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르헨티나
이번 여행 3대 위시리스트 중 마지막인 모레노 빙하에 가는 날이다. 무려 20만 원의 투어 비를 내고 왕복 40만 원의 비행기 표와 차비를 들인 투어다. 이번 여행에서 비싼 투어 비용이 그 돈만큼의 가치가 있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지금까지는 그렇다.
잉카 레일과 성계 투어를 포함한 1박 2일의 마추픽추 투어가 그랬고, 우유니 소금 호수가 그랬다. 우유니의 경우는 오로지 그 투어를 위해 볼리비아라는 나라를 방문했고 3일간, 세 번의 투어비와 3일간의 비싼 호스텔 비를 지불했었다. 그리고 원래 3대 리스트는 아니었지만 왕복 비행기와 비싼 입장료를 치렀던 이과수 폭포도 모두 그 값을 충분히 했다. 이곳 모레노 빙하도 그러겠지.
빙하를 볼 수 있는 전망대는 아주 훌륭했다. 처음에 그곳에서 자유 시간이 2시간 30분이라는 말을 듣고 ‘뭐지?’하고 의아해했다. 그냥 전망대일 뿐일 텐데, 그리고 저 앞에 보이는 게 빙하인데 그렇게나 오래 여기 머물 이유가 뭐람. 그러나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전망대 좌우상하로 계속 철교가 연결되어 있어서 위치를 바꿔가며 볼 수 있었는데, 위치가 바뀔 때마다 그 모습이 무척 달라졌으며, 주변의 풍광 또한 너무 훌륭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몇 차례나 빙하가 깨지며 쏟아져 내리는 소리와 사람들의 탄성 소리를 들었다. 그것을 보고 들으며 이것이 신기함에 경탄할 일인지, 기후 변화로 인해 빙하가 자꾸 녹아내리는 것에 대해 탄식해야 할 일인지 잠시 혼란이 왔다.
하얀 빙하의 굴곡진 표면은 빗금처럼 푸른빛이 돌았고 그 아래 호수도 그 빛을 반영하고 있어서 카메라를 줌으로 당겨보면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빛깔이다.
시간이 더 있었다면 좀 더 돌아보고 싶었으나 어느새 돌아갈 시간이 되어버려,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서둘러야 했다.
다시 버스를 타고 가서 빙하 트레킹 하는 곳으로 옮겨가기 위해 15분 정도 배를 타야 했다. 배를 타고 더 가까이 접근한 빙하의 모습은 그 웅장함이 아까와는 또 달랐다. 배에서 내려 빙하 트레킹 지역까지는 해변 같은 곳을 조금 걸어야 했고, 돌아오는 길에는 다른 루트로 숲길을 조금 걸었는데, 그 숲길도 여유롭게 천천히 걸으면 아주 좋을 곳이었다.
빙하 트레킹을 위해서는 바로 아래에서 아이젠을 신발에 장착해야 했는데, 내 차례가 오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드디어 아이젠을 신고 출발해서 빙하를 오르는데, 빙하는 얼음이라기보다는 단단하게 언 눈 같았다. 그것이 수많은 산을 이루고 있었고 우리는 그곳을 등반하는 것이었다.
나는 얼음이 언 거대한 호수 같은 것을 상상하고, 투명한 빙하 위를 꿈처럼 거니는 상상을 했었다. 그러한 나의 상상과는 달리 딱딱하게 얼어붙은 눈 산을,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아이젠으로 쾅쾅 내리치며 힘겹게 걸어 올라가야 했다. 그리고 몹시 추웠다.
게다가 가이드의 끝도 없는 설명을 듣기 위해 중간중간 멈춰 서야 했다. 트레킹의 반환점을 돌아올 때는 너무 추운데, 가이드가 스스로 취한 듯 한없이 설명을 이어가는 바람에 괴로웠다. 정말 열성적이나 내가 정말 싫어하는 타입의 가이드다.
빙하 트래킹을 하는 동안 너무 추웠다. 기침이 나오고 이러다 감기에 걸릴까 봐 겁이 났다. 지금 감기에 걸리면 절대 안 된다. 딱 코로나로 오해받기 십상이고, 실제로 몸이 약해지고 면역력이 떨어지면 코로나에 걸릴 확률도 높아진다.
