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행의 휴식처, 트리니다드(2)

- 쿠바

by Annie



아침을 먹고 어제 오스트리아 걸이 권했던 등산을 하려고 조금 일찍 나섰다. 중간에 와이파이 존에서 카톡 확인도 할 겸, 정우가 내 항공권 구매를 시도하고 있었지만 웹 사이트 문제인지, 내 카드 문제인지 잘 안 되고 있었다. 혼자 등산을 간다고 하니까 위험하니 혼자는 가지 말라고, 그룹과 함께 행동하라고 한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함께 할 그룹이 있어야지. 봄이도 간밤에 꿈자리가 안 좋다고 하지 말라는 것은 절대 하지 말라는 톡을 보내왔다.

아침에 용용하게 나섰던 나는 핑계 김에 등산을 접고, 대신 찢어져서 이제는 버려야 할 샌들 대신에 새 샌들을 사고, 그간 벼르던 백팩을 하나 샀다.


샌들은 가죽인데 꽤 편하고 튼튼해 보였다. 백팩은 그리 실용적 일지는 모르나, 지금껏 들고 다닌 것들보다는 그래도 좀 나아 보이는 것으로 골랐다. 가죽 비슷한 것인데, 38 쿡 부르는 것을 밀당 흥정 끝에 21 쿡에 샀다. 15 쿡짜리 신발도 좀 흥정을 할 걸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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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엔 어디나 덥다. 어제 점심 먹으러 들어간 식당도 루프 탑 그늘이었지만, 더운 공기에 조금 숨이 막힐 듯했는데 바람이 불면 좀 나아지긴 했다. 오늘은 점심을 거르고 까사 루프 탑에 앉아 있는데 이곳도 덥다.

아침 식사가 거의 점심까지 커버하는 분량이라 돈도 절약할 겸, 이른 저녁 식사만 가볍게 할 생각이다. 더워서 생각이 느려진다. 방에서 좀 쉬어야겠다.


엊그제 떠나온 것 같은데 벌써 한 달이 가까워진다. 까사의 뒷문을 열면 작은 테라스에 빨랫줄이 있고, 커다란 감나무가 있어서 바람에 잎들이 서걱인다.

외출해서 돌아다니다 화장실을 가고 싶으면 돌아오고, 지치면 들어와서 30분쯤 달콤한 낮잠을 자기도 했다. 더 건강해진 느낌이다.


한국에 있을 때는 운동 삼아 걸을 때도 한쪽 무릎이 조금씩 아플 때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선 햇빛에 노출된 시간이 너무 많아 비타민 D를 충분히 받아들여서인지, 많이 걷는데도 다리 아픈 줄을 모르겠다.

이젠 시차 적응도 좀 된 것 같고, 이곳 트리니다드에서 몸 상태가 균형을 잡은 것 같다. 이제 또 힘껏 여행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우가 용케도 쿠바에서 콜롬비아 구간을 운항하는 wingo 항공사에 접속해서 티켓을 샀는데, 자꾸 결재에 실패하고 있다 한다. 어렵고 성가실 일이지만 그는 기쁘게 그 일을 해낼 것이다. 지난 몇 년이 그에게는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온 세월이라 할 수 있다.

지금도 그렇다. 함께 늙어 가면 좋으련만, 나 혼자 너무 빨리 늙고 있어서 어떡하나?


어제는 까사 루프 탑에서 한 시간 동안 살사 강습을 받았다. 기본 3단계 스텝을 배우는데, 그녀의 입에서 단내가 났다. 약간 통통한 체구의 4-50세쯤 되어 보이는 그녀는 오늘이 댄스 교습이 많은 날이라 힘들다고 했다. 하긴 그 기본 스텝을 하루에도 몇 번씩 되풀이해서 가르치자면 지겹기도 할 것이다.


땀 흘리는 그녀를 보며 1시간에 10 쿡이면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1 쿡을 더 주었다. 무척 좋아했다. 그녀의 소개로 미용실을 알게 되어 오늘 염색도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스텝을 잘 기억해서 잘 따라온다고 했다. 재즈 댄스를 해봤던 것이 도움이 되었을까?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염색을 했다. 까사 주인인 넬 리가 미용실까지 나를 데려다주고 함께 기다려주기까지 했다. 머리를 다루는 손길이 무척 세심하고 조심스러워서 기분이 좋았고, 앞머리까지 좀 자르고 나니 한결 상큼해진 느낌이다.


