밖으로 옮기니 바로 잔디 정원이 있고, 그 너머 바다가 보이는 멋진 뷰였다. 거기서 긴 아침 식사를 즐겼다.

녹은 어제 내가 해준 사업 조언을 적극 수용해서, 새로운 비즈니스 계획을 세우느라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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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편에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혼자 아침을 먹고 있다. 보니 거동이 불편한지 목발이 옆에 놓여 있다. 녹이 자리를 비운 사이 내가 다가가 말을 걸었다. 독일인이었다. 여기서 4개월째 머물고 있다고. 하노이에 가서 6주를 머물 예정이라고 했다.

부자 할아버지인 모양이다. 79년도에 한국에 가본 적이 있다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해변을 좀 걷겠다고 했더니 녹이 외투를 가져오겠다고 했다. 다시 비가 내렸다. 녹은 추위를 무서워했다. 그래서 그녀는 금방 식당 쪽으로 돌아갔고, 나 혼자 좁은 방파제 위를 끝까지 걸었다.

우기라 바닷물조차도 비 온 뒤의 강처럼 옅은 황토 빛이었다. 난 사진을 찍으면서 끝까지 갔다가 돌아올 때는 뛰었다. 뛰는 나를 보고 그녀는 보기 좋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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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에 떠나는 공짜 호텔 차량이 있었지만 나는 이곳을 즐기기 위해 11시 30분에 택시를 불렀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다른 왕릉 터를 보았는데, 많이 훼손되었는지 곳곳에 부서진 벽과 기둥이 오히려 내 마음을 끌었다. 후에는 꼭 다시 오고 싶은 곳이 될 것 같다.


후에 시내로 게스트하우스 직원이 녹을 마중 나왔고, 내가 다낭까지 가려면 배고플 거라며 굳이 점심을 사주었다.

버스가 오기 전까지 시간이 30분 정도 남았지만, 내 걱정 말라며 녹을 보냈다. 그녀에게 이 여행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미래에 대한 플랜을 완전히 새롭게 짜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그 계기를 주었다.

결과는? 기대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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