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멕시코, 안녕
새벽 5시 40분에 알람을 맞춰두었다. 준비를 모두 마친 6시에도 밖은 아직 어두웠다. 어둡고 인적 없는 거리를 내려다보며 한동안 막막했다. 클로디어에게 물어서 이미 버스 타러 가는 길은 알아두었지만, 이 어둡고 낯선 길을 혼자 나선다는 것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백팩을 멘 한 여행자가 택시를 잡아타는 것을 창문으로 내려다보고, 나도 택시를 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이도 내가 이 어두운 길을 다섯 블록이나 혼자 걸어가서 버스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택시를 타라고 할 것이다.
택시비는 의외로 쌌다. 동부 터미널까지 버스는 4페소라고 하지만 택시가 52 페소면 3,500원 정도, 한국의 기본요금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럴 줄 알았으면 진즉 택시를 탈 걸, 무섭기도 했지만 얼마나 될지 모를 택시비도 무서웠던 것이다.
이른 아침인데도 도시는 벌써 깨어서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호스텔이 느지막이 문을 여는 상가 쪽에 있어서 인적이 없었을 뿐이었다.
이른 아침에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진다. 장사 준비를 하는 사람들, 배낭을 메고 다른 여행지로 떠나는 사람들, 직장으로 출근하는 사람들. 내가 그 안에 있다는 것에 기분이 참 좋다. 밤늦게 일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유독 아침 일찍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이런 감정이 이입되곤 한다.
넓은 터미널 안에서도 많은 이들에게 길을 묻고, 또 그들의 도움을 받으며 겨우 내가 타야 할 버스에 알맞은 줄을 서게 되었다.
테오티우아칸(Teotihuacán)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길 양쪽으로 들판처럼 넓게 트여 있는 것이 첫눈에 좋았다. 기분 좋게 흥얼거리며 사진도 찍으며 활기차게 걸었다.
난 이곳에 달과 해를 상징하는 피라미드가 있다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역사적으로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저 이곳이 주는 이 거대한 공간감을 느낄 뿐이다. 너른 평지에 우뚝우뚝 솟아있는 피라미드와 부서진 것인지, 원래 그렇게 낮게 쌓아놓은 것인지 모를 긴 담장 같은 것들, 그리고 하늘, 풀과 나무들, 이른 아침을 배경으로 그렇게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들이 새롭고 좋을 뿐이었다.
나중에 돌아와서야 검색해 본 바에 의하면, 이 도시는 기원전 2세기부터 건설되기 시작하여 기원후 7세기까지 번성을 누렸던 것으로 알려진다.
후에 폐허가 된 이 터를 발견한 이들은 이곳이 인간의 힘으로는 지을 수 없는 곳이라 여겨, '신들의 도시'라는 뜻으로 테우티우아칸이라 불렀다고 한다.
남아있는 터로는 계단으로 이루어진 피라미드들이 많은데, 그중에 가장 큰 것이 '해의 피라미드'라고 불리는 것으로, 높이가 66미터에 248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기에 피라미드 바닥 한 변의 길이가 230미터에 달한다니, 직접 가보지 않고서는 그 규모를 짐작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테우티우아칸 앞쪽으로 다시 계단을 올라, 그 길을 따라갔더니 야생 들판 같은 곳이 나왔다.
새로운 풍경이었지만 햇빛은 뜨겁고, 어디로 가면 어떤 것이 있는지 알 길이 없는 나는 혼자서 그 야생의 들판을 터덕터덕 걸으며, 이따금씩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으면서도 난 확신이 없었다. 내가 무의미한, 엉터리 같은 사진들을 찍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카메라의 스크린이나 파인더를 통해서 보이는 것들은 라이카 카메라처럼 선명하거나 사진 적으로 보이지 않았고, 그냥 뿌옇고 밋밋하게 보였다.
어제 시내 길거리를 걸으며 사진을 찍을 때도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무엇을 찍고 싶은 거지?”
글도 마찬가지다.
“난 무엇을 쓰고 싶은 거지?”
난 아직도 내가 하고자 하는 것, 하고 싶은 것에 대해 막연하기만 하다.
방학 때면 뭔가 시작했다가 개학하면 중단되곤 하던 것들도, 어렸을 때부터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꿈도, 퇴직하면, 그래서 연속적인 시간이 생기면 제대로 이루어 나갈 수 있으리라 여겼었다. 그러나 퇴직한 지 3년이 되어가도록, 난 뚜렷하게 손에 만져지는 그 어떤 꿈의 형체도 찾지 못하고 있다.
테오티우아칸에서 돌아오는 길에 터미널에서 뭔가 좀 먹고, 호스텔에 가면 바로 자야지 마음먹었다. 생과일주스를 한 컵 사고 서브웨이 샌드위치가 보여서 마침 잘됐다고, 통 식욕이 없는데 익숙한 음식을 좀 먹어보자 했는데 줄이 길다.
줄 서는 것은 질색이다. 그것도 먹기 위해 줄을 서는 것은. 그래서 포기하고 갓 구운 머핀처럼 보이는 것을 15페소(900원)에 하나 샀다.