플라자 마요르 조금 위에 있는 마을까지 탐험해보았다. 폐허가 된 채로 방치되어 있는 교회 건물은 그래도 아름다웠다. 쿠바는 그 어느 것도 손대지 않은 채, 말 그대로 방치한다. 그들에게는 그것을 손볼 여유도 관심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쿠바가 나는 계속 마음이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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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냘레스의 가이드는 아바나도, 트리니다드도 가본 적이 없다고 했었다. 여행할 돈이 없으므로, 쿠바인들은 여행을 하지 못한다. ‘쿠바에 살고 있으면서도 너희들보다 더 가본 곳이 없다’고 말하며 그는 씁쓸해했다.

젊은 쿠바인들의 처지와 마음은, 특히 관광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의 경우는 이와 같을 것이다. 여행자들을 바라보는 그들은 부러움보다 체념이, 거기서 오는 쓸쓸함이 커 보였다. 인터넷과 여행자들을 통해서 보는 세계는 쿠바가 처한 현실과 너무 먼 것이어서 그들은 절망한다.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가 꿈꾸었던 혁명의 실패, 그들이 꿈꾸었던 혁명의 남루한 현재가 나를 씁쓸하게 한다. 사회주의는 이데아를 꿈꾸는 이상주의자들에게만 가능한 사회일까? 그 이상을 끝까지 지켜나가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그 이상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일까?

공동의 선을 위해서보다는 개인의 이익과 욕망에 끌리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어서, 공동선을 이루고자 하는 사회주의는 태생부터 실패를 안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국민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성장 지상주의의 독재를 경험했던 한국과 달리, 그들은 그런 독재에 항거할 일은 없었을지 모르나, 현재의 상황은 한 때 한국의 젊은이들이 겪어야 했던 그 독재보다 더 나을 것이 없을지 모르겠다.


충분한 부와 평등을 누리고 있다는 북유럽 국가들도 각자의 문제를 갖고 있기는 하다. 스웨덴에서 온 소피아가 말했던 것처럼 그곳에서도 사람들은 늘 더 많은 돈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했다. 네덜란드에서 온 수잔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풍요롭지만 남보다 더, 상대적으로 더 풍요로워지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행복이 요원하기는 마찬가지다. 부의 기준은 너무 높아졌고 앞으로도 계속 높아져 갈 것이다. 높아지는 기준만큼, 우리 행복도 그만큼 도달하기 어려워질지 모른다.



이곳 트리니다드는 관광지라 근사한 식당이며 관광 인프라가 잘 되어 있고, 깨끗해서 기분이 좋다. 아바나에서 내가 그렇게 불편했던 것은 그 어느 곳보다 여행자로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없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멋진 카페, 좋은 음식점, 과일, 필요한 물품들, 심지어 물 한 병 사기가 힘들었던 것, 허물어져가는 것 같은 건물과 집들, 거리들. 인터넷 카드가 있어도 접속할 수 있는 곳이 너무나 제한적이고, 볼거리도 없었던 첫날의 아바나. 지금까지 여행했던 그 어느 곳보다 열악해서 좋은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곳이었다.


첫날 구 아바나의 번화가에 갔더라면, 그 느낌이 아주 달랐을지 모른다. 첫날의 우울한 인상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일까? 둘째 날 가본 구 아바나의 도심은 첫날 본 아바나 주거지역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는데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너무 지쳐서였을까?

심지어 카페에 앉아있으면서도 몹시 졸렸다. 전날 밤에 호스텔 친구들과 늦게까지 어울리느라 늦게 잤던 탓인지도 모른다. 아바나의 호스텔도 잠을 자거나 쉬는 곳으로는 적합하지 않은 데다, 위치가 번화가와 도보로 먼 거리에 있어서 걷느라 더 피곤했던 것인지 모른다.


난 그렇게 실망감과 피로를 뒤로 하고 아바나를 떠나왔다. 그래도 막상 떠나는 날 아침에는 그 복잡하고 정신 나갈 듯 소란한 골목들이 꽤 생기 넘치는 곳으로 느껴지기도 했으니, 다시 돌아가 이틀을 묵게 될 아바나는 한 번 기대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