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에 와 박힌 폐허, 아바나

- 쿠바에 도착한 날

by Annie



드디어 쿠바다. 사람들이 쿠바, 쿠바 하는 이유를 아직은 잘 모르겠다. 공항 택시는 정가 30 쿡(3만 원)이었고 버스라고는 없었다. 이동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택시인 것이다.

택시 기사는 주소를 한 번 보고는 정확히 내가 묵을 호스텔 앞에 나를 내려주었고, 직접 벨을 눌러 내가 들어가는 것까지 보아주었다. 정중하면서도 선한 친절함이 물씬 묻어난다.


1박에 8천 원 하는 백패커스 호스텔이라 기대는 없었지만, 관리를 세련되게 하지 않아서 그렇지 높고 넓은 회랑은 아름다움이 흔적처럼 남아있었다. 6인 혼성 룸은 어둡고 눅눅했다. 게다가 낮 12시를 넘긴 시간인데도 한 남자가 아직 자고 있었다. 그래도 그 가격에 그 이상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지 싶었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오며 창밖으로 바라다본 아바나, 그리고 수없이 많은 골목들이 엉켜있는 이 주거지역은 무척 퇴락한 모습이었다. 부서지고 버려진 것 같은 건물들 안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골목마다, 집집마다 빵 밀대의 밀가루처럼 가난이 묻어있었다. 길거리 곳곳에는 방금 싸놓은 개똥들이 천연덕스럽게 굴러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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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온라인에 이런 글을 남긴 것을 본 기억이 있다. “아바나를 보며 체 게바라나 카스트로가 꿈꾸었던 그 혁명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나 역시 그랬다.


지금껏 누군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과에 대해 얘기할 때면 그 공에 대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젓곤 했는데, 새삼 그를 다른 각도에서 평가해 보았다. 그의 죽음이 그 정도에서 독재를 마무리하게 했던 것은 한국 정치사에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한국인의 피 속에는 무엇이 있어서 그 짧은 기간에 전쟁의 폐허에서,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의 대열에 끼게 된 것일까?


인터넷 카드를 사기 위해 공원 근처의 가게까지 걸어갔다. 무작정 걸었다. 기운이 없다. 메고 있는 가방이 어깨와 가슴을 압박하여 숨쉬기도 힘들다. 무엇을 먹든지, 어디 편안한 곳에 가서 좀 쉬어야 한다.

그런데 듣던 대로 인터넷 카드를 사기 위한 줄은 길었고, 잘 줄어들지도 않았다. 난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 부스 벽과 내 팔 사이에 끼운 채 거기에 기대고 섰다. 누가 봐도 지치고 힘든 모습으로.


나의 울띠모(아바나에서는 줄을 서야 할 경우, 자기 앞에 선 사람을 울띠모라 부르고, 그 사람만 기억하고 있으면 근처 어디에 있다가도 자기 차례를 알 수 있다.)였던 한 아주머니는, 그런 내 모습이 딱했는지 자기보다 먼저 내게 일을 보도록 자리를 내주었다.


여행 떠나기 전, 인터넷을 검색하며 읽었던 대로, 쿠바 사람들이 순수하고 좋다는 말은 맞는 것 같다. 호스텔만 해도 체크인 시간이 3시였지만, 12시도 채 안 되어 도착한 내게 군소리 없이 방을 안내해주고 침대 시트도 주었다. 그리고 인터넷 카드 살 곳과 환전할 곳도 지도를 보고 일일이 다 알려주고, 은행 환율까지 체크해주었다.


일단 인터넷 카드만 사놓고 카페를 검색해보니 2백 미터 거리에 한 개가 있었다. 이곳은 정말 물자가 부족한 것 같다. 변변한 식당도, 가게도, 슈퍼도 찾기 어렵다. 작은 매점 부스처럼 생긴 가게들도 모두 쇠창살로 가게 내부와 외부가 차단되어 있었다. 더러 간식거리를 만들어 파는 것 같은 작은 가게들도 지나다 보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긴 골목이 끝나고 바다와 둑이 보이는 것이, 여기가 말레콘 비치인 모양이다. 그 앞에 괜찮아 보이는 카페가 있어서 들어갔다. 드디어 쉴 곳을 찾았다. 바나나 슬러시와 샌드위치를 시켰다.


슬러시는 배고프고 지쳐있던 내게 황홀한 메뉴였다. 바나나를 갈아 그 위에 잘게 썬 과일과 오트밀을 얹었는데, 그것만으로도 가벼운 한 끼 식사는 될 것 같았다. 햄과 치즈가 잔뜩 들어간 커다란 바게트 샌드위치는 이등분되어서 나왔는데, 난 한쪽만 먹고 나머지 한쪽은 저녁식사로 남겨두었다.

커피 맛도 좋았다. 카페 벽면의 소품이나 조명, 탁자와 의자 등은 재활용 재료들을 이용해 나름의 디자인 감각도 보여주고 있다.



쿠바 - 1.jpg 남은 샌드위치를 포장해준 봉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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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 1 (10).jpg 말레콘 비치 앞 도로



말레콘 비치는 썬셑이 아름답다고 들어서 기다렸는데, 제대로 썬셑을 만나지도 못했고, 사람들도 생각만큼 많지 않았다. 하나 둘 가로등이 켜지는 것을 보며 어둡기 전에 호스텔로 돌아가려고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날은 금세 어두워졌고 난 길을 잃은 것 같다.


분명 호스텔에서 멀리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복잡하게 얽힌 골목들 때문에 제대로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물어물어, 말레콘에서 3블록 거리에 있는 호스텔로 무사히 돌아왔다. 바나나와 토마토, 물 두 병을 사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