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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 아이레스 돌아보기

- 아르헨티나

by Annie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부촌 레골레따 지역에는 저명인사들의 공동묘지가 있다. 이곳은 묘지 하나하나가 마치 집처럼 보인다. 저마다 개성을 드러낸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집들이 동네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그 유명한 에바 페론의 묘지도 여기에 있다고 하는데 난 너무나 넓은 그 묘지 동네 안에서 그곳을 찾지 못했다. 평생 그렇게 특이한 모습의 공동묘지는 처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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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골레따 공동묘지를 나와서는 주변을 좀 돌아보다가, '엘 아테네오'라는 유명한 서점이 있다고 해서 거기도 한 번 들러보기로 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중의 하나인 이곳은 원래는 오페라 극장이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그대로 살려서 1층에는 커튼까지 드리워져 있는 무대가 있는데, 그 무대는 오픈 카페로 사용되고 있었다. 2층과 3층 옆 벽에는 흔히 영화에서 보던 대로 오페라 극장 박스석들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곳에 앉아 편안하게 책을 보고 있었다. 이렇게 근사한 모습의 서점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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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오늘의 마지막 행선지 산텔모로 간다. 버스를 타고 옆에 앉은 여자에게 내가 내릴 곳을 묻고, 또 지도를 보여주며 여기 가려면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물었다. 그녀가 뭐라 뭐라 스페인어로 설명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만 마지막에 자기가 내리는 곳에서 내리라고 하는 것 같아 따라 내렸다.


내려서도 그녀는 방향을 가리키며 이쪽으로 가면 뭐가 있고, 저쪽으로 가면 또 뭐가 있다는 등등의 설명을 친절하게 해 주었다. 물론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양쪽 모두 여행자인 내가 가볼만한 곳이라는 것 같아서, 난 기쁘고 감사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인사했다.


눈앞의 핑크색 건물이 대통령이 집무를 보던 곳으로, 에바 페론도 그곳에서 일했을 것이라는 글을 본 것 같아, 그쪽으로 가서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몇 컷 사진을 찍고 있는데, 상체를 벗은 희끗한 머리의 한 남자가 내게 뭐라고 말을 걸었다.


그는 내게 사진을 찍고 싶냐고, 찍어 줄까 하고 물었다. “어, 그래.”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설마 이 사람이 내 휴대폰을 갖고 튀지는 않겠지 생각하며 그에게 내 폰을 건넸다. 그는 두어 컷의 내 사진을 찍어주고는 어디 가는 거냐고 물었다. 나는 그냥 여기가 어딘지 잘 모르는데, 버스에서 내려 보니 아름다운 건물들이 있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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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가 사진 찍은 거리를 가리키며 저 거리를 구경하고 싶냐고 묻더니, 거기는 그냥 은행이랑 비즈니스 관련 건물들이라 오늘은 모두 문을 닫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토요일이었군. 원래는 어디에 갈 예정이었느냐고 묻기에, 산텔모에 갈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럼 이쪽으로 가면 된다고 하더니 자기가 함께 가주겠다고 했다. ‘뭐, 나야 좋지.’


그는 한참 거리를 걷다가 산텔모가 아닌, 좀 전의 그 비즈니스 지구로 향하면서 잠시 들를 데가 있다고 했다. 그러더니 닫힌 레스토랑을 열쇠로 열고는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자기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이라고 했다. 오늘은 토요일이고 이곳은 상업 지구라 토요일엔 오가는 사람이 없어서 쉰다고 했다.


난 아무도 없는 식당이라 경계를 풀지 않고, 출입문이 약간 열어진 것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는 냉장고에서 물을 한 병 꺼내 주었다. 내가 월요일에도 이곳에 있다면 들르라고, 점심을 대접하겠다고 했다. 명함 위에 ‘알렉산더’라고 자기 이름을 써주며, 혹시 자기가 안보이거든 이 명함을 보여주면 자기가 어디 있는지 알려줄 거라고 했다.


그곳을 나와 또 더 위쪽 도로로 올라가더니 커피 한 잔 하겠느냐며 한 레스토랑 카페를 가리킨다. 그가 준 명함에 있는 그곳이었다. 여기도 자기가 운영하는 곳이라고 했다. 에스프레소와 이곳에서 흔히 커피와 함께 나오는 초생 달 모양의 작은 크롸상을 함께 시켜서 먹었다.


몇몇 사람들이 그에게 인사를 했고, 한 젊은 커플도 그 식당의 스테이크 사진을 찍은 것을 그에게 보여주며 어떠냐고 물었다. 홍보 간판을 위한 사진인 것 같았다. 사진도 근사했고 실제로 한 손님에게 써빙되고 있는 스테이크 플레이팅을 보니 아주 훌륭했다. 나도 한 번 먹어봤으면 싶을 만큼.


그곳을 나와 우리는 ‘뿌에르또 마데로’라고 하는, 내가 가봐야겠다고 정해놓았던 항구로 갔다. 이곳은 작은 천 양쪽으로 바와 레스토랑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밤에 오면 분위기가 좋을 만한 곳이었지만 이 더운 낮에는 그냥 평범해 보이는 천변이었다.

그는 미안하지만 더워서 다시 티셔츠를 좀 벗어야겠다고 했다. 우린 뜨거운 햇빛 속을 걸었고, 그는 도중에 멈춰 서서 표지판의 지도와 그림을 가리키며 이곳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그곳을 지나 산텔모까지 계속 걸어갔다. 골동품 가게들을 지나 벼룩시장 쪽으로 갔더니, 그곳에는 탱고를 볼 수 있는 야외 식당들이 있었다. 내가 맥주를 사겠다며 저기 가서 앉자고 했다. 난 맥주 500cc를, 그리고 그는 콜라를 시켰다. 술은 평소에 너무 많이 마신다며.


