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남
난 와인 두 잔을 마시고 잠은 생략한 채, 호이안에 가기 위해 로비로 내려갔다. 일행이 있었다. 더 좋은 일이다. 호주에서 온 30쯤 되어 보이는 남자와 그가 어제 호찌민에서 만났다는 베트남 걸이었다. 고등학생 정도나 밖에 안 되는 앳된 소녀였다.
이 커플은 특이한 게 사실 커플이 아니다. 어제 호찌민에서 만났는데, 그녀가 여행을 부러워하기에 한 시간 안에 짐 싸서 나설 수 있으면 함께 가자고 하니까, 그녀가 따라나선 것이다.
어차피 예약해 둔 호텔에, 정해진 일정에 그녀는 그냥 묻어가는 것이다.
그녀는 영어를 잘 못해서 의사소통이 잘 안 됐다. 그는 본국에 여자 친구도 있어서, 그 둘은 남녀 간의 만남이라기보다는 꼬마 아가씨에게 여행의 기회를 준 키다리 아저씨 정도 되는 셈이었다.
너무 순진한 해석인가? 호이안 가는 내내 택시에서 그와 나는 여행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다.
호이안은 여행자들에게는 동화 같은 곳이었다. 딥이 거의 강권하다시피 한 풀문의 호이안. 곳곳에 달린 알록달록한 수많은 전등들, 강을 수놓은 수많은 보트에 촛불이 켜지고, 소원을 비는 촛불 등들이 강물 위에 띠워지고, 쏟아져 나온 관광객들이 물결을 이루는 곳.
딥은 보트를 하나 빌렸고, 우리에게 종이 팩에 감싼 촛불 등을 하나씩 주면서 소원을 빌라고 했다. 소원을 빌며 그 등을 강에 띄우라고.
불 밝힌 거리 하나가 끝인가 싶으면, 또 다른 거리가 숨어 있다가 고개를 내민다. 어쩌면 오늘 풀문의 호이안, 그 절정을 보아버려서 이틀 후에 돌아와 3일 밤을 보내려면, 다소 심심할 수도 있겠다. 그냥 좋은 카페를 찾아, 그곳에서 밀린 글을 쓰면 되겠다. 이번 베트남 여행은 참 느릿하다.
배를 타고나서 나이트 마켓 거리로 접어드니, 불 밝힌 손수레에 갖가지 물건들이 손짓한다. 함께 간 그 베트남 소녀, 리나는 내게 뭘 갖고 싶냐고 물었다. 우리가 다가간 수레에는 드림 캐처들이 분홍빛, 보랏빛 등으로 황홀하게 휘날리고 있었다.
그녀가 보랏빛을 가리키며 그걸 갖고 싶으냐고 묻길래, 조금 어리둥절한 내가 분홍빛을 가리키자 그녀가 내게 그것을 사주었다. 당황스러웠다. 만난 지 두 시간도 안 된, 말도 몇 마디 나누어보지 않은 어린 소녀가 어른인 나에게 그냥 선물을 사준다는 게. 순간 내 마음이 무장해제된 것처럼 확 열렸다. 그 작은 새 같은 소녀에게.
난 그 드림 캐처의 가격이 얼마인지도 모른다. 이 아이의 마음이, 정말 아무런 계산도 없는 순백의 마음이 나에겐 큰 선물이었다.
함께 온 남자, 나빋은 길거리 음식인 바나나 팬 케이크를 먹어보고 싶어 했다. 맛도 괜찮았다. 실크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 조그마한 민속 박물관에도 들렀다. 하노이의 갤러리도 그랬지만 이곳의 건물들은 문을 지나면 또 다른 문, 그곳을 지나면 또 다른 문이 나타나서, 공간의 깊이가 느껴진다.
예쁜 카페들도 눈에 띄었다. 옛 건물들을 보고 싶으면 낮에 돌아보면 될 것이다. 어느 도시나 다 그러겠지만, 호이안은 낮과 밤이 무척 다른 도시이다. 더구나 햇빛을 보기 힘든 우기의 베트남에서는.
나빋과 나는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내 나이를 밝히는 순간, 막연한 대상들 사이에 미세하게나마 떠도는, 이성에 대한 긴장감은 떨어졌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뜻하지 않았던 여행의 짧은 동반자로서 그와 나는 좋은 대화 상대였다.
그는 리나에게 내일 투어에 대비해 재킷을 사주고, 용돈이 필요하냐고도 물었다. 리나는 스물두 살이라고 하는데 얼굴은 열다섯이나 열일곱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인다. 몸집도 키도 작은데 튜브탑 위로 드러난 가슴만 유난히 도드라진 게 어쩐지 애잔하다.
나빋이 키다리 아저씨를 가장한 늑대가 아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