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바
너무나 행복한 아침 식사다. 30분 전 루프 탑 정원에 올라갔더니 부드러운 아침 햇살과 청명한 하늘, 간밤에 비가 왔었나 보다. 의자나 테이블의 먼지까지 말갛게 씻겨 있었다. 그러나 비가 온 건지 아침에 물청소를 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구석구석의 식물들과 작은 화분들, 벽의 색깔, 지붕, 하늘빛 등의 색감이 너무나 조화롭고 예쁘다. 벽에 비친 그림자까지. 너무 예뻐서 카메라를 들고 나와 사진을 찍었다.
한 청년이 올라와 테이블 보를 깔았다. 어떻게 보면 촌스러울 수 있는 주홍빛 바탕에 초록과 노란 꽃무늬였는데 민트색 의자와 초록 식물, 붉은 벽돌 바닥 등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
네 개의 포트에 따뜻한 물, 따뜻한 우유, 커피, 그리고 갓 갈아낸 망고 주스, 티, 버터, 넓고 얇게 자른 페타 치즈, 바구니에 담아낸 빵, 꿀, 팬 케이크, 그리고 오믈렛, 과일. 한 상 가득 정성스럽게 차려 낸 아침상에 그저 황홀할 뿐이다.
식탁이 화려하지 않았다 해도 이 예쁘고 청량한 공기와 분위기만으로도 행복했을 것이지만, 식탁까지 이렇게 풍성한 것이 어느 호텔 식사도 부럽지 않다. 빵과 치즈를 조금 남겼을 뿐, 난 모든 접시를 말끔히 비웠다. 망고 주스 두 잔까지. 사실 종일 안 먹어도 될 것 같다.
오늘 오후 3시에 살사 댄스 강습 1시간을 청했다. 1시간에 10 쿡. 트리니다드에서는 사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또다시 비냘레스에서 했던 것 같은 등산과 비치 놀이를 반복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를 마중 나왔던 에두아르도는 이 까사 여주인, 넬리의 오빠다. 그들은 이복 오누이라고 했다. 에두아르도는 발음이 알아듣기 어렵지만 영어를 꽤 하는 편이다. 핵 발전소에서 근무했다고 하는데, 알다시피 이곳 쿠바에서는 노동자들의 월급이 25 쿡 밖에 안 된다. 주거비와 생활비를 감당하기에 턱도 없이 부족하다고 한다.
국가에서 교육과 병원 치료, 생계 보조금을 준다 해도 그것이 생계를 원활히 유지할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그의 아내는 의사인데 월급이 75 쿡이라고. 그도 넉넉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딸이 하나 있는데 지금 의대 공부를 하고 있다 한다.
그래도 이들은 쿠바 내에서는 부르주아에 해당한다. 넬리처럼 까사를 운영하는 것은 그 수입이 노동자의 월급에 견줄 바가 아니다. 그래서 쿠바의 여행지에서는 한 집 건너 까사, 한 집 건너 바와 레스토랑이다.
넬리는 내가 이곳에서 저녁 식사도 하고 투어 신청도 했으면 한다.
그러나 그런 부담을 안고 싶진 않고 아침 식사와 댄스, 그리고 짚 사파리, 콜렉티보 택시 정도만 부탁하려 한다. 저녁 식사 또한 훌륭할 것이 분명하지만, 난 외부의 공기와 분위기가 필요하므로.
오늘은 이른 오전을 이곳에서 보내고, 나가서 와이파이 접속을 해야 한다. 한국으로 내 신상 정보와 카드 정보를 보내 콜롬비아행 비행기 표를 사게 하고, 호스텔 예약도 대신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나면 모레 아침 아바나로 돌아갈 콜렉티보 택시를 신청하고, 오늘은 밤에 함께 돌아다닐 동행을 구해야 한다. 길거리 헌팅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어젯밤에 와이파이 접속을 위해 나가야 했는데, 사실 와이파이는 금방 끊겼고 밤길에 혼자 돌아다니기 무서워 그냥 돌아와 버렸다. 오늘은 모처럼 카메라를 들고 한가로이 돌아다녀야겠다.
나는 늘 길을 잃는다. 생각 없이, 계산 없이 걸어서 그럴 것이다. 어젯밤에도 길을 잃을 뻔했던 참이라 오늘은 조심해야지 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또 헤맸다. 그래서 저녁나절에 다시 나갈 때는 블록을 세고 이정표도 확인하며 주변을 잘 기억하려고 애썼다.