탱고를 추는 여자는 정말 매혹적인 얼굴과 몸매를 가졌으나 몹시 어려 보였다. 깊게 갈라져 한쪽 다리가 길게 드러나는 검정 드레스와 춤 동작을 보며 어쩐지 죄의식 같은 게 느껴졌다. 그녀가 너무 어려 보여서, 여름이를 연상시켰기 때문인 것 같다.


탱고는 특유의 끈적하고 선정적이거나, 댄서들이 스스로 즐기는 춤이라기보다는 그냥 무대 공연 같았다. 정제되고 훌륭한 공연. 쿠바나 멕시코에서 보았던 댄서들, 각각 살사와 맘보를 추던, 그들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흥겨움은 이곳의 댄서들에게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곳을 나와 우리는 산텔모 시장 상가로 들어갔고, 그곳 오픈 바에서 나는 맥주를, 그는 와인을 한 잔 시켜서 토리조 샌드위치에 곁들여 마셨다. 요리기구들을 이용한 실내 장식이 근사했고 샌드위치 맛도 일품이었다. 연거푸 맥주 두 잔을 마신 나는 알딸딸하니 기분이 좋았다. 탱고를 본 그 야외 식당에서 그가 말했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누구 사진 찍어주는 거 좋아하지 않아. 너를 보는 순간, 와우! 정말 아름다운 여자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사진 찍어줄까?’ 하고 말을 걸었던 거야.”

그는 요리조리 말을 돌려가며 내 나이를 짐작해보려 했다. 그렇게나 장성한 딸들이 있다니 믿을 수가 없다고, 그럼 마흔 정도 되는 거냐고, 몇 살에 결혼한 거냐고 물었다. 내 나이를 알고 싶은 거냐고 물었더니 아니라며 직접 나이를 묻는 것은 피했다.


그는 아내와 10년 넘게 별거 중이라고 했다. 너무 많이 싸웠다고, 그런데 또 아내가 이혼하기는 싫어한다고, 여전히 서로 마음 써주고 아끼는 마음도 있지만 함께 살고 싶지는 않다고, 더 이상 그 싸움을 계속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식당을 두 개나 운영하며 하루 15시간 넘게 정신없이 일하는 이유는 두 딸을 대학에 보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이 대학만 졸업하면 일에서 벗어나 여행도 하고 그러며 살 거라고 했다. 휴가 때는 항상 미국의 실버타운에 살고 계신 엄마(80세)에게 가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무척 강한 사람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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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두 잔을 마시고 나서 걷다가, 조금 들뜬 기분으로 얘기하는 나를 보며 그가 말했다.

“아까 너를 처음 봤을 때보다 지금 네가 훨씬 더 아름다워 보여.”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알렉산더도 단조롭고 사무적으로 자신을 대하는 이들만 보다가, 여행자인 내가 술기운에 약간 들떠서 아이처럼 떠드는 것을 보며, 그렇게 느꼈을 수 있다.

그러니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들일수록 데면데면하게 대할 일이 아니다. 언제라도 감탄할 준비가 되어있는 자세로 대할 일이다.


그는 내게 다시 자기를 찾아올 거냐고 물었다. “원치 않겠지.”하면서. 나를 처음 데려갔던 그 식당에 와서 자기가 안 보이면, 아마 아래층에서 일하고 있을 거라고 했다.

그는 최고의 스테이크를 대접하겠다며, 식당에 전화를 걸어 미리 주문을 했다. 아까 갔던 카페 레스토랑에서 미리 주문해둔 스테이크와 맥주를 기분 좋게 즐기고, 그는 내게 택시를 잡아주었다.


난 팔레르모에 호스텔을 예약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산텔모였다. 택시 기사는 호스텔 길목에 이르자 이곳이 골동품 샵들이 있는 곳이라, 밤에는 사람들도 없고 택시도 없다고 했다. 위험하다는 말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호스텔 주인은 참 좋은 사람이었다. 객실도 깨끗하고, 수건 있냐고 아쉬운 표정으로 물을 것도 없이 침대 위에는 희고 깨끗한 수건이 놓여 있었다. 샤워 후 룸에서 뭉개려 했는데, 저쪽 끝 침대의 룸메이트가 들어갈 때부터 이불 뒤집어쓰고 자고 있어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그렇게 있다가는 그냥 인터넷으로 한국 뉴스나 뒤지고 메시지 체크나 하고 있을 것 같아, 이과수로 가기 전에 사두었던 와인 한 병과 노트를 들고 로비로 내려왔다.


와인을 한 잔 따라 마시며 글을 쓰고 있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테이블 위로 올라오더니 와인 병에 코를 대고 킁킁거린다. 나오길 잘했다. 여행지에서도 룸은 긴장이 풀어지는 곳,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곳이다. 방 밖으로 나와야 머리도 회전되고, 글도 쓸 수 있고, 비로소 깨어있는 여행자 모드로 돌아갈 수 있다.


마치 집에 있다가 안 되면 카페에 가고, 그래야 비로소 글 한 줄이라도 쓰게 되는 것처럼. 11시 10분, 와인 두 잔을 마셨다. 그만 들어가 자야겠다. 이제 그래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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