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보고타, 보떼로, 니키타

- 콜롬비아

by Annie


아침에 존이 지도를 갖고 설명해준 대로 골목을 타고 내려왔다. 도중에 생 오렌지 주스를 한 컵 사서 마시고, 맨 아래까지 내려갔더니 큰 도로가 나왔다. 먼저 심 카드를 사서 인터넷을 개통했다. 그리고 광장으로 갔더니 수많은 비둘기 떼가 시커멓게 앉아 있다가 푸드덕 날아올랐고,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이 그 사이에서 즐거워했다.


어렸을 때는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이라 여겼고, 한국에서 흔하지도 않았던 참이라 약간 이국적인 판타지를 갖고 보았었다. 그러나 요즘엔 음식 부스러기들이 있는 곳에 잔뜩 모여들곤 하는 비둘기 떼가 조금은 찜찜하고 반갑지 않다.


광장 초입에는 벼룩시장처럼 천막 점포들이 늘어서 있었다. 나는 길거리 수레에서 깎은 망고 한 컵을 사서 먹으며, 슬슬 걸어 다녔다. 그리고는 존이 알려준 카페를 찾아 나섰다.

콜롬비아 커피의 원산지답게, 카페 Arte y Passion의 커피 맛은 아주 좋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곳에 있는 동안 내내, 카르테헤나 행 비행기 예약 건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 결국 예약에 성공하지도 못했다.



콜롬비아 - 1 (1).jpg 거리의 예술가


카페를 나와 보떼로 미술관에 들어갈 즈음 시작된 비는, 미술관을 다 돌아보았을 때까지도 그치지 않았다. 우산이 없어서 그곳 정원 벤치에 앉아 다시 비행기 표 구입을 시도해보았다. 하지만 또 실패하고, 비행기 가격은 더 높아만 갔다.

가격비교 사이트에 뜨는 낮은 가격의 에이전시들을 클릭하다 보면, 티켓 구매를 이런 식으로 허탕 치기가 일쑤다. 마침내 가장 싼 항공 티켓 에이전시는 포기하고, 좀 더 비싸지만 가끔 이용했던 여행사를 통해 시도했더니 일사천리로 결제가 되었다.


보떼로의 그림은 정말 좋았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위와 아래를 서로 눌러서, 약간 옆으로 퍼지게 만든 형상 같았다. 그래서 사람이고 바나나고 악기고, 모두 키는 작고 부푼 빵처럼 통통하다. 말이 통통이지 그 이상이다.

그런데 그게 참 푸근하고 귀여워서, 보는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 짓게 된다. 심지어 그의 모나리자는 보는 순간 모든 사람들에게서 작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게 한다.


사랑스러운 그림들이다. 여자는 모두 한 여자 같고, 남자도 모두 한 남자 같다. 그래서 그가 자신을 포함한 가족들을 모델로 그린 그림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은 고야, 벨라스케스 등 수많은 고전회화들을 원작으로 해서 보떼로 자신의 스타일로 바꾸어 그린 것들이 다수이기도 하다. 색감도 맑으면서 따뜻하다.

그는 기존의 미 개념을 깨뜨리면서, 완전히 다른 차원의 미를 창조한 것 같다. 그것도 보는 이로 하여금 모두 그의 그림과 사랑에 빠지게 하는, 새로운 미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위 사진들 모두 https://cafe.daum.net/_c21_/home?grpid=13qQ7 에서 차용함.



게다가 이 미술관은 입장료도 공짜다. 보떼로는 자기 작품들을 기증하면서, 입장객들의 무료 관람을 조건으로 내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나 같은 여행자도, 나보다 더 가난한 여행자도 마음대로 가서 볼 수 있게 했다. 그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보게 되니, 그에게도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의 그림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미학적 지식이나 안목이 필요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작품의 퀄리티는 어느 대가와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

그가 콜롬비아 작가라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콜롬비아의 저력이 역사 속에 존재한다는 말이다. 보떼로를 통해 콜롬비아가 궁금해진다. 다시 보고타에 돌아오면 그의 그림들을 또 한 번 보고 싶다.


계속 비가 내리고 추웠다. 일단 호스텔로 돌아가 따뜻한 옷을 입고 다시 나왔다. 이번엔 좁은 골목으로 난 길을 내려가 봤는데 거긴 바 거리였다. 어느 바에서 친숙한 음악 소리가 들렸고, 야외정원이 보여서 들어가 봤다. 모닥불이 켜져 있어서 분위기도 좋았다. 음식은 팔지 않는 곳이라, 다른 데서 저녁을 먹고 나중에 들르면 좋을 곳이었다.


