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멕시코, 안녕
안내받은 호스텔 룸에 들어섰을 때, 의자에 앉아있던 남자가 내게 인사한다. 나도 인사하고 가방을 한쪽에 내려두고는 돌아서서 이름을 물었다.
“알렉스”
“나는 애니” 하며 손을 내밀었다. 바르셀로나에서 토마스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알렉스는 엘에이에서 왔다고 했다. 그는 도착한 지 몇 시간 안 된다고. 거리를 한참 동안 쏘다니며 돌아보았다고 했다. 이제 뭐 할 거냐고 물었더니 시내를 조금 더 돌아보고 카페에 가거나 뭐 그럴 거라고 해서 내가 물었다.
“그럼 함께 갈래?”
그는 이곳이 작은 도시라 자기는 이미 거의 돌아본 것 같다고, 오늘 아침 엘에이에서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참이라 피곤하다고, 카페에나 가서 앉아 있을 건데 함께 가면 내가 지루할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추천해주고 싶은 데가 하나 있다고 했다. ‘피 필라 언덕’. 해지기 전에, 지금 가면 딱 좋을 시간이라고, 돌아본 중에 가장 좋았던 곳이라고, 올라가는 길이 가파르니 푸니쿨라를 타고 가라고 했다.
있다가 8시에 저 쪽 침대의 남자와 함께 밤거리를 돌아보기로 했다고 하기에, 나는 놓칠세라 얼른 말했다.
“그럼 그때 나도 함께 가자”
푸니쿨라를 기다리는 줄은 길었다. 내 앞에는 유모차에 아기를 태운 젊은 부부가 있었다. 리본 머리띠를 한 아기는 인형처럼 예뻤다. 아기가 아주 의젓했다. 덮어진 이불 아래로 나와 있는 발을 꼼지락거리며, 부모들이 번갈아 얼러주면 방긋방긋 소리 없이 웃기만 한다.
젊은 아내는 남편에게 애교를 부리고 남편은 그런 아내에게 키스를 해주곤 한다. 그러면서 또 번갈아 아기를 어른다.
껌 파는 소녀가 지나갔다. 놓쳤다고 생각했는데 내 뒤에 서있던 사람들이 뭔가 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며 혼잣말로 ‘껌인가?’ 했더니 일행 중 남자가 그렇다고 했다. 내가 작은 것 하나를 집어 들고 돈을 내려고 하자, 그 남자는 그냥 가져가면 된다고 했다. 자기가 치른 값 속에 들어있다고.
멕시코에 있다 보면 이런 뜻밖의 호의들과 마주칠 때가 많다. 내가 멕시코에서 처음 버스를 탔을 때였다. 버스 비 낼 줄을 몰라 쩔쩔매며 갖고 있는 동전들을 손바닥에 올려놓자, 옆에 앉은 아주머니가 그것들을 세더니 두 개가 부족하다고 했다.
내가 또 어찌할 바를 몰라 하자, 자기 지갑에서 동전들을 꺼내 내 손바닥에 있는 것들과 합쳐서 기사 옆에 있는 차비 통에 집어넣어 주었다. 작다면 작은 일이지만 그 당황스러운 순간에 얼마나 안심이 되고 마음이 따뜻해졌던가.
줄은 길었고 잘 줄어들지 않았다. 뒤에 서있던 커플 중 여자가 내게 일러준다.
“저쪽에 가서 표를 사 와야 해요. 내가 자리를 봐줄 테니 다녀와요.”
'아~, 진짜 친절해!'
푸니쿨라에서 내려다본 도시는 깜짝 놀라리만큼 아름다웠다. 몇 미터 올라갔을 때부터 가까이 내려다보이는 돔 형태의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건물과 역시 비슷한 형태의 많은 건물들이 동화 속 마을 같았고,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시야가 넓어지며 도시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전망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한참을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어디서 거대한 인공조명이 비치는 것 같았다. 햇빛이라면 시간 상 그것이 노을빛이어야 맞을 텐데, 그냥 무색의 빛이었다. 도시가 그 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그리고 성벽처럼 도시를 감싸고 있는 앞산들 위로 거대한 그늘이 드리워지며 산들이 갑자기 주홍빛의 비현실적인 색깔로 변했다. 하늘이 아닌 산의 색깔만 변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은 흐린 하늘에 가려졌던 해였던 것 같기도 하다. 등 뒤 하늘에 해가 지면서 눈앞의 산과 도시가 반사판처럼 그것을 되비추는 것이었다.
