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킬라 병에 내 사진이
칸쿤 공항을 나서니 뜨거운 햇빛이 내려 쪼이고 있었다. 나는 멕시코 동부 해안 지역을 아래서부터 위로 거슬러 올 것이다. 칸쿤 아래쪽의 플라야 델 칼멘과 뚤름을 돌아본 후에, 칸쿤으로 올라와 거기서 쿠바행 비행기를 타는 것이다.
플라야 델 칼멘 행 버스를 타려고 줄 서서 기다리는데, 덥고 습한 바람이 불어 내 머리는 부하니 들고일어나 엉망이 되었다. 나는 겨울 스웨터를 벗어버리고 그 안에 입고 있던 민소매 차림이 되었다. 아래는 여전히 기모 레깅스 위에 치마, 운동화를 신고 있어서 더웠다.
버스 비는 온라인으로 예약하면 100페소였는데 여기 와서 구매하니 208페소였다. 아깝다. 그러나 그때는 그렇게 차이 나는 것을 몰랐으니 어쩔 수 없다.
버스 옆자리에 코스타리카에서 온 청년이 앉게 되어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코스타리카는 위에서 아래까지 8시간이면 닿는 작은 나라이다. 그러나 지역마다 건조 지역과 다습 지역, 열대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고, 화산이 많은 아주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다.
그는 2주 동안 이곳에서 스킨 스쿠버 강습을 받은 후에, 강사 자격증을 따서 강사로 활동할 것이라고 했다.
버스에서 내린 뒤 직선으로 7분만 걸으면 호스텔이 위치해 있어서 찾기는 쉬웠다. 정원은 도심 안의 밀림처럼 키 큰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어서, 바깥의 도심과는 완전히 딴 세계였다.
정원 여기저기에 탁자와 의자들이 놓여 있는 것이 그냥 호스텔 안에서 느긋하게 한나절을 보내도 좋을 것 같았다.
짐을 풀고 있는데 한 걸이 들어와서 샤워하고 나갈 때까지 나와 얘기를 했다. 런던에서 온 찰리. 내가 2층 침대를 배정받았는데 너무 높다고 했더니, 1층으로 바꿔달라고 말해보라 한다.
내가 아마 예약이 다 차서 2층을 준 게 아닐까 라고 말했더니 그렇지 않을 거라고 한다. 그녀의 말대로 난 1층 침대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몇 가지 소품을 챙겨 호스텔을 나섰다. 직선으로 넉넉잡아도 300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중심가는 식당이나 카페가 많아서, 멕시코 시티와는 달리 쉴 곳에 대한 선택지가 많았다. 아이스크림 가게를 지나쳤던 것을 잠시 후회하다가 괜찮아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아마 메뉴 사진의 새우 사비체를 보고 끌렸을 것이다. 값은 꽤나 비쌌지만 그래, 오늘은 이 한 끼로 세끼를 대신하는 거다 하면서 사비체와 물을 시켰다. 나중에는 맥주도 한 병 시켰다.
천천히, 이 돈만큼 나에게는 즐길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아주 천천히 음식과 맥주를 즐겼다. 거리의 지나가는 사람들을 좋은 풍경이라 여기며.
이곳은 각양각색의 인종들이 보인다. 그중 백인들은 단순히 배낭 여행자뿐 아니라 가족, 연인 단위의 세련된 차림새와 외모가 눈에 띄었다. 백인들은 참 많은 것을 가졌다.
짐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는 데이트 사이트의 여자들 사진을 보여주면서, 여기 멕시코나 캐나다에서는 여자들이 자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아시아에서는 백인 어드벤티지가 있어서 먹히는 편이라고 했다. 나중에 짐은 우리의 만남에 대해 이런 말을 했었다.
“나는 너를 로맨스의 측면에서 바라보았어, 그러나 너는 그런 쪽으로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지.”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난처해서 이렇게 말했다.
“로맨스는 잘못하면 나쁜 기억으로 끝날 수 있잖아. 그러나 친구는 그 좋은 기억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잖아.”
식당을 나와 해변으로 나가 보았다. 동행이 있다면 함께 즐길 수 있을 바와 레스토랑들이 줄지어 있었다. 모래 위에 앉아서 조금 쉬기도 하고 걷기도 했다. 참 여유롭고 좋다. 해 질 녘까지 그곳을 어슬렁거리다, 바에서 맥주 한잔을 마시고 어두워져서야 해변을 떠났다.
