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고타
비행기에서 내려 캐리어를 찾기 전에 급히 환전을 했다. 200달러를 환전했는데, 무슨 6십만 페소라는 엄청난 양의 돈을 준다. 대체 이 나라의 돈 가치를 가늠할 수가 없다. 미리 환율을 알아보지 않았던 나는 택시를 타야 하는데, 택시비로 얼마를 주어야 하는지, 달라는 대로 다 주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환전 후에 조금 당황한 데다, 컨테이너 벨트 앞에서 캐리어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더워져서, 입고 있던 패딩을 벗어야 했다. 패딩을 벗으려면 등에 매고 있던 백팩을 먼저 벗어야 해서, 방금 환전한 돈을 급하게 백팩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가방은 바닥에 내려놓고, 그 안에 벗은 패딩을 구겨 넣었다.
그때 저쪽에서 내 캐리어가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다급히 가방을 들고 그 캐리어 쪽으로 달려가 낑낑대며 캐리어를 내렸다. 됐다 하고 캐리어 위에 큰 가방을 장착하고 난 공항 밖으로 나섰다.
택시 기사 한 명이 접근한다.
“시내. 얼마예요?”
“60,000페소”
대체 6만 페소는 어느 정도의 돈이며, 이 가격이 적정 가격인지도 알 길이 없었다. 영어 단어 하나씩으로 협상을 벌이고 있는 사이, 가까이 다가온 경찰이 저리 가라는 눈짓을 하자 기사는 물러섰다. 그 기사 말에 의하면 우버는 45,000 페소라고 했다.
'그럼 여기서도 우버가 된다는 얘기네? 그럼 우버를 타야지.'
공항 와이파이를 써서 우버를 부르려고, 공항으로 다시 들어갔다.
문득 뭔가 허전했다. 백팩! 내 등에 백팩이 없다. 어떻게 이럴 수가, 어떻게 백팩을 두고 올 수가 있지? 평소 두세 개의 지갑을 짐 여러 개에 분산시켜 두는 나였지만, 하필 이번엔 지갑들도 모두 백팩 안에 있었다. 다행히 휴대폰과 항공권은 내 손에 있었다.
나온 지 10분도 채 안됐으니 이 항공권을 보여주면 다시 출국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지 하며 뛰어갔다.
입구에서 한 여자 직원이 나를 제지한다. 난 다급하게 상황 설명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랐고, 나는 그녀의 스페인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도 온갖 몸짓과 표정을 동원한 나의 설명이 통했는지 그녀는 어디에다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다시 내 가방의 모양과 색깔, 그리고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했다. 난 두어 번씩 설명을 하면서도 그녀가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두어 차례 더 전화 통화를 한 그녀가 내게 무슨 말을 하는데, 내 가방의 소재를 알았다는 것인지, 나한테 직접 어디로 가서 알아보라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으로 미루어 볼 때, 찾을 수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녀는 내게 방향을 가리키며 그리 가라고 했다. 끝까지 가서 올라가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영어 한마디, finish를 강조하는 것이 끝까지 가라는 말인 것 같았다.
난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끝까지 걸어갔다. 그러자 무슨 열린 사무실 같은 것이 있고,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 모두 영어는 알아듣지 못해 서로 중구난방으로 몸짓 언어를 하는데, 그때 영어를 하는 남자가 한 명 들어왔다.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그는 아메리칸 에어라인 사무실로 가보라고 했다.
내 생각엔 항공사와는 아무 관련이 없을 것 같은데. 내가 난감한 표정을 짓자 그중 떠듬떠듬 영어를 몇 마디 하는 남자가 따라오라며 앞장섰다.
'난 가방을 찾을 수 있는 걸까?'
그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고 한 막다른 복도에 이르자, 그는 손으로 가리키며 그 복도 끝에 가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돌아갈 모양이었다. 내 생각엔 절대 그곳일 리가 없었다.
'만약 아니면 어떻게 해? 이 사람은 가버리고 없을 텐데.'
내가 아닐 거라고 하자, 그는 전화를 걸더니 다시 나를 데리고 1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출국장 입구 안쪽에 서있는 두 여성을 가리키며, 그리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하지만 여기서 그가 가버리면 난 지금까지 시간만(골든타임) 허비하고 처음부터 다시 헛되이 그 짓을 되풀이하다, 결국 가방도 못 찾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에 나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나는 두 손으로 그의 팔을 붙들고 어린애처럼 사정했다.
“가지 마요! 여기서 나랑 기다려요!”
그러자 당황한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출국장 앞에 마중 나와 서 있다가 그 상황을 보게 된 사람들은 모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가야 한다고 했지만 난 그의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오늘 가방을 찾지 못하면 난 이 사람 집까지 따라가는 것도 불사할 판이었다. 그는 거머리에게 걸린 것이다.
