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타고니아로

- 아르헨티나

by Annie



공항 행 버스는 기분이 좋다. 조금 붐벼도 상관이 없다. 결국 사람들은 거의 중간에 내릴 것이고, 곧 공항을 향해 쭉 뻗은 길을 내달리게 될 것이다. 창밖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활기차서 좋다. 등을 훤히 드러낸 짧은 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성도, 세미 정장의 훤칠한 남성도 모두 영화 속 배우들 같다.


이 공항은 이미 내겐 익숙한 곳이 되어버렸다. 멘도사에서 이곳으로 올 때, 이과수 오고 갈 때, 그리고 오늘, 벌써 네 번째다. 근사한 베이커리 카페와 스타벅스가 칸막이도 없이 이어진 넓고 편안한 곳. 이곳 사진을 보내주었더니 정우는 좋은 곳이라고 했다.


“이곳에서는 심지어 바다까지 보여. 다만 바다 색깔이 파랗지 않고 어두운 흙빛이야.”

“원래 바다색은 그래. 난 그게 더 좋아. 깨끗한 바다색은 가짜 같아. 깊이가 없어. 진짜 바다는 야성적이지. 깊고, 힘차고, 감추어져 있지. 너처럼.”

이렇게 말해놓고는 자기 말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가 왜 흙빛을 원래 바다색이라고 하는지 난 알 수가 없었지만 그래, 어쨌든 그는 음유 시인이다.



1 (1).jpg



친구 윤이는 또 이런 글을 보냈다.

“누구는 가는 곳마다 흥이 달려있고 누구는 흥이 특정한 곳에만 있으니, 그 누구는 식성이 풍부한 것인가, 다른 누구의 편식이 심한 것인가?”

저와 나의 서로 다른 성향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한국에 있는 사람들은 귀국을 앞둔 나를 걱정한다. 비행기 편이며, 유럽과 세계로 퍼져가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이다. 나도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게 독감 같은 것이라 걸린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니라고는 하지만, 내가 전파자가 되어 sns상에 회자될 것을 생각하면 무서워진다. 방송에 ‘남미를 여행한 50대 후반 여성이...’ 생각만 해도 낯 뜨겁고 겁이 난다.


정우 말대로, 난 원래 항공편의 경유지였던 파리에 갔었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파리에 코로나가 급속도로 퍼지는 바람에 파리를 경유하는 항공편이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다는 메시지가 왔었다. 설혹 풀린다 해도 코로나 상황이 크게 호전되지 않으면, 자칫 귀국도 못하고 파리에 갇히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파리는 비싸기도 하고 내가 열흘 이상 머물만한 곳도, 코로나가 극성인 그곳에서 코로나에 걸리는 것도 모두 꺼려지는 상황이었다.


이곳 남미라면 좀 아프면서도 더 견딜 만할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아프면 사람의 마음은 극도로 약해진다. 더구나 이역만리에서, 게다가 바이러스 감염자라는 눈총을 받으며... 생각하기도 싫다. 말은 여유롭게, ‘그래, 안되면 더 놀다 가지’ 하지만 여행 끝자락을 앞둔 지금, 나는 집이 그립고, 이제는 돌아가고 싶다.


지금 비행기를 타고 향해가는 엘 칼라파테의 모레노 빙하를 다녀오면, 남미 여행의 세 가지 위시 리스트(마추픽추, 우유니 소금 호수, 모레노 빙하)를 모두 완수하게 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가면, 그곳의 팔레르모는 이제 내 여행을 차분하게 마무리해주는 곳이 될 것이다. 애들도 보고 싶고 강아지, 구름이도 보고 싶다. 집 밥도 먹고 싶고, 집 근처 식당의 연어 냉우동이랑 라면도 먹고 싶다.


엘 칼라파테에 도착했다. 비행기 안의 작은 창, 그것도 복도 자리에서 옆 사람들 눈치를 봐가며 고개를 뺐더니 아래로 에메랄드 빛 호수가 보였다. 사막지대처럼 키 작은 풀들과 민둥산들 너머로 호수가 있는 특이한 풍경이었다.