존이 일러준 모던 스트리트를 조금 걷다가, 다시 구 시가지로 내려갔다. 걷기가 조금 귀찮아졌지만, 아무 곳이나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식당가에서는 식당 입구에 직원들이 나와서 호객을 했는데, 그중 하나를 보니 메뉴가 괜찮았다. 고급 식당이었다.

커다란 아보카도를 반으로 잘라 씨를 파내고 그 안에 볶은 꾸스꾸스를 얹은 요리였다. 사이드로는 바나나 칩이 있다. 줄리앙이 추천해주었던 히키아코도 있었다. 나는 가벼운 아보카도 꾸스꾸스를 선택했다.


막상 요리가 나온 걸 보니 아보카도는 메뉴의 사진보다 훨씬 컸다. 한국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크기였다. 맛도 좋았다. 난 바나나 칩까지 남김없이 먹고 맥주도 한 병을 다 마시고 나왔다.


또 비가 내렸다. 호스텔로 돌아오는 길에 좀 전에 들어가 보았던 그 바에 들렀다. 비가 와서 장작불은 꺼져 있었고, 바는 사람들로 가득해서 빈 테이블과 의자가 없었다. 구석진 곳에 의자 한 개를 차지하고 앉아 레드 와인 한 잔을 시켰다.

비가 더 많이 내렸다. 내가 앉아있는 곳은 비가 들치기도 했다. 기타 연주자의 라이브 연주도 분위기를 더했다.


비 내리는 저녁, 불 켜진 야외 바에서 사람들은 다들 자기 세계에 빠져 흥겨워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내가 그 군중들 가운데 홀로 앉아 즐기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비가 조금 느끔해지자, 나는 남은 잔을 비우고 일어섰다.


호스텔에 돌아오니, 라운지에서 존과 그의 여동생 스테파니가 기타를 치고 있었다. 어렸을 때 존이 가르쳐주었다고 했다. 참 사이가 좋아 보이는 오누이였다.

존과 스테파니의 듀엣 연주와 노래, 니키타의 하모니카 연주, 빗소리...

그들은 주로 스페인어로 얘기하고 노래도 스페인 어 곡이라 내가 푹 빠져들기는 어려웠으나, 자유롭고 따뜻한 분위기였다.



콜롬비아 - 1 (16).jpg



니키타가 냉장고에서 작은 병맥주를 꺼내 마시는 것을 보고, 내가 말했다.

“니키타, 여기 있는 네 명 모두에게 맥주를 한 병씩 돌려. 내가 쏠게.”

그는 뭐라고 웅얼웅얼하더니, “너는 퀸이잖아.”라고 말을 끝맺으면서 맥주를 돌렸다.

나중에 내가 맥주 값을 계산하려고 했더니, 니키타는 극구 사양했다. 호스텔에서 파는 맥주가 아니라, 자기가 마시려고 사두었던 맥주였던 것이다.

“일주일 후에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너 틀림없이 여기에 있을 거지?”

나는 니키타에게 이렇게 물으며 다음을 기약했다.


그는 열흘 후쯤, 에콰도르로 떠난다고 했다. 내가 리마행 비행기 티켓을 보며, 티켓이 좀 복잡하다고, 제 때 갈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그가 농담처럼 말했다.

“네가 나더러 가자고 하면, 함께 리마로 가줄게.”

그러면 좋겠지만, 난 그가 생각하는 것만큼 젊지도 않고, 그는 나와 함께 여행하기에는 너무 어리다. 여행 중 마주치곤 하는 내 나이의 한계가 참 안타깝다. 나의 심리적 나이는 이들과 딱 맞는데...


보고타의 호스텔에 캐리어를 맡겨둔 채, 큰 가방 하나와 백팩만 메고 카르테헤나 행 비행기를 탔다. 존이 예약해둔 택시는 30,000페소였다. 공항에서 올 때는 45,000페소였으니 그것도 바가지였던 셈이다.


니키타가 택시 타는 곳까지 내 가방을 들어다 주며 말했다.

“너 돌아오면, 존이랑 함께 춤추러 가자. 이건 약속이야.”

우리는 허그하고 그가 내게 볼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바다를 마주한 성벽 도시, 카르테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