조금 더 있으니, 저 아래 도시에 하나 둘 불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풍경은 더욱 아름다워지고 더욱 풍부해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 낮이 저녁으로 바뀌며 붉게 물드는 노을과 그것이 스러지면서 하나둘씩 밝혀지던 도시의 불빛들이 무수히 반짝이게 될 때까지, 나는 그곳에 서서 그 변화하는 풍경을 지켜보았다.
다시 푸니쿨라 줄을 서고 싶지는 않은데, 내려가는 길에 인적이 드물어 무서우면 어떻게 하나 고민되었다. 그런데 내려가는 길은 아주 좁은 골목의 계단들로 이어지고, 그 안에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찬 채 걷고 있어서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호스텔 룸에 들어서자, 알렉스가 8시에 함께 나가기로 했다던 남자가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그를 보고 잠시 확신이 안 선 내가 물었다.
“너 알렉스 아니지?”
“나 알렉스 아닌데”
그러자 가려진 쪽 침대에서 얼굴을 빼꼼히 내밀며 알렉스가 대답했다.
“나 여기 있어.”
난 다시 그 남자에게 물었다.
“그래 이름이 뭐야?"
“마틴”
“애니”
난 알렉스에게 했던 것처럼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8시에 나가기로 했었지?” 내가 알렉스에게 말했다.
아직 7시 30분이었다.
알렉스는 8시에 나가면 합류할만한 그룹들이 많아서, 어울리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난 그 말을 다르게 알아들었다. 그냥 너 혼자 나가도 다른 그룹들과 쉽게 어울릴 수 있을 테니, 굳이 우리랑 안 가도 된다는 말처럼 들었던 것이다.
난 김이 빠졌다.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숨 가쁘게 달려왔는데. 그들은 각자 침대에 누워있고 나는 그냥 방을 나와 버렸다.
복도에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곳으로 가서 앉아있으니까, 한참 후에 마틴이 내 쪽으로 왔다. 복도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앉아있었는데, 나를 찾고 있던 모양이었다. 후드 모자를 쓰고 있어서 긴가민가 하며 그냥 맹송맹송 쳐다보고 말았는데 , 머쓱했는지 코너를 다시 돌아오며 말한다.
“나 마틴이야.”
“알아, 너네 지금 나가는 거야?”
“응, 지금 가”
“나 함께 가도 돼?”
“물론이지, 가자.”
내가 좀 전에 말귀를 못 알아들었던 게 맞다. 우리 셋이 함께 나가면, 다른 그룹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게 어렵지 않을 거라는 말이었던 것이다. 나의 영어 듣기 능력은 자주 이런 오류를 일으킨다.
둘 모두 말이 많지는 않았다. 마틴은 아르헨티나에서 왔기 때문에 영어가 서툴러서 그러기도 했다.
로미오와 줄리엣 시대의 복장을 한 사람들이 뭔가 호객을 했고,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마틴이 그걸 듣고서 흥정을 했다. 우린 1인당 100페소씩을 내고 티켓을 샀다.
도시라기보다는 거의 마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도심은 수많은 사람들의 함성과 무엇을 향한 것인지 모를 환호와 흥겨운 음악소리로 가득했다.
우리가 산 티켓은 바로 그중의 한 그룹에 합류하기 위한 것이었다. 알렉스가 말했던 그룹이란 게 바로 이거였던 것이다.
조그만 무대처럼 움푹 들어간 곳의 둥그런 계단들이 객석이 되고, 사람들이 그 계단에 앉아 공연을 관람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 연주자들과 관객들이 모두 일어나 어디론가 이동하자 새로운 연주자들이 무대에 섰고, 우리는 새로운 관객들과 함께 그 객석에 앉았다.
연주자들을 이끄는 한 재간둥이가 끊임없이 얘기를 들려주며, 관객들의 힘찬 호응을 이끌어냈다. 연주자들도 모두 전통복장을 하고 전통 악기들을 연주하며 노래하고 춤도 추었다.