빙하 투어가 기대했던 만큼 좋았을까? 꼭 한 번은 해볼 만한 정말 새로운 경험이긴 했다. 그야말로 하얀 얼음 산들이 이어진 곳을 여러 원정대가 흩어져서 등반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또한 빙산의 크고 작은 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로운 푸른빛은 묘한 아름다움으로 내 눈과 마음을 홀렸다.
그러나 무겁고 불편한 아이젠을 바닥에 쾅쾅 찍어가며, 물기 있는 얼음 눈 위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느라 힘들었다. 헬멧을 쓴 머리 안으로 찬바람과 냉기가 가득 들어오고, 심한 추위에 떨어야 하는 현실적인 얼음 산 트레킹이었다. 그래서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가이드의 설명이 빨리 끝나서 빨리 내려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었다. 마지막 지점에 이르러서는 꽤 훌륭한 초콜릿이 기다리고 있어서, 그 동그랗고 두툼한 초콜릿을 난 세 개나 집어먹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스탭들이 빙하의 얼음을 넣고, 그 위에 위스키를 부은 칵테일을 한 잔씩 주었다.
발상은 기발했는데 맛은 그냥 얼음 맛이었다. 홍보용으로는 관광객들의 마음을 끄는 기막힌 아이디어인 것 같았다.
가이드의 설명 대신 그냥 친구와 함께 이곳을 등반했더라면 정말 놀랍고 기막힌 경험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난 정말 가이드와 여행하는 것은 맞지 않는 것 같다. 가이드는 안내만 해주고, 도중에 세워놓고 설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여행의 흐름을 깨는 그 지루한 안내가 난 정말 싫다.
춥고 피곤했다. 어서 호스텔로 돌아가 어제 한 조각 남겨놓은 스테이크를 요리해서 와인과 함께 즐기고 싶었다. 그런데 돌아가려면 버스로 두 시간 넘게 가야 한다. 미칠 것 같은 졸음에 몸을 맡겼다가 일어났더니 어느새 엘 칼라파테 시내에 도착했다.
호스텔에 도착하자 먼저 샤워를 하러 들어갔는데, 갑자기 화장실 불이 꺼지며 샤워기의 물도 함께 꺼진다. 샤워는 아직 시작하지 않았지만 양말이며 속옷이며 빨 것들에 비누칠을 했고, 난 이미 벗고 있는 상태였다. 여기저기 샤워 칸을 돌며 확인했지만 물이 나오는 곳은 없었다. 이건 거의 재난이다. 다행히 한참 후 인기척이 나서 도움을 청했더니, 리셉션에 얘기를 했는지 바로 물이 나온다. 다행이다! 아! 행복한 더운물 샤워!
그리고 스테이크 저녁식사를 위해 부푼 마음으로 부엌에 가서 냉장고에 넣어둔 내 음식 보따리를 찾았다. 그런데 거기 넣어둔 내 스테이크용 고기가 사라지고 없다. 그 위에 얹어놓았던 과일 봉지는 칸을 이동해 아래쪽에 있었지만, 내 고기는 아무리 뒤져봐도 온 데 간 데 없었다.
와인과 함께 맛있는 스테이크를 먹는 행복한 꿈은 헛되이 무너져 내렸다. 너무 실망스러웠다. 먹는 게 요즘엔 내게 정말 큰 낙이 되어버렸다. 속상하게도 난 토마토 2개와 바나나 두 개를 썰어 남은 와인 2잔으로 아쉬운 저녁을 때웠다. 과일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저녁식사였다. 누군가 옆에서 자기 음식을 권한다면 그 샌드위치를, 피자를, 파스타를 너무 감사히 먹어주고 싶었다.
내일 아침 7시 30분에 엘 찰튼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한다. 3시간의 버스 여정이다. 식사 중에 젖은 채로 두었던 머리를 드라이어로 말리고, 그래도 좀 추운 것 같아 수면 바지와 폴라폴리스 재킷을 껴입고 잤다.