택시 정류장에서 내 차례가 되었는데, 그곳을 관리하는 앳된 소년이 내게 택시 카드를 달라고 했다.
“없는데”
“저기 가서 사 와야 해”
“이잉, 난 몰라”
난 피곤하기도 하고 지금까지 줄 서있던 것이 아깝기도 하고 해서, 그냥 소년에게 모르는 척 뭉갠 것이다.
“그럼 잠깐 있어봐”
그는 스페인어를 일도 모르는 나의 앙탈에 난감해했다. 한참을 기다리던 나에게 그는 멀리서 손짓했다. 그리고는 내게 무슨 숫자를 말했다. 아마 택시비를 얼마 내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난 그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고, 나를 특별히 케어해 준 그 소년에게 들고 있던 머핀 봉지를 건넸다. 처음에 그것을 받아 들고 어리둥절해하던 그는 ‘아’하면서 얼른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에게 맛있는 스낵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그가 도와준 한 외국 여성의 감사에 뿌듯함도 함께 느끼며.
택시 기사는 내가 스페인어를 전혀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 내게 자꾸 스페인어로 뭔가를 물어봤다. 나중에는 200이라고 쓰인 지폐 같은 것을 보여주는 것이 시내까지 택시비는 200페소라는 말인 것 같았다.
잠깐만! 200이라니? 아침에 분명 45인가 60인가 그랬는데. 환산하면 분명히 3천 원 정도였다.
순간 내 기억에 혼란이 왔다. 그때부터 우리는 택시비를 두고 언쟁에 들어갔다. 내가 아침에 45페소에 탔다고 하니까 그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터미널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해서 나도 끝까지 맞섰다.
“다시 돌아갈 거야?”
그가 위협하듯 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백 번이고 돌아가서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피곤했다.
실랑이는 계속 이어졌고, 그는 경찰에 전화하겠다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별 해결책이 없는 시도였다. 전화 속의 인물은 나에게 상황을 물었고, 그는 내게 택시비가 비싸다고 생각하느냐고 해서 난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했다. 나중엔 상대방의 성의 없는 답변이 잘 알아듣기도 힘들어서 그냥 전화기를 기사에게 넘겼다.
아침에 택시비 영수증을 받았던 것 같아서 가방과 주머니를 뒤져보았지만 없었다. 그는 150페소를 부르더니 나중에는 120페소를 달라고 했다.
난 번역기를 사용해 그에게 큰 소리로 또박또박 읽어주었다.
“난 멕시코 사람들 엄청 좋아해요. 팁이라면 기꺼이 드리겠지만 속이는 것은 싫어요.”
그는 긍정하는 척했지만, 여전히 120을 요구했다. 난 120을 주고 내리면서 그에게 말했다.
“이건 팁이에요.”
내 나름의 항의였지만, 내 뜻을 그가 알아줄 리도 없었고, 그에게는 돈밖에 중요한 것은 없었을 것이다.
몹시 기분이 나빠진 나는 뭐라도 먹은 후에 자고 싶었지만, 근처에서 먹을 만한 것을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이 호스텔에 와서 처음으로 나쁜 기분을 지닌 채 잠이 들었다.
그것은 돈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멕시코인들에 대한 좋았던 이미지를 그가 박살 냈다는 것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서 날 골탕 먹이려는 자에게 결정적인 증거 제시를 하지 못했다는 것에 스스로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세상은 갑자기 환희에서 분노와 절망으로 곤두박질했다.
계속 honey, baby, mammy라고 부르며, 데이트를 하고 싶다고 느끼하게 칭얼대는 까를로에게 단언했다. '나는 네가 나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주 싫다. 내가 여행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방식은 친구로서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지, 이런 유의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그가 답을 보냈다. 그럼 그만두자고, 그가 원하는 것은 친구로서의 만남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그렇게 해서 우린 대화를 끊었다.
내일은 과나후아토로 떠난다. 버스로 5시간 정도 걸린다.
저녁에 짐과 외출했다. 그는 이미 저녁을 먹었다고 했지만, 나는 좋은 음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나를 한 카페로 데려갔고 커피 한 잔을 시켰다.
“커피? 난 좋은 음식이 필요하다고 했잖아.”
“기다려 봐.”
한참 후에 그는 샌드위치를 한 접시 들고 왔다. 아! 오랫동안 먹지 못해 힘들었던 내게 그것은 마치 소울 푸드 같았다. 베지테리언 샌드위치라고 했다. 고기나 베이컨, 햄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나의 입맛에도 딱 맞는, 너무 맛있는 샌드위치였다.
그는 또 자리를 떠나더니 이번엔 당근 케이크를 갖고 왔다. 그는 단 것을 아주 좋아한다.
“너 병명이 뭐야? 너 죽는 거야?” 그는 대답은 않고 웃기만 했다.
나는 과나후아토에 갔다가 다시 이 호스텔로 돌아올 거라며 그때까지 죽지 말고 잘 있으라고 했더니, 그가 말했다.
“그래. 남자에게는 동기가 중요해. 여자는 동기를 위해 살지는 않지. 그러나 남자는 그것을 위해 살아.”
난 그에게서 영화, ‘여인의 향기’에 나오는 알 파치노의 모습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