해변을 나와 시가지를 끝까지 걸어서 탐험해 보았다. 긴 쇼핑 거리였다.
군데군데 여행사 부스들이 있어서 직원들이 호객을 하고 있다. 시가지 끝에는 제법 큰 건물들에 명품 샵들과 근사한 야외 레스토랑들이 있었다. 밤이 되어 휘황하게 밝혀진 불빛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아니 내 마음을 신기함으로 들뜨게 한다.
돌아오는 길에 상점가 뒤편의 광장에서는 다양한 민속 공연들이 이어졌다.
그렇게 탐험을 마치고 호스텔에 돌아오니 정원의 바에서는 바비큐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파티라기보다는 바 레스토랑처럼 바비큐 요리를 해서 주문을 받는 식이었다. 한쪽 테이블에 앉아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바로 앞에서 얘기를 주고받던 걸들 중 한 명이 나를 보고 반색했다.
“애니, 너구나.”
찰리였다. 찰리는 옆에 앉은 걸들을 소개해주었다. 친구인 캐롤리나, 그리고 우리의 다른 룸메이트인 나타샤. 모두 런던에서 왔다.
내가 찰리 말대로 침대를 바꾸었다고 하니까, 이층 침대에서 누가 자고 있기에 그게 나인 줄 알았다고 했다. ‘애니가 자고 있구나.’ 생각했었다고. 그녀는 있다가 바에 춤추러 갈 건데 함께 가겠느냐고 했다.
“물론이지.”
호스텔 리셉션 가이가 그곳에 가면 여자들은 술이 공짜라며 입장 팔찌를 주었다고 팔목을 보여주었다. 나도 얻을 수 있을 거라며.
“춤추러 가려면 옷을 갈아입어야 하나?”
내가 물었더니 찰리가 나를 향해 두 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애니, 이뻐. 너 지금 정말 멋있어.”
나는 타이트하고 긴 핑크색 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춤추기에 편한 옷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찰리가 예쁘다니 뭐. 우리는 잔뜩 기대를 하고 바에 들어섰는데, 그곳은 바라기보다는 작은 클럽 같았다. 여자들은 입장도, 술도 무료였고 남자들은 입장도 술도 유료였다.
그러나 우리처럼 홍보단의 안내로 오게 된 건지, 여자들이 더 많고 남자는 거의 없었다. 시간도 클럽이라면 이른 시간이었다. 우리는 두어 잔의 술을 마시며 조금은 썰렁한 이 분위기에서 그래도 최대한 즐겨보자는 마음으로 춤을 추긴 했지만, 음악도 귀에 설고 단조로운 멕시코 음악이라 영 흥이 나지 않았다.
우리가 그냥 밖으로 나오자 그곳에 있던 리셉션 가이가 이른 시간이라 그런다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고 만류한다. 그래서 반신반의하며 다시 들어갔지만 결국 분위기는 반전되지 않았고, 우린 다시 그곳을 나왔다.
대신 다른 야외 바에서 칵테일을 한 잔씩 했다.
찰리는 내게 한국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내가 얼마 전에 퇴직했고 글을 쓰려한다고 했더니, 글쓰기에 관한 책을 한 권 소개해주었다. 그녀는 내 휴대폰의 메모 란에 자기 이름과 메일 주소, 그리고 그 책의 제목을 써주었다.
찰리는 정말 스위트한 여자였다. 그녀는 내일 아침 칸쿤으로 떠난다고 했다.
캐롤리나는 헝가리 출신으로 석사과정을 마치고 런던에서 일하고 있는데, 길고 아름다운 금발에 훤칠한 키의 늘씬한 미인이었다. 동유럽에 가면 여자들이 다 배우같이 예쁘다고 하던 봄이의 말이 생각났다.
나타샤는 역시 런던에서 일하고 있는 차분한 흑인 여성이었다.
바의 직원이 우리 테이블에 와서 홍보용으로 쓸 거라며 우리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흔쾌히 승낙하고 포즈를 취했다. 한참 후에 그가 테킬라 병을 들고 왔는데 그 병위에 우리 사진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너무 신기했다.
그는 우리가 원하면 우리 사진이 새겨진 테킬라 한 병을 20달러에 살 수 있다고 했다. 홍보용이라더니 우리에게 그 테킬라를 팔기 위한 유인책이었던 것이다.
우린 그냥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난 그 병의 사진을 찍었다. 신기하고 좋은 기념사진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