내가 예약한 ‘포크 호스텔’은 기대 이상이었다. 휑한 황야에 세워진 새로 지어진 것 같은 동네와 집들. 이 호스텔도 그랬다. 리셉션니스트는 만능처럼 나의 투어 예약, 엘 찰튼 행 버스 예약, 호스텔 픽업 예약까지 일사천리로 다 해주었다. 돈은 많이 들었다. 숙박비와 투어비 포함해서 총 13,000페소, 우리 돈으로 26만 원이었다.


천천히 걸어서 긴 언덕 아래로 내려갔더니 큰 마트가 나왔다. 타운이랄 것도 없는 정말 작은 마을인데 몇몇 집들은 정원이 넓고 예뻤다. 시간이 더 있다면 부에노스 아이레스보다 이곳에 더 머물고 싶다. 마트에서 스테이크 세 덩어리(250페소-5천 원), 토마토, 사과, 바나나 그리고 말벡 와인(150페소-3천 원), 블루치즈, 마늘, 소금, 이렇게 해서 총 850페소어치 장을 봤다. 생각보다는 큰 액수였으나 그것이 얼마나 퀄리티 높은 쇼핑이었는지는 나중에 실감하게 되었다.


엘 찰튼에서 돌아오는 버스비, 그곳에서의 투어비와 이틀 숙박비까지 포함하면 파타고니아 여행 경비는 총 48만 원, 그러면 내가 가진 돈 35,000페소(70만 원) 페소에서 25,000 페소(50만 원)를 지출 예정이다. 그럼 만 페소가 남는 것이니 4일 동안 부에노스 아이레스 체류비로 넉넉하겠다.


아르헨티나의 물가는 무척 쌌으나, 워낙 큰 나라여서 몇 번에 걸친 국내 항공료만 100만 원에, 투어 및 교통비 40만 원 더하면 140만 원 플러스 기타 경비 등으로 가장 많은 비용을 치른 나라이기도하다. 하긴 3주간의 체류로 멕시코와 함께 가장 오래 있었고 가장 스펙터클하기도 했었다.


스테이크용 소고기 3조각을 샀는데 그중 작은 것 2조각은 얇게 썬 마늘과 함께 요리했다. 천상의 맛이다. 게다가 3천 원짜리 말벡 와인의 맛이란! 지금까지 마신 와인 중 가장 훌륭한 것 같다. 그뿐인가, 블루치즈의 그 환상적인 맛!(그때까지 블루치즈라고 알고 먹었던 그 치즈는 포장지가 블루였을 뿐, 사실 블루치즈가 아니었다는 것을 나중에 진짜 블루치즈를 먹어 보고 알게 되었지만.)



1 (2).jpg



라운지에 앉아 스테이크의 마늘 냄새가 강할까 봐, 옆 테이블의 청년에게 미안하다며 와인 한 잔을 나누어 주고는 거의 마지막 한 잔 정도를 남겼을까, 한 병을 거의 다 비웠다. 알딸딸한 기분에 너무 행복하다.

이곳 호스텔은 라운지가 바 같은 분위기다. 상큼, 깔끔하고 은근한 조명이 분위기를 더해준다. 음식을 즐기기에도, 앉아서 글을 쓰기에도 아주 안성맞춤이다.


취한 김에 많은 이들과 카톡을 했다. 정우, 딸들, 친구 그룹, 알바로, 윤이까지. 룸으로 돌아가 누워있고 싶지 않은 기분이다. 이과수 폭포 영상을 보낸 것에 대해 알바로가 음성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과수 폭포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라고. 모레노 빙하도 이과수 폭포만큼이나 좋은 곳이라고.


어쨌든 나는 오늘 많은 이들에게 나의 행복 바이러스를 퍼뜨린 것 같다. 이제 씻고 들어가 잘 준비를 해볼까? 지금 10시 23분. 행복해서 맛있었을까? 맛있어서 행복했을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모레노 빙하 위를 걷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