그때 출국장 안쪽의 두 여성을 향해, 한 여성이 뭔가를 들고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한 손에 내 백팩을 대롱대롱 들고 있었다. 난 환호하며 달려가 가방을 전해 들고, 두 손으로 가방을 껴안고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가방을 가지고 온 그녀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덥석 껴안고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저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 남자 직원에게 달려가, 역시 고맙다며 그도 덥석 안았다. 그러자 그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아까보다 더 큰 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이 가방을 잊고 그냥 나올 수가 있었지? 그리고 또 어떻게 이 가방이 온전히 내게 돌아올 수 있었지? 모든 게 믿기지가 않았다.
이제 택시를 타야지. 그러나 와이파이가 연결되지 않아 우버는 안 되고, 아직 화폐 단위 짐작을 못해 믿을 만한 사람에게 물어봐야 할 텐데 하고 두리번거리는데, 아까 그 남자 직원이 또 보인다. 그에게 시내 가는 택시를 물었더니, 그는 어떤 남자에게 나를 택시에 태워주라고 했다. 그는 아마 호텔에서 픽업을 나온 사람인 듯했다.
그는 나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고, 그곳에는 노란 택시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가 한 기사에게 나를 인도하고 갔다. 이렇게까지 했으니 믿을 만하겠지 하고 택시에 탔다. 얼마냐고 물으니 45라고 했다.
45는 콜롬비아 화폐 45,000페소를 의미한다. 그들은 '꽈렌따 씽꼬 밀'이라고 말한다. 혹은 '그냥 꽈렌따 씽꼬'라고도 한다. 맨 처음 택시 기사가 60을 불렀으니 확실히 더 싸긴 하다.
택시가 도심에 들어서서는 언덕길을 꼬불꼬불 몇 번이고 오르락내리락했다. 그 와중에 앞에 계속 경찰차가 가고 있다. 최소한 앞에 경찰차가 있다는 것은 내게 안전함을 느끼게 하니 좋은 거다. 택시가 길을 너무 꼬불꼬불 오르내려서 혹시 나를 이상한 데로 데려가는 건 아닐까 긴장해 있었던 참이었다.
어느 골목에 이르니 그곳에 다른 경찰차도 서있고, 사람들이 나와 있는 것이 무슨 사고가 있었나 보다. 택시 기사는 나를 호스텔 앞에 내려주고 초인종도 눌러주었다.
호스텔 문이 열리고, 머리를 묶은 안경 낀 남자가 나를 반긴다. 밤 11시쯤 되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안에는 또 다른 남자가 한 명 있었다. 나는 우여곡절 끝에 안전하게 호스텔에 도착한 것에 한편으로는 흥분도 되고, 또 한편으로는 안심도 되어, 그들과 함께 앉아 수다를 떨었다.
내가 그들에게 공항에서의 롱 스토리를 들려주는 사이, 또 다른 남자가 한 명 등장했다. 처음 문을 열어준 이가 주인인 존이고, 앉아서 자기가 한국인이라며 영어로 너스레를 떨던 이가 한국계 미국인인 제임스, 나중에 나타난, 코에 피어싱을 한 남자가 스페인에서 온 니키타였다.
자정이 되도록 우리는 그렇게 앉아 왁자하게 떠들었다. 늦은 밤에 이렇게 떠들어도 되냐고 물었더니, 여기엔 자기들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더러 온통 남자들뿐인 이곳의 퀸이라고 했다. 내가 수건을 청해도 ‘퀸이니까’ 하며 내주었다.
제임스는 아무 정보도 없이 콜롬비아에 무작정 입성한 나를 위해, 지도를 펴놓고 갈만한 곳을 설명해 주었다. 엄마가 한국인이라며 '안동'을 아느냐고 했다. 엄마의 고향이라고 했다. 내년쯤 한국에 갈 거라고, 도보로 한국을 한 바퀴 돌까 한다고 했다.
12시가 훌쩍 넘은 후에야 난 방을 안내받았는데, 2층 침대들 옆의 싱글 배드라서 너무 노출되는 느낌이라고 했더니 방을 옮겨주었다. 그 방에는 남자 한 명이 자고 있었고, 싱글 침대 3개가 나란히 비어 있었다. 나는 그 남자와 침대 두 개를 사이에 두고 창가 쪽의 침대를 썼다.
남자 한 명밖에 없는 방이라 신경이 좀 쓰였다. 그래서 잠을 설쳤는지 모르겠다. 악몽을 꾸었다. 이 호스텔에서 2명이 살해되었다. 그래서 어떤 연유인지를 밝히려고 밤새 안간힘을 쓰며 공포에 질리던 꿈이었다.
이곳으로 올 때 택시 안에서 본 경찰차와 골목에 모여 있던 사람들, 공항에서 일, 그리고 일면식도 없는 남자 한 명과 단 둘이 한 방에서 자는데서 오는 불안감 등등이 작용했던 것 같다.
두렵고, 떨리고, 흥분된 보고타에서의 첫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