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멘도사,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에서 카드로 현금 인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포기했다. 은행 직원과 내가 현금 인출을 위해 고생하고 있는 것을 본 한 청년 고객이 이곳에서 현금인출은 비추라고, 한 번 인출하는데 커미션이 10달러라고, 차라리 신용 카드를 쓰라고 했다. 문제는 그 커미션을 감수하고서도 인출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인출에 실패하고, 멘도사의 도심을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러나 그렇게 무작정 걷다가 좋은 곳을 발견하기란, 도시에서는 좀처럼 어려운 일이라는 걸 다시 확인했다. 호스텔에 돌아가기엔 이른 시간이었지만, 이미 너무 지쳐버려 그게 나을 것 같았다.
샤워하고 방에 있으니 편안하고 좋다. 검색해 볼 것도 많으니 그렇게 좀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겠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니까 그전에 산티아고와 알바로를 한 번 더 만나면 좋겠는데, 폐가 될까 봐 조금 망설여졌다. 그래도 이대로는 너무 아쉬워서 알바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은 조금 더 간단한 저녁을 먹을까? 줄리아도 함께 데리고 와.’
알바로가 답장으로 음성 메시지를 보내왔다.
“물론이지. 아름다운 식당 두 개를 생각 중이야.”
그런데 벌써 저녁 8시가 넘었는데도 후속 메시지가 없어서, 나는 조금씩 지쳐가고 있다. 하긴 어제도 바비큐 준비는 저녁 9시 반부터 시작했지만. 알바로도 일 끝내고 나서 준비하고 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9시가 넘어서 산티아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지금 일이 너무 많아 꼼짝할 수 없다고, 알바로는 일이 끝났을 테니 연락해보라고, 자기는 늦게라도 일이 끝나면 합류하든지 하겠다고 했다.
9시 반이 지나자, 난 포기하고 어제 먹다 한 잔 정도 남은 와인을 따라서 정원으로 나갔다. 진작 이렇게 나와서 즐길 걸, 괜히 기다리느라 조바심만 났었다. 밖에 나오니 밤이라 시원했고, 내가 즐겨 앉는 그 벤치에 길게 누워 마시는 와인도 맛이 좋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알바로에게서 연락이 와있었다. 부재중 전화도 한 통 걸려와 있었다. 너무 늦지 않았다면 지금 데리러 오겠다고, 줄리아랑 함께 저녁 먹으러 갈 준비가 되었다고.
난 후다닥 준비를 하고 호스텔 문 앞에서 기다렸다. 저 앞에 와서 선 차가 알바로의 차인 것 같다. 내가 앞으로 몇 발자국 움직이자 알바로가 차에서 내려 내게로 와 반갑게 포옹했고, 곧 줄리아도 와서 포옹하며 인사했다.
알바로는 새벽에 나가서 좀 전에야 일이 끝나 집에 들어왔다고 한다. 줄리아도 늦게서야 일이 끝나 집에 돌아오자마자, 알바로가 나랑 저녁 먹으러 함께 나가야 한다고 해서 바로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알바로는 피곤해서 목이 쉬어 있었다. 내가 걱정하자 그는 괜찮다며 보통 있는 일이라고 했다.
도심 외곽도로로 한참 차를 몰아서 우리가 도착한 곳에는 여러 개의 팬시 레스토랑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 하나를 골라 들어갔는데 고급스러운 실내 분위기와 예쁜 조명들이 밝혀진 바깥 풍경도 근사했다.
우리는 스테이크와 크리미 한 버섯 파스타, 그리고 블랙 크림 파스타를 시켰다. 와인은 어떤 것이 있는지 물었더니, 웨이터가 6병이나 되는 각기 다른 와인을 가져와 테이블 위에 놓고 설명을 했다. 알바로와 줄리아는 서로 의논하더니 그중 한 병을 골랐다.
줄리아는 나더러 새처럼 조금 먹는다고 했고, 알바로를 보고는 평소에는 잘 먹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모르겠다며 놀렸다. 모처럼 셔츠를 입은 알바로는 좀 더 멋있어 보였다.
줄리아는 원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변호사로 일하는데 주로 기업 인수 합병 일을 한다고, 일이 좋고 재미있다고 했다. 출근은 9시나 10시쯤 하지만, 일단 출근하면 2~3일 집에 못 들어가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했다. 현재 몇 달 동안 멘도사에서 파견 근무 비슷하게 일하는 중이지만, 5월쯤엔 다시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간다고 했다. 지금은 일이 좋고 즐겁지만 워낙 업무량이 많아서,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그건 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알바로는 와이너리 사업 외에도 가축을 사고파는 일도 병행하고 있었다. 지난번 콜롬비아 여행을 다녀온 후로는 자주 틈을 내서 여행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다음에 내가 다시 오면, 그때는 남쪽으로 차를 몰고 가서 함께 와이너리 투어도 하고 칠레에도 가자고 했다. 칠레에도 그의 집이 있다고 했다. 그럴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내가 다시 아르헨티나에, 그것도 이곳 멘도사에 올 일이 있을까?
원래는 알바로 집에서 했던 바비큐 파티에 대한 보답으로 내가 저녁을 대접하고 싶었지만, 산티아고가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대접은 우리가 한국에 가면 해달라고 말하기도 했었고, 이곳 식당이 너무 고급이어서 선뜻 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줄리아가 신용 카드를 내밀고 알바로와 서로 계산하겠다며 다투는 것을 그냥 놔두고 보기만 했다. 이후로 늘 그것이 마음의 빚으로 남았지만, 그들에 대한 고마움과 푸근한 마음이 더욱 깊어졌으니 그것도 좋은 일이다. 언제고 그들이 한국에 오면 정말 최고로 잘해줘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알바로는 나를 호스텔 앞까지 나를 데려다주었고 우리는 작별 인사를 했다.
“알바로, 넌 참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야.”
“고마워 애니, 넌 정말 친절하고..” 우린 아쉬워하며, 서로 고마워하며 포옹을 했다.
나는 그에게 손을 흔들었고 그는 몇 걸음 걸어가더니, 내가 초인종을 누르고 문이 열려 다시 내가 그를 향해 손을 흔들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