관객들은 그들이 호응을 유도할 때마다 우렁찬 목소리로 함성을 지르거나, 가르쳐준 단어를 외치며 흥분된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모두 스페인어라서 난 내용을 알 수는 없었지만, 스토리와 가사가 전부는 아닌 종합 퍼포먼스였기 때문에 즐기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한참 그렇게 공연을 하더니 그들이 무대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움직였고, 관객들도 그들을 따라서 움직였다. 우리가 이 야외극장으로 들어서기 전에, 그곳에 있던 다른 팀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연주자들을 따라 좁은 골목을 누볐다. 어떤 곳에 이르자 그들은 관객을 여자와 남자 그룹으로 나누어 서로 마주 보고 서게 했다.
그리고는 어떤 노래를 몇 소절씩 나누어서, 각기 자기 파트의 노래를 부르게 했다. 그런데 맞은편 남자들이 어찌나 진지하면서도 흥에 겨운 표정과 몸짓으로 노래를 부르는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무척 소박한 모습이기도 했다. 그 노래를 익히 알고 있는 듯한 그들의 몸짓과 표정이 눈에 생생하다.
그렇게 갈라서 있던 남녀 그룹은 서로 다른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곳 계단에 둘러앉아, 한 남자가 종이 카네이션 같은 작은 꽃을 들고 뭐라 뭐라 설명을 했다. 그러자 몇몇 여자들이 지갑을 열고 그 꽃을 샀다. 저 꽃이 뭐라고 저런 걸 다 살까 싶었다. 뭐 그렇고 그런 기념품 같은데.
한참 후에 남자들 무리의 노랫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꽃다발을 든 남자들이 어떤 여자들에게 다가가 꽃을 전해주고, 서로 포옹하거나 키스를 했다. 여자들은 좀 전에 샀던 꽃을 남자들에게 주었다.
환호가 쏟아지고 배경으로 음악이 연주되었는데, 순간 밑도 끝도 없는 감동이 밀려온다. 목구멍에 그 감동이 느껴지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상업적으로 기획된 퍼포먼스라고 해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함께 나선 여행에서 마주하게 된 갑작스러운 선물과 마음의 표현에 서로들 기뻐하는 것, 그 퍼포먼스에 참여하는 사람들,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 모두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것이다.
혼자 길을 떠나 여행하던 내게는 달콤 씁쓸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낯선 도시의 골목골목을 흥겨운 악단과 다른 여행자들과 함께 하며, 짧은 순간이나마 어떤 연대감마저 느껴졌었다.
어느새 우리는 처음 퍼포먼스를 시작했던 무대 근처에 와있었다. 알렉스도, 마틴도 “근사하다” 하면서 아주 흡족해했다. 도시 전체가 로미오와 줄리엣 시대의 낭만 같은 것이 느껴지게 하는 밤이었다.
저녁은 길거리 음식으로 해결하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마틴의 음식을 한 입 먹어보고는 도리질을 했다. 아침부터 바나나 한 개와 요거트 한 개, 그리고 피 필라 언덕에서 사 먹은 생 과일 주스가 종일 먹은 전부였지만, 별로 배고프지도 않아서 난 그냥 저녁을 거르기로 했다.
알렉스는 먼저 들어가서 좀 쉴 테니, 둘이 더 돌아다니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했다. 마틴도 내일 운전해야 한다고 했고, 나도 내일 산 미겔 아옌데에 간다며 다들 일찍 돌아가는데 합의한다. 내가 산 미겔 아옌데에 간다고 하니까, 마틴이 자기도 낼 거기 간다고 했다.
“오, 잘됐다!”
난 화들짝 기뻐하며 팔을 치켜들었다. 그 말은 곧 우리가 동행할 거란 뜻이었다. 마틴의 표정도 화들짝 반기며 입이 귀에 걸렸다.
호스텔 문을 들어서며 나는 마치 동행이 기정사실화 된 것처럼 마틴에게 물었다.
“내일 몇 시에 출발할 거야?”
“응, 열 시에.”
“오케이”
난 함께 가자고 청한 적도 없고, 마틴도 그러자고 한 적도 없다. 그러나 암묵적으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