그 노력 덕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요행으로, 또는 눈에 좀 익어져서 밤길에도 잘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낮엔 가볍게 먹으려고 피자집에 들어가 하와이안 피자와 망고 주스를 시켰다. 하와이안 피자는 무늬만 하와이안일 뿐이었다. 이곳에서는 맛 좋은 피자를 기대하면 안 된다. 그러나 와이파이는 아주 잘 터져서 심지어 호스텔 예약까지 할 수 있었다.
식당 한 칸 앞자리에 백인 걸이 한 명 와서 앉았는데, 내겐 음식 주문만 받아가던 직원이 그녀에게는 무어라 말도 걸고 묻지도 않았는데 와이파이 번호까지 알려준다.
나는 그 오스트리아 걸에게 말을 걸었다. 우린 여행에 대해, 그리고 내일 일정에 대해, 오늘 할 일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밤차를 타고 와서 오전에 등산까지 마친 씩씩한 걸, 취업을 몇 달 앞두고 여행 중이라고 했다. 그녀는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나의 여행에 대해 멋진 일이라고, 만나서 여러 얘기를 나누어 정말 좋았다며 떠나갔다. 그녀 말대로 밤에 번화한 곳이면 혼자여도 무섭지 않을 것이다. 혼자서라도 이곳의 밤 풍경을 즐겨보자.
도중에 길을 헤매느라 약속한 살사 교습 타임에 맞추지 못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시간 내에 도착했다. 살사의 기본 스텝 3가지와 턴 하는 법을 배웠다.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살사는 여자들에게는 어려운 춤이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남자들이 거의 모든 것을 하기 때문에 여자들의 춤 동작은 간단하다고 한다.
1시간 강습에 그녀는 많이 지쳐했고, 나도 무척 덥고 숨이 찼다. 샤워하고 맥주 한 캔 마시며 방문을 활짝 열어 놓고 쉬고 싶었다. 그렇게 방에서 사진을 정리하고 났더니 금방 해가 떨어질 것 같아, 주섬주섬 챙겨 길을 나섰다. 지나온 길을 눈 안에 새겨두며.
낮에 보니 마요르 광장 옆, 보랏빛 등꽃이 예쁘게 늘어진 2층 테라스가 눈에 띄었다. 여행자 두 명이 앉아 식사하는데 나도 저렇게 저기에 앉아봤으면 하고 부러워했었다.
오늘 밤엔 나도 그곳에서 분위기를 좀 내봐야지 하고 들어갔더니, 1층의 테이블 세팅이 심상치 않다. 하얀 테이블보에 투명하게 반짝이는 와인 잔들이 놓여있다.
이층으로 올라갈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식사를 할 거냐고, 음료만 마시는 건 아닌가 물었다. 식사할 거라고 했더니 2층으로 안내해주었다. 쳇! 지가 비싸 봐야 얼마나 비싸겠나. 까사에서도 저녁은 16 쿡이나 하던데. 그래, 오래간만에 와인도 마시고 사치를 좀 하지 뭐.
올라갔더니 과연 전망이 너무 좋고 테이블 세팅도 근사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난 치킨 스테이크(9 쿡)와 레드 와인(4 쿡)을 시켰다. 만 오천 원의 초호화 저녁식사였다.
테라스 아래로 낮에 본 그 오스트리아 걸이 지나가다 나와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서로 손을 흔들었다. 함께 맥주라도 한 잔 할까 하다가 그냥 여행자끼리 나누는 대화에 한계가 있을 거라 여겨 포기했다.
그녀는 파티 걸 타입도 아니어서 함께 밤 문화를 경험할 일도 없을 듯했고, 정말 호스텔에서 만나지 않고서는 긴 얘기 나누며 여정을 함께 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수동성은 좋은 태도는 아니다.
룸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텄는데, 맛을 보니 사이다였다. 알딸딸하게 취해서 울적한 기분에 빠져볼까도 했는데, 뭐 그럴 것도 없이 잘됐네. 치킨 요리가 좀 더부룩했는데 시원한 사이다도 괜찮지.
여행이 아닌 일상을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에 바쁠 뿐, 지인의 여행이나 그 여행지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행자는 그들과 소통하고 싶어 진다. 자신의 여행을 나누고 싶어 한다. 할 말이 많고 보여주고 싶은 것이 많은 것이다.
여행은 그런 것이 아닐까? 보여주고 싶고 들려주고 싶은 것이 많아지며, 소통하고 싶은 욕망도 커지는 것, 다시 말해 보고 느끼는 것이 풍부해지는 것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뚤름 호스텔의 마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한 호스텔에 장기 투숙하여 그림도 그리고 공구 제작도 하고 책도 쓰며, 삶이 여행의 연속인 사람의 삶은 어떤 것일까? 사실 나도 그렇게 살아도 되지 않나? 국내에서의 생활비로 물가가 비교적 싼 나라들을 돌아다니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